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무늬인 종교성에 대한 성찰 17 : 마르크스 동상 곁에서
난생 처음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일행보다 늦게 출발한 이유로 유서 깊은 도시를 둘러볼 시간은 네댓 시간밖에 없었다. 공항 근처 호텔에 짐을 풀고 곧장 붉은 광장으로 향했다. 성 바질 성당과 크레믈린 등 위대한 건축물로 둘러싸인 광활한 광장, 거기는 각양각색의 평화로운 모습을 띤 여행객과 시민들로 가득했다. 한 세기 전 세계 인민들의 영혼을 뛰게 한 사회주의 혁명이 여기서 펼쳐졌단 말인가! 어느덧 분주해진 나의 발길은 볼쇼이 극장을 향하고 있었다. 아니다. 맘은 길 건너편 마르크스 동상을 향한 것이다. 이 도시에서의 마지막 시간은 그에게 빼앗겼던 고통스럽게 맑은 영혼을 떠올리며 추억에 잠기고 싶었다. 하지만 동상이 있는 작은 공원은 수리 중이었고, 선생은 펜스에 갇혀 있었다.
삼십 대 후반을 지나던 어느 날, 사상적으로 영향을 준 사람들을 그려보다가 그들의 사진을 하나로 엮어본 적이 있다. 시간이 흐른 지금 다시 생각하면 목록에 추가될 이가 없지 않으나 여전히 이 사진을 바탕화면으로 사용하며 내 사상의 지도가 어떠했는지를 되돌아보곤 한다. 사진 속의 인물 가운데 시작점이 되는 맨 왼편 위에 있는 인물은 여전히 구글에서 가장 빈번하게 검색되는 바로 그 사상가이다. 내 청춘의 시작은 그의 목소리가 영혼에 울리면서부터인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그를 닮은 세계에 대한 회의가 나를 밀고 가다가 나중에는 화이트헤드로 이끌었지만 말이다. 아무튼 두 사람의 영향은 나를 물들였다.
김희헌 목사의 스승들
두 사상의 결합을 보다 진지하게 관심하게 된 것은 보다 최근의 일이다. 그것은 지난 한 세대 동안 신자유주의가 전 지구적 차원에서 폐해를 낳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많은 진보주의가 어쩌면 사상적 유미주의에 더 관심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게 되면서부터이다. 과장해서 말하자면, 만 개의 진보사상이 한 개의 신자유주의 체제를 이기지 못했다는 회의가 인 것이다. ‘포스트모던’이라는 접두사를 가진 제 사상이 저마다의 취향을 긍정하는 동안 실상은 공동체적 실험을 동력화 할 수 있는 실사구시의 대안사상을 구축하고 연대를 실천하는 감각은 도리어 후퇴하고 만 것은 아닌가 하는 느낌말이다. 그럴 때 떠오른 것은 마르크스와 화이트헤드가 엮여 만들어진 튼튼한 사상의 밧줄이었다.
얼마 전 읽은 「유기체적 마르크시즘」 (Organic Marxism: An Alternative To Capitalism and Ecological Catastrophe, 2014)은 마르크스의 사상을 화이트헤드의 생태주의 사상과 결합시켜 실질적인 정치실험을 기획했던 경험을 소개한다. 화이트헤드의 유기체적 사유체계 위에서 다시 마르크스의 해방 전략을 작동시킴으로써, 한편으로는 당위성에 입각한 정치철학적 논의를 극복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구체적인 사회정책의 입안과정과 유리되었던 일종의 사상편력을 해소하고자 하는 것이다. 책의 문제의식은 단순하다. 먼저 ‘왜 마르크시즘인가’(‘Why Marxism?)를 다시 물으면서 자본주의 시대의 근본문제를 해결할 사상으로서 마르크시즘의 가능성을 재점검한다. 그 다음에는 21세기에 작동 가능한 마르크시즘을 위한 재구성의 방식을 ‘from modern to postmodern Marxism’이라는 주제로 논의한다. 그 결과물이 ‘유기체적 마르크시즘’(organic Marxism)이다.
인류의 삶은 불평등과 파괴로 귀결되어버리는 신자유주의적 방식으로는 지속가능하지 못할 것이다.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이 위기를 자본주의 자체의 해결 방식으로는 해소할 수 없다는 것 또한 분명하다. 그래서인지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는 다른 세계를 꿈꾸는 사람들에 의해서 여전히 가장 빈번하게 소환되고 있다. 그렇다고 산업자본주의 단계에 대응하여 형성된 마르크스의 사상으로 오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과장일 것이다. 거기가 산업문명과는 다른 감수성을 지닌 생태적 마르크시즘이 모색되는 지점이다. 결정론적 역사관과 유토피아적인 낙관주의를 극복하고, 사회경제적 분석과 함께 예술, 문학, 종교 등의 창조적 역할을 적극적으로 고려하면서, 인간만이 아닌 모든 지구 생명체에 대한 생태학적 의식을 갖춘 해방사상이 도래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우리로 하여금 현재의 질서로부터 몸을 빼지 못하도록 만드는 주술과 미신으로부터 보다 더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인류의 길은 이전의 사회체제와 비교해보면 보다 혼성적인 제도실험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무제약적 개인주의와 소비주의를 양산했던 자본주의 제도를 극복하는 한편, 기존의 사회주의가 시도했던 국가주도의 산업 육성이나 모든 사적 소유를 제거하는 방식이 아니라 보다 유연하게 공동의 관심사를 구현해가는 문명 말이다. 현재 우리가 사는 질서를 구성하는 지식의 뿌리인 근시안적 편의주의를 이겨낼 정신의 승리는 과연 가능할까? 배부르면 나태해지는 동물과는 다르다는 사실에 희망은 있다. 야만적인 삶에서 생겨나는 슬픔과 수치를 이겨낼 인간의 긍지는 반드시 올라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