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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헌의 인문의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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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헌 인문(人紋)의 종교 14 - 계시의 하부구조

posted Mar 28,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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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무늬인 종교성에 대한 성찰 14 : 계시의 하부구조

 

 

 

분단과 전쟁의 상처를 안고 있는 이 땅의 봄은 아프게 다가온다. 해마다 봄은 제주의 4월을 찾더니 피 흘린 진실을 차츰 드러냈다. 그러는 동안, 억울한 죽음을 향한 정부의 사과가 있었고, 금년에는 학살의 책임에 대한 군과 경찰의 사과도 있을 것이라 한다. 거의 오긴 했지만, 당시 군정(軍政)을 펼치며 사태를 주도한 미국의 사죄가 있기 전까지 제주의 봄은 아플 것이다.

팽목항의 4월은 어떤가? 필사적으로 사실을 호도한 지난 정권을 몰락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진실의 봄은 여태 오지 않고 있다. 사람들을 마치 비웃기라도 하듯이 진실은 봉인되어있다. 그 사이 유능한 종교를 자처하는 몇몇 기독교인은 세월호의 침몰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밝혀주었다. 자식 잃은 부모에게 신의 계시를 전달한 그들로 인해 비록 팽목항의 진실은 보지 못했지만, 계시라는 이름으로 유통되는 종교의 기밀은 알게 되었다. 역사의 아픔을 담고 있지 않다면 신의 계시도 조롱거리에서 멀지 않다는 점을.

 

나에게 종교는 신의 비밀에 관한 탐구가 아니다. 종교가 때로 신비롭다 한들 인간의 지성을 초탈한 신비주의는 영혼의 목표로서 지속되지 못하며, 반대로 지성에 순응한 종교는 영혼을 매혹하며 이끌지 못한다. 종교의 진실은 삶의 표면에서 채취되지 않지만, 그렇다 하여 삶을 떠난 초월의 샘에서 영생의 물을 마실 수도 없는 노릇이다. 종교는 신비와 지성 사이에 기거하면서 신의 부름을 인간의 심장에 부을 뿐이다.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대체로 종교의 대답은 신에게서 오지 않는다. 신은 단지 물을 뿐 대답은 인간(이 사는 세계)에게서 나온다. 성경 역시 아담(인간)을 향해 묻는 신의 질문으로 인간과 신의 관계가 시작된다. 신은 묻는다.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창 3:9) 이 신의 물음이 자기 삶 속으로 침입하고 있음을 느낀 마음에 종교가 움트고, 그 물음에 대한 진지함만큼 종교는 깊어진다. 군함과 상선을 타고 온 선교사들이 전해준 신학 교리를 암송한다 하여 종교가 태동하는 것이 아니다. 종교는 신의 물음을 느낀 인간의 맘에 맺힌 추구이다. 현실을 견뎌내고 넘어서고자하는 추구.

종교가 길을 잃게 되는 경우는 신의 물음이 던져진 곳, 즉 신의 계시를 필요로 하는 이 세계를 보지 않을 때이다. 계시란 본래 땅에 닿아 몸을 이룬 신의 뜻이지 실체 없이 허공을 떠도는 관념의 메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마치 신의 관점에서 계시를 말하는 종교는 오만과 교만을 버릇처럼 살다가 결국엔 메아리처럼 사라지고 만다. 역사에 살아남은 종교는 신의 뜻이 계시처럼 빛나는 지점을 피조물의 신음, 민중들의 눈물에서 찾은 종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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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점에서, 한국 신학에 적용된 통찰력 있는 개념 가운데 하나는 ‘계시의 하부구조’라는 단어이다. 40년 전 죽재 서남동은 당시 기독교 신앙이 민중의 고난과 무관한 방향으로 흘러간 이유에 대해서 주목했다. 그리고 그는 그 답을 ‘생각과 언어와 가치판단, 미(美)에 대한 감식’까지도 지배적 정신구조에 동화된 종교의 모습에서 발견했다. 대안은 분명했다. 종교가 인간을 노예화시키는 지배이데올로기가 되지 않을 수 있는 길은 계시와 복음의 하부구조를 밝히는 작업이 필요했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본래적인 계시와 복음은 상부구조라고 말하는 이념과 하부구조라고 말하는 물질적 (사회적·역사적·신체적) 실체가 있는 것이다. 역사적 계시의 물질적 실체, 곧 ‘몸’은 ‘가난한 사람’이다. 그렇기에 오늘의 교회가 성서적 계시와 복음에 참여하고 상속받으려면 가난한 사람들과의 연대에서만 가능하다. 복음과 계시로부터 그 구성요인인 ‘가난한 사람들’을 사상해버리고 남는 것은 추상적인 이념인 계시, 복음뿐인 것이다. 그러한 것은 허구요 아편이다. (서남동, 민중신학의 탐구, 357)

기존의 신학들은 계시의 상부구조에 집착했고, 그것을 마치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이 말해왔다. 그러면서 정작 고통당한 민중들을 비난한 반면, 억누르는 지배층에게 충성을 다했다. 종교가 성할 리 없었다. 관념적인 종교는 신의 초월적 목소리에 집착하지만, 이천 년을 살아온 세계종교는 신이 육체를 입고 육박해 들어오는 이 세계에 주목한다.

계시의 하부구조를 언급하고 밝히는 것은 관념적 교리 종교를 해방시키는 작업이다. 위기를 맞은 종교의 부활은 늘 마음에 대한 육체의 부활, 정신에 대한 물질의 부활, 남성에 대한 여성의 부활, 지배자에 대한 민중의 부활, 하늘에 대한 땅의 부활, 이성에 눌려 있는 감정과 본능의 긍정을 동반했다. 계시의 하부구조에서 하늘의 뜻을 읽어내는 것이 참 종교에 가깝다. 한 많은 이 사바세계가 실상은 신의 성례전이었음을 깨달은 마음에야 하늘의 영성이 깃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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