맥덕목사의 수도원 맥주를 탐하는 지식
아홉, 영성의 깊이는 그윽한 ‘맥주 향’으로부터
(트라피스트 맥주 이야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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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날씨가 추워졌다. 불과 몇 주 전까지만 해도 도무지 가라앉지 않는 열기 때문에 한 발짝만 걸어도 헉헉거렸었던 우리들은 서둘러 두꺼운 외투를 꺼내 입는다. 아픔이 깊은 지구는 각박한 현대사회만큼이나 여유 없이 폭염에서 혹한으로 인간을 몰아치는 듯하다. ‘니들이 저지른 잘못을 느껴보란 말이다!’라고 소리치는 것처럼 말이다.
그 와중에 감기몸살을 된통 앓고 있다. 처음엔 목과 이어진 콧속이 조금 따끔거리는 듯싶더니만, 하루 만에 그칠 줄 모르고 흘러나오는 콧물에서 소리 깊은 기침으로 바뀐 지 벌써 열흘째다. 언제부턴가 몸이 아플 때마다 사람들로부터 걱정이나 안부보단 지적(?)을 더 많이 받게 된 나,
‘왜 그리 힘이 없어 보여?’
‘저기 감기몸살이.......’
‘감기는, 술병(病)이네 술병! 그러니까 맥주 좀 작작 마셔’
‘.......’
맥주 때문이 아니라고, 발병하기 전엔 오히려 다른 때보다 음주횟수도, 양도 현저히 적었다는 말을 아무리 해봤자 허사다. 뭐라 말해도 지금 너의 상태는 술병이라는 사람들의 확신은 쉬 바뀌지 않는다. 처음엔 많이 서운하기도 했지만 뭐 어쩌랴, 선입견 또한 지난 시간동안 내 삶의 궤적이 만든 것 일 테니 말이다. 뭐 사실 골골거리느라 한동안 알코올 종류를 입에 대지도 못하는 순간순간에도, ‘한 잔하고 푹 자면 낫지 않을까?’, ‘중세시대에는 감기처방으로 맥주를 사용했다는데 도수 높은 걸로 한 번 마셔볼까?’하는 생각을 했던 터이니, 주변인들의 단정에는 상당한 근거가 있기도 한 것이겠다.
그럼 뭐....... 어쩔 수 없이 계속 맥주 생각이나 해야지. 이번엔 트라피스트 맥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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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 후반부와 중세유럽 문화의 중심에 있었던 기독교, 아마도 그 당시를 연상해볼라치면 장엄한 미사와 화려하고 웅장한 성당과 같은 그림이 먼저 떠오르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같은 기간의 기독교에는 이와 정반대의 공간이 존재했다. 소박함, 노동과 수행, 명예를 내려놓는 마음가짐을 소중한 신앙생활로 인식했던 이들의 공간, 바로 수도원 말이다. 서구 기독교 전통에서 수도원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기독교의 초기 형성 과정에서 고행과 극기를 중심으로 하는 시리아, 북부 아프리카의 종교전통을 받아들였던 해당 지역 예수 공동체의 수행전통이 훗날 서방 중심으로 재편된 기독교로 유입되었을 가능성은 상당한 설득력이 있겠다.
이러한 수행전통은 교회가 거대화, 정치세력화 될 때마다 신앙의 근본정신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대안으로 떠올랐고, 그와 같은 수행자들의 모임인 수도원공동체로 발전되게 되었다. 수도원은 철저한 자급자족을 원칙으로 했다. 이는 노동과 수행을 근간으로 하는 수도원 문화의 특성이기도 했고, 상공업과 교역이 발전하지 않았던 당대의 상황이 반영된 것이기도 했다. 아무튼 상황이 이렇다 보니 수도사들은 하느님의 뜻을 알아가는 것과 동시에 농사와 생필품 만드는 방법도 터득해야했다. 그들의 삶에서 가장 급선무는 역시 먹고, 마시는 것이었을 터, 양질의 식수 확보가 쉽지 않았던 중세 유럽에서 맥주와 와인 같은 주류는 기호식품을 넘어 단연 최고로 시급한 생활필수품이었고, 수도원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알프스 이북의 수도사들은 일상의 노동에서 빵을 굽는 동시에 맥주를 빚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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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한 삶은 한편 무척 단조로운 삶이기도 했다. 그와 같은 단조로움은 영성수련에 더 없는 환경을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어찌 사람이 영성만으로 살 수 있으랴! 반복되는 일상에서 오는 무료함과 노동과 수행의 노곤함은 주님의 말씀만으론 해소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한 수도사들에게 빚어낸 맥주 한잔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을 지를 설명하는 것은 그야말로 설명충이 되는 지름길! 사순절 금식기간과 같은 고행의 시간, 맥주는 섭취해도 되는 ‘액체’로 인정되었던 바, 수행의 고됨과 허기를 달래 줄 ‘신의 선물’이기도 했다. 뭐니 뭐니 해도 최고의 안주는 역시 ‘공복(空腹)과 갈증’이 아니던가? 맥주는 수도원의 단조로운 일상에 있어 유일한 낙이자 사치였다.
한편, 생필품생산과 관련된 정보가 체계적으로 집대성되거나 전수되지 못하던 시절, 수도원은 당대 유럽에 있어 거의 유일한 교육기관이었다. 수도사들은 성서 및 신학연구와 함께 농업과 생필품 생산을 통해 얻게 된 지식을 정리했다. 이 과정에서 맥주 역시 주먹구구식의 양조를 벗어나 체계적인 계획을 통해 건설된 양조시설에서 엄선된 레시피에 따라 빚어졌고, 수도원마다의 고유한 맛을 형성했다. 엄청 소중한 것이 맛도 좋으니, 수도원 맥주는 한 번 맛본 이들에게 있어 ‘생명수’로 자리 잡았다. 수도원 맥주에 대한 명성은 점차 높다란 수도원 담장을 넘어 세상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순례자들이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수도원이 무상으로 제공했던 식사 중의 한 잔, 또 고관대작이나 교회중요인사의 방문 때 선보였던 특제 음료에 대한 경험 등을 통해서였다. 인기가 높아진 수도원 맥주는 마침내 세상으로 판매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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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는 오래지않아 수도원의 중요 수익원이 되었다. 본격적인 판매를 위해 수도원 양조시설은 크게 확장되었다. 또 대개의 경우 지역 및 국가권력과 결탁하는 가운데 독점적 지위를 누리기 시작했다. 수도원 양조장의 위상이 높아질수록 서민들의 양조장은 문을 닫거나 이전을 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또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는 인간사 진리가 작동하기 시작했으니, 맥주판매를 통해 얻은 막대한 이익은 수많은 수도원들의 세속화로 이어지기도 했다. 맥주의 물줄기가 돈벌이수단으로 파헤쳐진 4대강처럼 그만 혼탁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수도원에서는 교회와 수도원이 정치 세력화되거나 금권에 휘둘릴 때마다 내적개혁운동이 일어나곤 했다. 교회와 수도원의 거대화와 금권화에 문제의식을 느낀 이들 중 베네딕토회 계열의 수도사 20여명이 1098년 시토회를 창설하며 본연의 자세로 돌아갈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며 시토회 역시 초기 창립의 의지에서 멀어지고 있음을 개탄하던 이들이 1664년 트라프(Trappe)에 모여 ‘엄률(嚴律)시토회’를 시작했다. 이들은 시토회의 자정을 외치는 가운데, ‘기도와 노동’이라는 수도원 전통의 가치를 엄격히 준용했다. 엄률시토회는 차츰 서유럽의 여러 지역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는데, 여타의 수도원과 구별하기 위해 자신들을 ‘트라피스트’라고 불렀다. 최초 출발지역인 트라프에서의 정신을 간직하겠다는 의미였다. 이들은 필요한 물품 모두를 노동으로 만들어냈다. 치즈와 같은 발효제품과 함께 그들만의 독특한 맥주도 양조되기 시작했다. 위대한 트라피스트 맥주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