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무늬인 종교성에 대한 성찰
참회로 시작된 종교
고통과 아픔을 겪은 영혼에 주어진 유일한 보상은 높아진 평화의 전망이다. 먼 옛날 식민통치로 고통당하던 유대의 민중들이 ‘로마의 평화’라는 슬로건의 위선을 간파하고 예수의 복음에서 평화를 찾았던 것은 위대한 일이지만, 그 위대함은 자신들의 고통에 내장된 것이었다. 로마의 평화가 승리주의 이데올로기 위에 건립된 평화라면, 예수의 평화는 그 승리주의 이데올로기에 맞아 죽은 정신이 부활해서 이룩한 평화였다.
종교마다 자기 믿음의 논리(logic of faith)를 갖고 있지만 대부분의 권고는 ‘사랑과 자비를 통해 평화에 이르라’는 말씀으로 수렴된다. 그것은 고통당하는 이웃을 향한 연민에서 시작되어, 종국에는 그들과의 연대로 나아간다. 그것도 끝은 아니다. 종교의 위선과 무능은, 고통당하는 사람을 도리어 위험한 사람으로 취급하는 정신의 도착에서 비롯된다.
사랑과 자비가 종교의 익숙한 권고이기 때문에 그것이 얼마나 삶을 뒤흔드는 명령인지 실감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사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을 따르는 것만큼 위협과 도전이 되는 것도 없다. 그 까닭은 인간이 동물적 자기 욕망을 버릴 수 없어서라기보다는, 탐욕의 시대를 지나오는 동안 ‘이웃’이라는 말이 순결함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우리가 마치 ‘이웃사랑’이라는 요구를 난생 처음 듣는 것처럼 순진한 태도로 생각해 본다면 이웃은 ‘늑대’처럼 다가올 것이라고 말한다. 키엘케고르는 ‘우리가 온전히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이웃은 죽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살아있는 이웃, 특히 고난당하면서 내가 여기 있음을 알아달라고 외치는 이웃을 만나고, 그들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 삶에 커다란 위협이다.1)
자본주의라는 에고이즘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사랑하라’는 종교의 명령을 따르는 일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이 불가능한 일에 대한 도전에 종교의 운명이 걸려있다. 그래서 여전히 다가오는 나라를 꿈꾸며 자기 시대의 사랑을 도입하려는 모험적 인간들이 종교에서 탄생하는 것이다. 그들은 직감하고 있다. 아무리 사랑이 삶을 위협하고 뒤흔든다 할지라도 사랑을 재도입하는 노력 없이는 신을 말할 수 있는 종교의 공간이란 결코 마련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하지만 관념론자가 실패하듯이 현실은 바람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체제 안의 삶에서 사랑의 행위는 규율에 제재 당하다가 좌절하며, 결국 스스로 자신의 능력을 불신하기에 이른다. 좌절의 무리들은 고통당하는 이웃을 두려워하지 않은 듯이 도리어 거룩한 정죄의 언어를 남발하며, 그것으로써 하나님마저도 사랑할 수 없는 종교의 위선을 완성한다.
만일 사랑의 행위가 단순히 나로부터 출발하는 ‘몸의 선행’이라면 그런 위선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종교의 위선은 보다 더 깊은 데 있다. 사랑이란 자기로부터 비롯된 일방적인 행위라기보다는 복잡한 세속을 살아가는 인생에 가치와 아름다움을 부여해주는 하나님의 선물에 가깝기 때문이다. 사랑이란 하나님이기 때문에 (요일 4:8), 인간이 소유하여 존재의 자격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근대이성의 시대를 거쳐 오면서 종교는 어떤 교리에 대한 ‘지적인 동의’를 강조해왔으며, 그 교리에 동의한 모든 무리에게 종교인이란 라이센스를 부여했다. 그러나 그것은 종교란 이름의 미몽에 불과하다. 믿음이란 어떤 교리에 대한 지적인 동의가 아니라, 어떤 새로운 프로그램, 말하자면 다가오는 하나님나라의 질서에 대한 헌신에 가깝다. 신앙이란 ‘삶을 헌신하는 방식’으로서, 상대방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바꿔서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예수의 첫 번째 외침이 ‘참회하라’였음은 우연이 아니다.
참회는 나쁜 행실 이후에 있는 종교적 통과의례가 아니라, 다가오는 새로운 세계 앞에 서 있는 자기를 뚜렷하게 의식할 때 가능한 어떤 것이다. 돈과 권력과 힘을 숭배하는 우리들의 문화 속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은 두려움과 욕망을 이겨내는 길고 어려운 훈련을 요청한다. 그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신을 향한 인간의 영혼은 자기를 버려서라도 신의 맘과 뜻을 얻으려는 본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역사는 파괴와 정복의 시대를 너무 오래 달려왔고, 우리의 정서는 그것에 너무 익숙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역사 앞에, 이웃 앞에, 자연 앞에서의 참회이다. 참회란 미래에 얻을 보상에 대한 기대가 만들어내는 종교적 작위가 아니라, 사랑과 자비를 이루기 위해 과거의 질곡을 넘어가려는 오늘의 용기가 이룬 업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참회는 종교가 벌이는 새로운 형태의 모험이다. 이 참회가 우리와 우리 세계를 새롭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는 새로운 공동체를 향한 확신이 필요하다. 그런 확신의 씨앗은 참회이다. 참회는 역사에 심는 믿음의 씨알로서, 그 싹이 죽음의 땅을 뚫고 올라와야지 생명의 꽃이 피고, 평화의 열매가 맺힐 것이다. 하나님나라의 이상이나 새 문명을 지어갈 힘은 그 씨앗이 땅의 거죽을 뚫고 올라올 때에나 생겨나는 것들이다. 고백과 찬양이라는 외적인 징표에 매달리는 종교보다 존재 자체가 믿음이 되도록 격려하는 종교가 그립다.
1) 이웃 : 정치신학에 관한 세 가지 탐구: 케네스 레이너드, 에릭 L. 샌트너, 슬라보예 지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