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수동성, 그 안에 있는 능동성
살다보면 원하던 원하지 않던간에 어떤 일들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바라고 원하는 일이라면 기쁘게 받아들이면 되는데, 원하지 않는 일이라고 해서 거부할 수는 없다. 거부할 수 있는 아무런 방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 일은 내게 너무 가혹하니 다른 것으로 바꿔달라고 할 수도 없고,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났냐고 따져 물을 수도 없다. 이미 일어난 일을 되돌릴 수도 없다. 그저 지극히 수동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수 밖에는 아무런 다른 도리가 없다.
무능하다. 수동성을 마주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 중 하나이다. 일어난 일 앞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은 무능감과 무력감을 느끼게 한다. 무능감을 느끼는 것은 인간에게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다. “내가 그 때 이러이러하게 했다면 이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텐데.” 라는 말도 마치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있다고 믿고 싶고 , 자신의 무능을 방어하고 싶은 마음에서 나오는 말일 것이다.
인간의 가장 수동적이고 무능한 상태는 아기이다. 아기는 자기에게 일어나는 일을 온전히 수동적으로 받아들여야한다. 아기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아무 것도 없다. 어른들은 아기를 돌볼 수도 있고, 걸을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과 관계하기도 한다. 아기는 그 어느 것하나도 할 수 없다. 아기는 누군가 돌봐주지 않으면 살 수 없다. 돌봄을 고스란히 받아들여야한다. 어쩌면 가만히 누워있기만 하면 보살펴주니 얼마나 편하고 좋으냐고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것은 어른의 관점이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아기의 관점은 다를 것이다. 어른의 경우에도 자신은 할 수 없는 것을 다른 사람이 능숙히 하는 모습을 바라보기만 해야할 때 과연 좋고 편하기만 할까?
처음 상담실에 왔을 때 영수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부정하거나 부인 했고 되돌리고 싶지만 그럴 수 없음에 매우 고통스러워했다. 자신의 잘못으로 그 일이 일어난 것처럼 자책했고, 그 날 자신이 조금만 일찍 혹은 늦게 그 곳에 도착했다면 그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꺼라고 괴로워했다.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차차 영수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한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어떤 회기에서, 영수는 “그 일은 이미 일어났고, 저는 받아들이는 수 밖에 없네요.”라고 말하고는 아주 슬프고 서럽게 한참을 울었다. ”그러네요. 받아들일 수 밖에 없네요.”라고 말하고는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는 무능한 상담자가 된 나도 같이 눈물이 났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에, “선생님. 그런데, 생각해보니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있어요. 그건 바로 우는 거예요.”라고 영수가 말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받아들이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서럽게 울던 영수가 울 수 있다는 말을 하는 것이 참 놀라웠고 반가웠다. 아마도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나니, 작더라도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보게 된 것 같다. 수동성을 받아들이고 나니 능동성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고보면 아기도 할 수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도 바로 우는 것이다. 작고 약한 아기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우는 것이다. 처음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우는 것 뿐이지만, 아기는 차츰 스스로 먹고, 걷고, 말하고 더 많은 것을 하게 될 것이다. 영수도 지금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 앞에서 주저앉아 울고 있지만, 차차 그것을 더 많이 받아들일수록 영수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수동성을 받아들이고나면 그 안에 있던 능동성도 같이 맞이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