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노동가치설과 자본주의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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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가치설과 자본주의 이후

 

 

한동안 우리 사회에서는 “제4차 산업혁명”이란 말이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2016년 3월 알파고가 이세돌 9단과 대결하여 4승 1패로 이기면서 크나큰 충격을 안겨 주었고, 그해 여름 다보스 포럼 주제가 “제4차 산업혁명”이었습니다. 이제 막 시작하는 현상에 “혁명”이란 이름을 붙일 것까지는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 “거대한 전환”이 진행 중인 건 맞나 봅니다. 

사이버와 물질이 결합하면 세상이 혁명적으로 변할 거라고 합니다. 우선 네트워크의 양적 변화를 통한 질적 변화, 일명 超연결성(hyper-connectivity)이 현실화하고 있습니다. 스마트폰이나 PC 이외에 우리 집의 TV, 냉장고, 초인종, 수도꼭지, 전등, 냉난방시설, 카메라, 창문, 자동차, 자전거 등 물건들이 네트워크로 연결되는 것을 사물인터넷(IoT)이라고 하는데요. 사물인터넷을 통해 물건들끼리 조합된 경우의 수는 사람 간 네트워크 조합의 1천만 배 이상이라고 합니다. 양적으로 어마어마하게 축적되고 있는 정보가 인공지능을 통해 분석되면, 기존 대비 더 낮은 비용으로 생산성이 획기적으로 개선된 제품이나 서비스가 나올 것입니다. 결국, 인터넷이 디지털 상품의 한계비용을 감소시키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네트워크는 에너지와 물질적 상품의 한계비용을 빠른 속도로 감소시킬 것이라는 게 핵심 논지입니다. 

KAIST의 정재승 교수는 공유, 수평, 개방, 놀이, 의식의 확장과 같은 비트 경제의 가치가 아톰 경제(=기존 제조업, 유통업)로 스며들어 엄청난 혁신이 도출될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살고 있는 아톰 경제는 전통적인 경제학에서 가정하고 있는 원본의 희소성, 공간점유, 에너지, 시간, 비용, 자본, 권력, 노동가치 등의 상식이 지배하는 세계입니다. 반면, 비트 경제는 복제본의 무한증식, 시간과 공간의 초월, 低에너지, 低비용, 小자본, 低노동가치 등 아톰 경제에 대립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이버와 물질의 결합을 통해 앞으로 수십 년간 인간 생활양식과 사회 문화 전반에 Paradigm shift가 진행될 것입니다. 기존 제품 성능 및 디자인이 지속적으로 업데이트되면서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서비스가 창조되고, 궁극적으로 業의 본질이 변화하겠지요. 또한 시장과 임금, 사유재산권에 기초한 자본주의 경제가 뿌리부터 뒤흔들릴 것입니다.

경제학은 인간이 생존에 필요한 다양한 재화와 용역을 생산하고, 이를 서로 교환한 다음 마침내 소비함으로써 살림살이를 일구는 것에 대해 다룹니다. 생산과 교환 방식에 따라 자본주의 체제다 사회주의 체제다 하는 구분이 생깁니다. 자본주의 경제가 뿌리내린 이래 상품과 노동의 희소성을 바탕으로 하는 경제재(economic goods) 비중이 확대되었습니다. 경제재의 개념은 반대말인 자유재(free goods)를 통해 이해하면 쉽습니다. 자유재는 공기, 바람, 햇빛, 빗물, 공유지, 한글 등과 같이 삶에 필수적이지만 누구나 공짜로 누리고 있는 유무형의 재화들입니다. 아마 태초에는 만물이 자유재였을 겁니다. 일전에 안병무 선생님은 만물이 하느님의 것 다시 말해 ‘公’이라고 말씀하셨었습니다. 재화가 누군가의 소유로 울타리 쳐지는 순간 ‘희소성’ 개념이 등장합니다. 모든 이가 가질 수는 없는 것이 자연의 이치처럼 되어 버립니다. 희소한 재화를 교환하거나 평가하는 기준을 가격이라고 합니다.

상품의 고유한 가치는 정해져 있으며, 그 가치를 기준으로 상품의 판매가격은 오르내립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경제에서 상품의 고유한 가치를 찾아내는 방법은 2가지인데, 고전파 경제학에서는 ‘노동가치설’을, 신고전파 경제학에서는 ‘한계효용론’을 주장합니다.

가격 결정의 원리에 앞서 자본주의 생산과정에 대해 살펴봅시다. 생산에는 토지(자연), 자본, 노동의 3요소가 사용되는데, 사실 생산요소의 분류 기준은 애매합니다. 토지(자연)는 인간의 노동이 첨가되어야만 생산요소일 수 있으며, 자본 또한 발생 기원이 인간의 노동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생산요소를 노동과정으로 해체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토지(자연)를 노동대상으로, 자본을 노동도구로, 노동을 노동력으로 대체하여 생산을 이 요소들의 결합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노동대상과 노동도구를 생산수단이라고 부르는데, 결국 자본주의 생산과정은 생산수단과 노동력으로 구성된 특정한 존재 형태가 됩니다. 생산과정을 거친 상품은 유통과정에서 팔려야 비로소 가치를 실현합니다. 이를 통해 발생한 소득은 생산요소를 소유하고 생산과정에 기여한 공급자(지주, 자본가, 노동자)에게 각각 지대, 이윤, 임금 형태로 배분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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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가치설을 학문적으로 정초한 A. Smith는 “이윤과 지대는 노동으로 창출한 가치를 갉아먹는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당시 상업을 통한 가치 창조를 주장한 중상주의에 대항하여 제조업 기반의 국부 창출을 주장한 진보적인 메시지였습니다. 또한 A. Smith는 대표작 『국부론』에서 “세상의 모든 부는 원래 금이나 은이 아니라 노동을 주고 구매한 것이다. 그리고 어떤 생산물을 소유한 사람이나 다른 상품으로 교환하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그 생산물의 가치는 그가 그 생산물로 구매하거나 획득할 수 있는 노동의 양과 정확히 일치한다.” 라고도 말했습니다. 그를 계승한 D. Ricardo는 “기계는 가치를 생산물로 이전할 뿐이고, 오직 노동만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한다.”라고 주장했고, 뒤를 이어 K. Marx는 『자본론』 1권에서 “가치에 관한 한 모든 상품은 일정한 양의 응결된 노동시간에 불과하다.”라고 서술했습니다. 이외에도 협동조합 운동의 창시자인 R. Owen은 만물의 가치를 노동으로 측정하되, 노동자의 입장에서 노동자가 얼마나 희생했는가를 따져보자고 주장했습니다. 이처럼 고전파 경제학은 인간의 노동만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한다는 전제에 터하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K. Marx는 계급투쟁을 반영한 과학적인 노동가치설을 주장합니다. K. Marx에 따르면, 어떤 상품의 가치는 그 상품을 생산하는 데 사회적으로 필요한 평균 노동시간(노동의 양)에 따라 결정됩니다. 기계, 에너지, 원자재는 “죽은 노동”으로서 새로운 생산물로 그 가치가 이전되며, 생산과정에서 지출되는 “살아있는 노동”이 새로운(附加) 가치를 창출합니다. 그리고 이윤은 시장이 아니라 일터의 생산현장에서 발생하는 잉여가치(= 노동가치 - 임금)에서 만들어집니다. 물론 우리가 가격을 흥정할 때는 수요, 공급, 단기적 효용, 기회비용 등의 요소들이 고려되기 때문에 가격이 상품에 내재된 가치와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이른바 ‘전형(transformation)’의 문제가 대두됩니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창조된 모든 가치의 합은 개별 노동가치의 합과 일치하지만, 시장에서의 가격 메커니즘에 의해 창출한 가치보다 넘치거나 모자라게 보상받을 수밖에 없게 됩니다. “사회는 더 부유해지는데 우리는 왜 더 가난해지는가?”라는 궁금증을 풀 실마리를 처음으로 밝혀낸 것입니다.

18세기 말 부르주아가 권력을 확대함에 따라 계급투쟁과 사회적 정의 추구의 이론적 기반이었던 노동가치설의 인기는 시들고, 신고전파 경제학의 한계효용론이 주류를 이루게 됩니다. 한계효용론의 창시자인 W.S. Jevons, L. Walras 등은 ‘한계’ 개념을 도입하여 수학적으로 정교한 가격 결정 모형을 수립하였습니다. 이들은 재화의 고유한 가치는 없으며, 특정 시점에 구매자가 효용과 양에 따라 지불하려는 비용만 있을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한계효용론에서는 모든 자원의 상품화와 사유재산권을 전제로 하며, 모든 인간은 이윤추구 동기를 가지고 자유경쟁시장에서 상품을 사고파는 상인들로 가정합니다. 사회 내 존재하는 모든 욕구와 생산능력이 남김없이 시장에서 대표되며, 자유시장을 통해 결정되는 가격 메커니즘은 희소한 자원의 최적 배분을 유도합니다. 결국 진정한 가치가 창출되는 場은 시장이며, 창출 주체는 기업이라는 논리에 더하여 이상적인 자본주의 모델을 구축한 것입니다.

계급대립도 착취도 없고, 상품과 상인 들로 가득한 세상으로 묘사하고 있는 이론은 현상 유지를 지향할 수밖에 없습니다. 현실의 세상은 어떤가요? K. Polanyi가 『거대한 전환』에서 묘사했듯이 과거에는 돈으로 사고팔 수 없다고 생각되었던 물건과 가치들이 시장화, 상업화의 영역으로 편입되어 왔습니다. 특히 1980년대 이래 신자유주의 흐름에 따른 시장경제의 확대에 제동장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해 비용이 zero로 수렴하는 생산방식이 확산된다면, 한계효용론의 설명력은 그야말로 한계에 다다를 겁니다. 한계효용론은 자발적이고 비시장적인 경제에서 생산된 사용가치(非상품)라든가 사회적 가치에 대한 포착이 어렵기 때문에 괴리와 모순이 불가피한 이론입니다. 마치 한 나라의 1인당 GDP와 그 나라 사람들의 행복지수 사이의 상관관계가 그다지 높지 않은 걸 당연하다고 보는 것과 같습니다. 특히 공유지(Commons)의 가능성이 재조명되고, 사회적 경제가 망가져 가는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떠오르는 이 시대에 한계효용론보다는 노동가치설의 설득력이 더욱 커져가고 있습니다.

다시 K. Marx의 노동가치설로 돌아가겠습니다. K. Marx는 『자본론』 3권에서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현상과 그 상쇄 경향이 충돌하는 특수한 상황에 대해 분석하고 공황의 발생을 설명합니다. 어느 기업이 생산성을 올리기 위해 기계에 대해 투자하면, [기계가치/살아있는 노동] 비율이 상승하면서 해당 기업 또는 부문의 단기적 이윤이 제고됩니다. 예를 들어 10명의 노동자가 삽과 곡괭이를 들고 작업하는 대신 굴삭기 1대를 투입하여 굴삭기 기사 1인만 고용하는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노동자 10명보다 굴삭기 1대의 생산성이 월등하여 공사기간 단축, 비용 절감 등의 효과를 보면, 해당 기업의 이윤은 굴삭기를 도입하지 않은 경쟁사 대비 향상될 것입니다. 그러나, 혁신이 업계 전체로 확산되면, 굴삭기 도입을 통한 비용 절감이 보편화되어 경쟁에 의해 가격이 내려갈 것입니다. 그러면 개별 기업의 초과이윤이 사라지고, 부가가치의 유일한 원천인 노동의 비중이 감소하면서 업계 전체의 이윤율이 저하될 수밖에 없습니다. 경제 전반적으로 이윤율(사회적 평균 이윤율) 저하가 심화되면, 가동중단, 대량실업 등과 같은 경제위기가 오게 되는데, K. Marx는 『자본론』 곳곳에서 공황을 자본주의의 조종(弔鐘)으로 묘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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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여 년 동안 자본주의 시스템은 스스로를 변화시켜 공황이나 경제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이윤율 저하에 직접적으로 대응하는 방법은 노동에 더 높은 비용을 지불하는 것입니다. 노동소득이 인상되어 유효수요가 증진되면, 소비 진작을 통해 불황에서 탈출할 동력을 얻게 됩니다. 또 다른 방법은 새로운 시장과 새로운 수요(고객)를 개척하여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을 늘리는 것입니다. 특히 高노동비용의 새로운 業을 개척한다면 더욱 좋겠지요. 반려동물 연관 산업의 급성장 현상을 보시죠. 각종 반려동물 용품, 사료, 미용, 건강관리에서 장례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業이 엄청나게 많은 노동시간=고용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보경제”의 등장은 앞으로 자본주의 시스템을 크게 위협할 어젠다로서 주목받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정보는 희소하지 않고, 영구 사용 가능하며, 고장나지 않는 무형 재화를 의미합니다. 서두에 얘기한 비트 경제의 가치가 아톰 경제로 스며드는 현상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정보경제”에서는 효용 내지 사용가치의 대부분이 정보를 통해 제공됩니다. 잠재적으로 무한한 정보재의 한계생산비용은 zero로 수렴합니다. 물질상품 안에 포함되는 무형자산의 비중이 상승하는 가운데, 무형자산에 대한 배타적 소유 개념 적용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무형자산에는 자본주의 생산의 3요소 어디에도 속하기 어려운 속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글로벌 기업들은 지적재산권에 더하여 무형자산의 가격을 인위적으로 높게 유지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지만, 정보 축적에 기여하는 대중(multitude)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구조에서 무형자산의 소유권은 차차 공유지(Commons)의 영역으로 귀속되어 갈 전망입니다. 이는 한계효용론의 희소가치에 기반한 가격 메커니즘을 잠식해 갈 것입니다. 앞으로 로봇 생산 등 자동화로 필요노동이 크게 감소하면, 인간의 노동을 소량만 투입해도 만들어낼 수 있는 상품은 결국 공짜로 수렴하게 될 것입니다. 

K. Marx는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에서 아래와 같은 흥미로운 사고 실험을 합니다. 만약, 자본이 생산비가 zero인 도구를 획득할 수 있다면, 자본은 그 어떤 비용도 지불하지 않고 잉여가치를 취하게 될 것이다. 영구 사용 가능한 기계 또는 노동력을 전혀 투입하지 않고 만들 수 있는 기계는 상품을 생산한다 해도 그 상품에 노동시간의 가치를 더하지 못할 것이다. 결국 “공짜 이윤을 창출하는 기계가 대량으로 존재한다면, 그 기계들이 노동가치에 기초한 시스템을 하늘 높이 날려 버릴 것이다.” 여기서 K. Marx의 노동가치설은 궁극적으로 노동가치에 기초한 자본주의 시스템의 소멸을 지향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물론 현실 속의 기계들은 영구적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정보경제”에서는 정보를 통해 효용가치가 대폭 향상된 기계들이 늘어나고 있고, 그 기계들을 통한 한계생산비용은 zero로 수렴해 갑니다. Zero 비용의 효과가 정보에서 기계와 상품으로, 기계와 상품에서 노동으로 확산함에 따라 자본주의 시스템은 붕괴 위협을 받을 것이고, 이에 다양한 대응책을 내어놓겠지요. 우선, 독점을 통해 정보상품, 에너지, 원자재 등의 가격을 높게 형성시키려 할 것입니다. 단기적으로 효과가 있겠지만, 복제본의 무한증식, 低에너지, 低비용, 低노동가치 등 아톰 경제의 침투와 상충하기 때문에 한계가 있습니다. 두 번째 대안은 인적 서비스 부문을 더욱 팽창시키는 것입니다. 이미 시장경제의 폭주로 인해 우리 일상생활의 상당 부분이 상업화되었지만, 집안일이나 돌봄노동, 창작행위 등 기계나 로봇으로 대체하기 어려운 영역들을 소득이 창출되는 서비스업으로 개척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세 번째 대안은 바로 ‘기본소득’입니다. 기본소득은 진보와 보수 진영을 가리지 않고 미래 사회가 필연적으로 봉착할 어젠다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특히 최근 코로나-19 팬더믹이 먼 미래로 여겼던 기본소득의 실현을 앞당기는 계기가 되고 있습니다. 

앞으로 “제4차 산업혁명”의 과정에서 노동가치에 기초한 자본주의 시스템이 소멸할지 아니면 다른 형태의 자본주의로 변모에 성공할지 불확실합니다. 자본주의 이후를 준비하는 다양한 대안 경제 모델의 맹아들이 여기저기 나타나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정보의 超연결성을 통해 무한 창출되는 엄청난 부가가치는 누구의 소유로 귀속되는 것이 옳을까?”에 대한 대답으로서 공유지(Commons)의 가능성이 떠오르고 있습니다. 이에 따른 이슈인 공유지 기반 P2P 생산(CBPP, Commons-Based Peer Production)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룰 기회를 마련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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