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무늬인 종교성에 대한 성찰 29 : mama, I can’t breathe
지난 5월 25일 미국 미네소타주의 한 도시에서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다. 조지 플로이드라는 46세 흑인 남성이 위조지폐 사용 용의자로 체포되는 과정에서 숨진 그 사건은 어쩌면 미국에서는 늘 있는 평범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겨우 비명이 새 나오는 사람의 목이 골절되도록 무릎으로 짓뭉개고 있는 영상 속의 백인 경찰은 그 모습을 지켜본 세계인을 모두 질식시켰다. 몸이 묶여 버둥거리지도 못하는 사람이 심지어 숨을 멈춘 후에도 임무를 수행하는 경찰들의 모습은, 너무도 태연하게 미국이라는 거대 제국이 쌓아온 문명이 허물어지는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아스팔트에 토해진 플로이드의 신음은 이랬다.
I can’t move
mama
mama
I can’t
my knee
my nuts
I’m through
I’m claustrophobic
my stomach hurts
my neck hurts
everything hurts
Some water or something
please
please
I can’t breathe, officer
아프리카의 여성 신학자를 통해서 120여 개의 단어로 활자화된 플로이드의 비명은, 세계교회협의회(WCC) 홈페이지에 게시되었고, 정의와 평화를 바라는 사람들의 기도와 연대의 언어로 회람되었다.
‘숨 쉴 수 없다’라는 목소리는 오래전부터 미국 사회에 사무친 신음이었다. 수년 전 뉴욕에서 비무장 상태로 백인 경찰관에 의해 목 졸림을 당하며 체포된 에릭 가너는 ‘I can’t breathe’를 연달아 외치며 죽었다. 이로 인해,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라는 BLM운동(Black Lives Matter)이 본격화되었지만, 경찰 폭력은 줄어들지 않았다. 2015년 이후 경찰의 가혹 행위 사례는 11,500건에 이르고, 2019년 한 해에만 경찰 총격으로 사망한 미국 시민이 1,100명에 달한다 한다. 하지만, 경찰은 거의 기소되지 않았다. 그러자 변하지 않은 세상에 분노한 사람들이 거리로 나섰다.
플로이드가 죽은 다음 날부터 시작된 시위는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구호로 분명해지면서 수백여 도시로 번졌다. 정부와 경찰의 관성적 대처에 상응하여 시위는 폭동이 되어갔다. 관공서는 불태워지고, 애먼 가게가 약탈당했다. 아메리칸 드림을 유혹하는 힘의 문명이 질서정연한 모습으로 거리마다 나뒹굴었다. 미국뿐일까? 북아프리카 출신 세드리크 슈비아는 파리에서 배달업으로 다섯 자녀를 부양하는 사십 대 초반 남성이었다. 그가 얼마 전 에펠탑 부근을 지나다가 경찰의 검문을 받고 실랑이 끝에 체포되었다. 그도 플로이드처럼 네 명의 경찰관에 의해 바닥에 엎드린 채 목이 눌렸다. 의식을 잃기까지 일곱 번 외친 그의 말 역시 ‘숨이 막혀요’였다. 플로이드 사건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알려졌다.
코로나 시대에 드러난 진실 가운데 하나는, 너무 익숙해서 보지 못하고 있던 약탈과 폭력의 질서에 대한 발견과 각성이다. 과거의 일상이 멈추자, 당연했던 것들이 더는 당연하게 느껴지지 않게 되었다. 그 가운데 미국의 실상이 돋보인다. 19세기적 식민주의와 제국주의를 종결하는 데 일정한 역할을 한 미국은 자신이 파괴한 권력보다도 더 잔인한 폭력과 착취를 토대로 한 제국이 되었다. 그 제국의 진실은 대부분 감추어졌고, 가끔 국제관계에서나 폭로되었지만, 이번엔 국내의 사건들을 통해서 여기저기 드러나고 있다.
제국의 폭력을 오히려 아메리칸 드림으로 해석하게 만든 기묘한 현상에 대해서는 이미 A. 네그리와 M. 하트가 자신들의 책에서 밝혀놓았다. 미 제국은 과거의 제국주의 국가와 같이 정복을 통해서 국가적 경계를 만들어서 지배하는 방식이 아니라, 자신이 존재하는 바로 그 세계를 창조하는 생체권력이 됨으로써 지배의 한계도 없이 자신의 권력을 영원히 고정하는 질서를 구축하고, 계속 피로 물들이면서도 항상 (역사를 벗어난 영원하고 보편적인) 평화에 집착하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갖고 있다. (『제국』, 19-20)
진실과 기만이 공존하는 이 가면의 시대에, 대중을 획득하고자 하는 정신의 욕망은 두 가지 모습으로 서로 충돌한다. 하나는 아래로부터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무기와 돈’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그것을 외부에서 찾아야 한다고 강변하는 마키아벨리적 제안이다. 다른 하나는, 필요한 무기는 대중의 창조적이며 예언적 힘뿐이라고 말하는 스피노자의 제안이다. 이 제안은 어떠한 결정론도, 어떠한 유토피아도 전제되지 않는다. 현실의 분투를 단지 ‘미래를 위한 공백’으로 여기지 않고, 새로운 목적을 향한 창조와 생산의 존재론적 토대로 삼는 것이다. (『제국』, 107)
코로나라고 하는 ‘역사적 웜홀’을 지나는 지금, 새로운 창조와 생산을 향한 ‘부름’을 무엇으로 삼을 수 있을까? 가면이 벗겨진 미국은 두 모습을 동시에 보여준다. 지난 4월에는 20여 개의 주에서 봉쇄령 해제를 요구하는 ‘미국 애국자 집회’가 열렸다. 그 가운데 미시간주에서는 700명의 무장시위대가 주의회 건물에 진입하여 비상사태 해제를 요구했다. 기관총을 들고 민주제도의 보루가 되는 건물을 점령한 그 모습은 신뢰가 파괴된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었다. 반면에, 플로이드의 꺼져가는 신음에서 역사의 부름을 들은 사람들이 있다. 옛 질서의 종식을 위해서 싸우도록 그들을 움직이는 것은 차별과 억압이 만들어낸 슬픈 목소리였다. Mama, I can’t breath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