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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헌의 인문의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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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헌 인문(人紋)의 종교 26 - 바이러스가 주는 교훈

posted Apr 01,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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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무늬인 종교성에 대한 성찰 25 : 바이러스가 주는 교훈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두 달 동안 많은 것을 바꾸었다. 생존의 기술로 도입된 ‘사회적 거리두기’는 점차 문화와 윤리의 양상을 띠면서 새로운 관습을 예고하고 있다. 이런 변화 가운데 가까운 고통과 먼 희망이 뒤섞여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견딜 수 없는 사람들에게 삶은 더욱 가혹해졌다. 직접적인 생활고 위에 우울증과 죄책감까지 얹힌 삶들이 위태롭다. 정부에서 단행한 재난기본소득은 임시처방일 뿐, 우리 세계가 벌여온 생활양식에 대한 성찰과 근원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바이러스는 공들여 쌓아올린 성과를 허물기만 한 것이 아니라 지난 실패를 일소하는 일에도 관여했다. 촛불혁명 이후 누적된 정치적 실패를 보여준 태극기 부대의 광장 점유가 사라졌고, 배타주의에 물든 교회의 종교적 실패 위에 번성한 신천지의 모략적 포교활동이 그쳤으며, 분단시대의 고질적 국제관계의 상징이던 한미연합 전쟁연습마저 멈췄다. 어쩌면 이런 일도 이제 시작일 뿐, 바이러스가 몰고 올 시대적 변화가 얼마나 낯선 모습일는지 아직 알 수 없다. 다만 지금은 우리 세계가 어떻게 달라질 것인지를 예감하는 목소리만 무게를 더하고 있다.
바이러스가 현상적 공포 너머의 무언가를 암시하고 있다면, ‘문명의 전환’이라는 거대담론을 한 번 던져보자. 78억 세계 인구의 0.01%가 감염된 3월말 현재, 전염병으로 인한 혼란을 드러낸 사회는 대부분 근대 서구문명의 견인차 역할을 한 나라들이다. 종사자들이 도망간 상태에서 노인들의 사체가 무더기로 발견된 스페인의 한 요양원에서부터 유럽문명의 몰락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분명한 것은 수천 수백조 원의 국가재정을 풀어서 방어하고자 하는 체제가 다시 돌아가야만 할 인류의 미래라는 생각은 희미하다는 사실이다. 복지국가의 허상과 규모의 경제가 지닌 취약성이 보도되는 가운데 비어가는 것은 타임스퀘어만이 아니다.
영원할 것만 같던 소비문명이 바이러스에 점령당하자 마트의 텅 빈 상품 진열대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자본의 특권이 무소불위의 힘으로 작용하던 균질의 공간(isotopia)이 퇴색되면서, 대신 불안과 이상이 뒤엉킨 혼종적 공간(heterotopia)으로 나타나고 있다. 바이러스가 창궐한 이 시기가 지나면 무엇이 남을까? 다시 이전 시대로 평화롭게 복귀할 수 있을까, 아니면 달라진 시대를 맞게 될까? 생명의 진화에는 두 갈래 길이 있다. 위로 오르든지 아래로 퇴화하든지. 머물 수 없다면, 오르는 길을 걷자.
근대정신은 공동체로부터 분리된 개인을 중심으로 구축되었는데, 근대문명의 위기 역시 거기서 비롯되었다. 근대정신의 기초를 놓은 데카르트는 세계를 구성하는 ‘실체’(substance)의 특징을 자기 독립성 즉, ‘자기 존재를 위해 다른 존재를 반드시 필요로 하지 않는’ 개체적 존재방식에서 찾았다. 그 위에서 전개된 근대과학이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atomism)을 부활시켜서 사물의 존재와 운동을 입자들의 충돌로 이해했기 때문에, 근대의 삶이 개인주의와 적자생존의 방향으로 흘러간 것은 당연했다.
종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신과 분리된 인간’ 그리고 ‘세계와 분리된 신’을 연상하게 된 근대정신은 한편으로는 신 없이도 가능해진 무신론적 삶을 상상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세계를 심판으로 파괴하는 신에 관한 무자비한 교리도 만들 수 있었다. 근대적 무신론과 유신론 모두 개체화된 인간과 신에 관한 사고습관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인간의 위기를 신의 기적적인 개입을 통해서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유신론이든, 그런 일은 없다고 보는 무신론이든 간에, 삶을 스스로 건사해야 한다는 뼈저린 개인주의로 얼룩진 문명을 극복하는 일에 무력했다.
그런데 바이러스 감염경로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오래된 진실을 보게 되었다. 그것은 삶을 구성하는 거대한 연결망에 관한 것이다. 우리 삶은 마치 인드라의 궁전에 걸린 그물의 구슬처럼 다른 이의 삶과 엮인 채 서로가 서로를 투영하고 있다. 그래서 너로부터 분리될 수 있는 내가 있을 수 없다는 사실, 너의 질병이 너만의 책임은 아니라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
바이러스로 인해 고통당하는 우리는 만물의 연관관계를 보며 상호 책임성을 생각하게 된다. 이 경험이 적자생존의 문명에 봉사한 힘의 복음을 내려놓도록 이끌 수 있을까? 다행히 위기는 인간을 낳는다. 부족한 산소 호흡기를 누구에게 씌워야 할지 고민하는 사회에 자신의 호흡기를 거절하는 신부가 나타난다. 위기 속에서 다음 문명으로 나아가는 징검다리가 놓이는 것이다. 위험을 감내하는 것이 현재 일이 되었다. 문명과 안전을 혼동했던 자본주의적 비관을 이겨내고, 새로움을 잉태하는 진취성으로 미래가 열리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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