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무늬인 종교성에 대한 성찰 12 : 범재신론 (Panentheism)
종교가 인간의 활동이라면 결국 그 진정한 힘은 사유의 능력에 있다. 종교의 흥망성쇠는 그 세계관에 좌우된다는 말이다. 19세기 후반 서구 문명이 무신론으로 물들어간 이유는 기독교 신학이 낡은 세계관을 대변하는 보루로 전락한 사실에서 기인한다.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서구 지성은 두 가지 면에서 기독교 종교를 비판했다. 하나는 사상적 정신지체요, 다른 하나는 지배체제를 옹호하는 윤리적/정치적 타락이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일반지성을 갖춘 사람들에게 정통 기독교의 가르침은 믿겨지지 않으며, 믿기에도 나쁜 사상이 되었던 것이다. 기독교를 신랄하게 비판한 니체가 교회의 아들이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는 ‘교양인’을 비판하고, ‘예언의 꿈과 별의 징조’를 가진 종교를 갈망했다.
20세기 기독교 신학은 니체의 비판을 감당할 수 있는 종교를 구상하기 위해 한 세기를 사용했다고 하면 과장일까? 종교가 가진 본래적 창조성과 진취성을 되살려내기 위해서, 기독교 신학은 한편으로는 과학과 철학의 성과를 수용한 새로운 세계관을 정립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사회학의 비판정신을 담아낼 목소리를 마련하고자 분투했다. 전자를 대표하는 것이 과정신학이라면 후자를 대표하는 것은 민중신학(해방신학)이다. 이 두 신학은 모두 전통적인 기독교 신학이 전제한 고전적 세계관(그 근대적 형태인 초월적 이신론)을 비판하고 새로운 세계관을 대변하고자 했다. 민중신학자 서남동은 그것을 가리켜 범재신론(凡在神論, panentheism)이라고 불렀다.
범재신론이란 용어는 독일 철학자 칼 C. F. 크라우스(1781-1832)가 처음 사용한 것으로서, 전통적인 기독교 유신론이나 그것에 대한 비판으로 태동한 범신론(pantheism)과는 다른 세계관을 가리킨다. 범재신론적 세계관이 정교하게 가다듬어져서 20세기 중반 이후 어느 정도 퍼지게 된 데에는 과정신학자 찰스 하트숀의 공헌이 크다. 그는 범재신론적 세계관을 가리켜 다섯 가지의 속성(ETCKW)을 모두 가진 신을 이 우주와의 관계성 속에서 설명하는 사유체계라고 말한다. 즉, 신은 영원하며(eternal), 동시에 시간성을(temporal) 갖고 있으며, 의식적(conscious, self-aware)임과 동시에 세계를 인지하며(knowing the world), 이 세계를 벗어나 존재하지 않고 모두를 감싸 안는(world-inclusive) 특징을 가진다. 사실 이런 세계관은 오래 전 차축시대에 밝아오는 인류 정신의 도처에서 싹이 텄다. 하트숀에 따르면 이집트의 이크나톤, 중국의 노자, 그리스의 플라톤, 인도의 힌두교 경전, 유대-기독교 전통의 성경에 이 세계관이 등장했다고 한다.
그런데 범재신론이 근대 후기에 재등장하게 된 까닭은 기독교 신학이 활용해온 ‘고전적 유신론’이 18세기에 이르러 이신론(理神論, deism)이라는 형태로 굳어지고 그 세계관이 종교지성을 납득시키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기독교의 고전적 유신론이라 함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특징을 가진 사상을 말한다. 첫째는 초자연주의적 이원론과 결합된 세계관으로서, 신은 세계의 시간 속에 참여하지 않고, 세계를 자신 안에 품지도 않은 채, 초자연 즉 자연세계의 외부에 존재한다고 여겨진다. 둘째는 기계론적 세계관과 결합된 신의 불변성(impassibility) 관념으로서, 신은 초자연에 존재하면서 자신과 분리된 자연(세계)을 창조하고 일정한 법칙에 따라 기계처럼 움직이도록 정해놓았기 때문에, 이 세계의 운동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는 것으로 여겨진다. 셋째는 신의 활동을 기적(miracle)의 방식으로 설명하는 것으로서, 신이 이 세계에 자기 뜻을 보여주기 위해 간헐적으로 자연법칙을 깨트리며 간섭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세계관을 대표하는 시대가 18세기의 유럽 기독교라면, 19세기에 도래한 무신론은 그 세계관과의 투쟁 속에서 승리를 거둔 지성이라고 할 수 있다.
아이러니한 것은 오늘날 기독교 종교가 퇴행하면서 18세기적 세계관으로 숨어들었기 때문에, 21세기의 교회에서 반지성주의의 실체를 경험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범재신론’이라는 용어마저 불온한 사상처럼 취급되고, 기독교 종교는 마치 과거의 특정 교리에 스스로를 밀어 넣는 자폐증세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역사를 길게 보면, 과학이나 철학과 마찬가지로 종교 역시 ‘우주사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목표로 움직이고, 또 ‘인생이 튼튼함을 느끼도록’ 하는 방향으로 자라난다. 성서는 이에 대해서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고(live in), 움직이고(move), 존재한다(exist).”(사도행전 17:28)고 말한다. 하나님과 세계(인간, 역사)의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파악하고자 하는 이 심정을 해명하고자 무수히 많은 신학이 일어나고 사라졌다.
범재신론이 한 사상가에 의해서 완결된 사유체계라기보다는 성장하는 종교정신을 자양분으로 삼는 것이기 때문에, 어디까지를 범재신론으로 규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는 논란이 있다. 일반적으로 범재신론은 신(神)의 ‘이중적인 무한성’을 동시에 포괄하려는 세계관을 말한다. 한편으로 전통적인 셈 족 계열의 종교가 신의 ‘초월적 무한’을 강조하는 이원론적 특징을 띠고, 다른 한편으로 인도 계열의 종교가 신의 ‘내재적 무한’을 강조하는 일원론적 특징을 띤다면, 범재신론은 이 둘을 동시에 포섭하고자 한다. 특히 20세기의 과학이 밝혀낸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바탕으로, 범재신론은 불일불이(不一不二)적 관계를 이루며 존재하는 역동적(섭동적) 세계에서 신과 우주의 창조적 활동을 설명하려는 신학의 대명사라고 하겠다.
범재신론이라는 단일한 이름 아래에는 다양한 목소리가 있다. 현대 신학자들 가운데, 폴 틸리히, 위르겐 몰트만, 존 캅, 샐리 맥페이그, 함석헌 등의 사상에서 다채로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들은 기독교의 고전적인 유신론에 대한 비판뿐만 아니라, 범신론적 사유와의 차별성을 가지면서, 무신론적 현대문명이 낳은 결과에 대한 비판의식까지 담은 복잡한 사유체계를 전개한다. 이들은 모두 철학적 합리성을 폭넓게 유지하면서, 근대 과학과의 대화 속에서 유신론적 사유가 가능한 지점을 최대한 열어가며, 기독교 신학이 맞고 있는 오늘의 문제를 풀어가고자 했다. 보편성을 추구하는 만큼 이웃 종교와의 대화 역시 장려되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아무리 반지성주의로 침몰하고 있다 해도 결국 그 방향으로 가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