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덕목사의 수도원 맥주를 탐하는 지식
열, 힘든 이웃과 지역을 위한 맥주
(트라피스트 맥주 이야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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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피스트 맥주 1편을 읽다가 혹시 다음과 같은 궁금함이 생긴 분이 계시지 않을까?
‘그럼 수도원 맥주는 뭐고, 트라피스트 맥주는 또 뭐란 말인가?’
쉽게 말해서 수도원에서 만들거나 수도원 전통을 가지고 있는 맥주는 일단 모두 ‘수도원 맥주(애비 맥주: Abbey Beer)’라고 말 할 수 있다. 트라피스트 맥주도 물론 수도원 맥주다. 다만 엄율시토회 즉, 트라피스트 계열 수도원에서 생산한 맥주에 대해서는 별도로 ‘트라피스트 맥주’라고 구분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레페, 바이헨슈테판 등은 넓은 의미에서 수도원 계열의 맥주라 할 수 있으나 트라피스트 맥주는 아니다. 반면, 시메이나 로슈포르 등은 수도원 맥주인 동시에 트라피스트 맥주로 분류된다.
이처럼 트라피스트 맥주라는 것은 수도원 맥주 중 엄율시토회의 전통에 있는 수도원 양조장의 것을 지칭하는 단어이다. 그러니 수도원 계열의 맥주인데 트라피스트의 범주에 들지 않는다 하여 저급하다거나 혹은 트라피스트라고 해서 완전 캡숑 좋다고 말 할 근거는 없다. 최근 유럽 등과 체결한 FTA의 결과와 만원에 네 캔, 또 크래프트 맥주의 비약적 성장 등으로 국내에서도 다양한 라벨과 장르의 맥주를 경험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따라 술자리 마다 ‘이 맥주는 말이야.......’로 시작하는 즉석강연을 하는 분을 만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런데 간혹 어떤 것은 저급하고 어떤 것은 고급지다는 식의 장광설로 핏대 올리는 경우를 보게 된다. 적어도 내가 알고 믿는 한, 가격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맥주에는 계급이 없다. 가진 돈의 부피에 따라 존엄성의 정도가 달라져선 안 되는 우리들 삶의 자리가 그렇듯 말이다. 물론! 사람에 따라 맛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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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피스트 계열 수도원은 전 세계적으로 약 2백 개 가까이 구성되어 있으며, 한국에도 경상남도에 한 곳이 있다. 그러나 이들 모두에서 생산되는 맥주가 바로 트라피스트 맥주라는 이름을 사용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엄정한 품질관리와 무분별한 상업적 도용을 막기 위해 창설된 ‘국제 트라피스트 협회(ITA: International Trappist Association)’에서 공인받은 제품에만 ‘트라피스트 정품(ATP: Authentic Trappist Product)’마크를 붙일 수 있기 때문이다. 협회의 기준은 단순하지만 무척 엄정하다.
1) 엄율시토회 수도원양조장이나 인근에서만 생산해야 한다.
2) 정책, 생산수단, 생산과정 전체가 입증 가능해야 하고, 반드시 수도원의 생활방식에 부합되어야 한다.
3) 판매를 통해 발생한 수익은 복지사업과 수도원 인근 지역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
수행과 노동, 또 약자에 대한 구제를 근본목표로 삼았던 엄율시토회의 정신이 그대로 반영된 규정은 생각보다 매우 엄격하게 지켜진다. 이에 따라 다양한 장르의 맥주를 선보이는 ‘라 트라페 수도원(La Trappe, 네덜란드)’ 은 너무 돈독이 올랐다는 비판 속에서 일시적으로 ATP로고를 박탈당하기도 했다. 또 프랑스 북부에 위치한 ‘몽 데 카 수도원(Mont des Cats)’ 맥주는 그 기막힌 맛에도 불구하고 트라피스트 맥주로 인정받지 못한다. 자체 양조장 없이 위탁생산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몽 데 카 수도원(좌), 라 트라페 수도원(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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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협회가 공인한 트라피스트 맥주 양조장은 전 세계에 11곳 밖에 없다. 이 중 미국(스펜서, Spencer), 오스트리아(엥겔스 첼, Engelszell), 이탈리아(뜨레 폰따네, Tre Fontane)에 각각 한 곳씩 위치한 수도원을 제외한 8개 양조장(라 트라페(La Trappe), 로슈포르(Rochefort), 베스트말레(Westmalle), 베스트플러테렌(Westvleteren), 시메이(Chimay), 아헬(Achel), 오르발(Orval), 춘더트(Zundert)) 모두가 벨기에와 네덜란드에 집중되어 있는 반면, 이상하게도 엄율시토회가 시작된 프랑스에는 한 곳도 없다. 이는 유럽의 이곳저곳을 초토화시켰던 기독교 전쟁과 프랑스 대혁명 등의 시기에 파괴되거나 강제 추방되었다가 가까스로 벨기에, 네덜란드 일대를 중심으로 터를 잡아 생존했던 수도원의 험난했던 지난 세월을 반영하고 있다.
이 지역 수도원들의 고난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유럽인들의 광기 속에 무수한 목숨을 앗아갔던 양차 세계대전 중 수도원 시설은 대개 점령군의 중요시설로 징집되었다. 양질의 숙소와 식사문제를 모두 해결하기에 수도원만큼 좋은 시설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군사거점이 된 수도원 시설은 반대편에게는 반드시 파괴해야 할 적의 거점으로 인식되었다. 수없이 이어지는 폭격 속에서 시설은 파괴되었다. 이때 많은 수도사들이 죽거나 전란을 피해 사방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17세기부터 시작된 트라피스트 수도원의 전통의 명운이 다하는 듯 했다.
하지만 전쟁 이후, 수행의 전통과 함께 그 곳에서 생산했던 여러 제품들, 특히 맥주의 맛을 되살리고자 애썼던 이들의 고집과 헌신에 의해 폐허는 조금씩 원래의 모습을 되찾아갔다. 벨기에에 위치한 오르발 수도원의 경우, 트라피스트 수도 전통을 사랑했던 한 가문이 전 재산을 쾌척해 재건의 밑천을 마련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과정에서 버려졌던 옛 양조장 건물이나 창고의 서까래 등에서 숨죽이고 있던 맥주효모를 기적적으로 만나게 되었다. 이는 마침내 트라피스트 맥주의 재건과 부활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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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페일 라거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트라피스트 맥주의 맛은 낯설다. 어떤 것은 오래된 가죽벨트 같은 향이 나기도 하고, 또 어떤 것은 높은 도수로 인해 한 잔만 들이켜도 거친 숨을 몰아쉬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 맥주들은 저렴한 재료들에 인공탄산을 섞어 순식간에 만들어내는 한국의 대기업형 라거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개성을 가지고 있다. 그와 같은 특성을 살리기 위해 트라피스트 맥주들은 최소 1년 이상의 숙성 기간을 필요로 하며, 병입된 상태에서 2차 발효 공정을 거치기도 한다. 이를 통해 만들어진 독특함과 친해지는 순간, 쿰쿰함과 낯섬이 깊은 풍미와 개성으로 느껴지기 시작하는 순간....... 맥주코너 앞에선 우리들의 가벼운 주머니는 더욱 탈탈 털리게 될 것이다. 매일 매일 추워지는 요즘, 타는 듯한 더위를 식혀주는 라거와 달리 온몸을 훈훈하게 덥혀주고, 깊은 심호흡을 하게 해주는 트라피스트 맥주를 추천한다. 그 맥주들에는 각각의 독특한 맛과 향 이외에도, 역경을 넘어 약한 이들을 잊지 않겠다는 수도사들의 의지, 그 뚝심 있는 이야기도 담겨있다.
열한 번째 이야기: 맥주 종주국 영국, 그리고 수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