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무늬인 종교성에 대한 성찰 21 : 당위성의 감각
길게 보면 역사가 진보한다지만 눈앞에 펼쳐진 현실의 만화경은 기대를 무너뜨리곤 한다. 수구세력에 의해 점령당한 광화문광장에는 촛불시민들의 한숨이 쌓였고, 현 정권에 대한 누적된 실망은 이제 그 개혁의 능력은 물론 의지마저 의심하기에 이르렀다. 수개월째 지속된 검찰의 꾸준한 만행이 불의를 사회화하는 동안, 헤아릴 수도 없이 모인 수많은 이들의 검찰개혁 목소리는 그에 못지않은 수가 질러대는 반대 목소리로 인해 중화되곤 한다. 그러는 동안 한 야당의 원내대표는 좌파독재를 주장하며 ‘10월 항쟁’을 외치는 일마저 벌어졌다. 73년 만에 되살아난 그 단어는 진실도 맥락도 요구하지 않는 텅 빈 기표가 되고 말았으니, 말도 되지 않는 말잔치다.
조국사태를 통해서 우리 사회는 진정 이념보다는 기득권의 문제를 들여다보며 더 근원적인 성찰을 하게 되었을까?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그 깨우침이 이 혼돈의 시대에 위안을 주지 못하는 듯하다. 광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반동정치와 수구종교의 정략적 혼거(混居)는 인간에 대한 믿음을 파산상태로 몰아가고 있다. 정치와 종교가 그토록 증오와 독선의 목소리를 앞세우는 건 길을 잃었다는 말일테다. 그런데 가짜뉴스로 정치동력을 삼는 이들의 탈진리(post-truth)의 열기는 식을 줄 모르는 듯하다.
이들만의 문제일까? 탈진리 시대의 실제적 문제는 반동적인 존재 자체보다는 그 반동적 흐름을 제어할 제도적/사상적 장치의 부재에 있다. 어쩌면 그것은 다양성의 윤리로써 관용을 권장해온 탈근대(postmodern) 정신이 마주친 복병 가운데 최대의 적으로서, 당위성의 감각이 소실되거나 왜곡된 지점에서 나타나는 증후군이다. 만일 윤리가 욕망(want to do)과 당위성(ought to do)의 분별에서 비롯된다면, 당위성에 관한 감각의 왜곡은 오늘 우리 세계가 맞고 있는 윤리적 위기의 근본문제일 지도 모른다.
이 정신의 위기는 당위성을 구성하는 관념들, 즉 도덕적 객관성(moral objectivity)과 동기부여(motivation)에 관한 신념이 무너진 데서 비롯된다. 말하자면, ‘고통당하는 사람을 괴롭혀서는 안 된다’는 도덕성을 뒷받침하는 어떤 객관적 토대에 대한 신뢰를 잃을 경우, 윤리는 저마다의 주관적 감정분출로 환치되어 ‘자식을 잃은 아비의 단식을 조롱하는 폭식투쟁’마저 제지될 수 없다. 또한 우리가 ‘왜 도덕적이고자 하는지’ 그 동기부여에 관한 근거가 희미해질 때, 도덕의 동기는 인간의 욕망일 뿐이라는 진화생물학의 파편적 주장이 윤리적 감수성을 갉아먹게 된다.
탈근대 정신이 해방의 길을 당당하게 걷기보다는 탈-진리적 일탈을 보이는 까닭은 당위성에 관한 감각의 왜곡에서 비롯된다. 자유와 평등을 향한 근대적 주체의 이상이 문명의 결실로 채 여물기 전에, 소유를 향한 무한경쟁에 너무 오래 시달렸기 때문이었을까? 당위성의 감각이 엉키고 말았다. 그러면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말하며 서로 부담을 주기보다는 그저 ‘하고 싶은 일’을 하라는 너그러운 권면이 고단한 사람들의 마음을 채웠다. 그것이 마치 ‘서로에게 너무 중요한 관계가 되지 말자’는 모종의 합의가 되진 않았는가. 그렇게 당위성의 감각이 불분명한 세계에서 지성의 분투는 무모한 정신에게 승리를 안겨주고, 극단을 오가는 불길한 열정이 마치 진리를 대변하는 듯 광장을 지배한다. 병든 시대가 질러대는 열띤 신음소리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든 생각이다. 탈근대적 정신의 특징을 그려내는 방식이 문화-언어담론에서 종교담론으로 이동하고 있는 양상에는 어떤 ‘당위성’에 관한 목마름이 있는 듯하다. 이를 테면, 우리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모든 차이를 용인하는 관용의 미덕만이 아니라, 보다 온전한 삶으로 도약해야만 한다는 당위성의 감각이 계발돼야 한다는 갈망이 커지고 있다는 말이다.
당위성은 애초부터 거룩하고 신성한 무엇에 대한 관념과 결부되어 있다. 내가 거룩하고 신성하게 여기는 것은 나를 추동시키는 당위성의 감각을 부여한다. 다시 말해서, 거룩한 무엇과 조화를 이루고자 하는 마음은 그 거룩한 무엇이 요청하는 행위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동반한다. 그렇다면 여기서도 남는 문제는 무엇을 거룩하고(holy) 신성하게(sacred) 여기느냐 하는 것이겠다. 익히 보아 왔듯이 낡은 정치를 지탱하는 일그러진 당위성 뒤에는 뒤처진 종교 관념이 도사리고 있다.
하지만 시대적 소명이 크다 하여 모두가 부처가 될 수는 없지 않는가. 고통의 세계에 집착하지 않는 무상(無常)과 무아(無我)의 해탈까지는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평화(shalom)와 사랑(agape)에 충동된 감각을 지닌 영혼이 자라나는 것으로 족하다. 극단적 열정을 따라 춤추지 않으며, 중요성을 따라 절제된 단념을 이끌어오며, 은총의 세계 앞에서 겸손할 수 있는 고요함을 지닌 영혼들이 자라기까지 우리 시대는 광풍이 이는 광장의 수치를 겪어야 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