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점 맥주를 탐하는 지식 10 : 서기 2000년대를 살고 있다고!(국회의원의 복장논쟁, 그리고 라핀 쿨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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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덕목사 시즌2

편의점 맥주를 탐하는 지식 10

 

열 : 서기 2000년대를 살고 있다고!(국회의원의 복장논쟁, 그리고 라핀 쿨타 이야기) 

 

 

1

 

서기 2000년, 하고도 20년이 지난 지금, 아직도 달력을 보다 깜짝 놀랄 때가 있다. 내가 이천년대를 살고 있다니...

서기 2000년...

1974년에 태어난 나에게 이천년은 종교인들이 기다리는 하느님나라나 개벽된 세상, 혹은 미륵시대 마냥, 까마득하고 먼 존재였다. 초등학교 6학년 미술시간, 교육적 상상력이 몹시도 부족했던 담임선생님의 단골미술과제는 역설적이게도 ‘미래상상도’였다. 뭐 정확한 건 아니지만, 그때 내 스케치북은 우주비행장, 나는 자동차, 태평양 한가운데 건설된 도시 뭐 그딴 것들로 채워져 있었다. 이천년이 되면, 21세기에 진입하게 되면, 마치 20세기까지 존재하던 온갖 문제들이 모두 해결되고, 전 인류는 끝없는 기술진보를 통해 이룩한 낙원에라도 살게 될 줄 알았던 것 같다.

하지만 서기 2000년을 목전에 두었던 20대 초반, 더는 21세기가 희망적인 시간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나는 좀 더 현실적인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가 이천년이 되기 전 해외에 나가보는 것이었다. 비록 코로나19로 인해 크게 주춤하고 있지만, 저가 항공기를 타고 아시아 전역을 다닐 수 있게 된 지금, 해외여행이 뭐 그리 대수냐 싶기도 하겠다. 하지만 ‘라떼’까지만 해도 군 미필 남성의 출국은 여러 가지 제약이 잔존했다. 또 여권발급도 외무부를 직접 찾아가서 접수 한 후 오랜 기다림 후에나 가능했다. 무엇보다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비쌌던 항공권은 당시의 나 같은 20대 초반 서민에게 구경조차 하기 힘든 것이었다. 

그런 내게도 기회가 생겼다. 사실 기회라기 보단 허황된 꿈에 가깝긴 했지만, 암튼 그것의 시작은 한 방송사의 퀴즈 프로그램이었다. 창사특집 퀴즈쇼의 이름은 참 거창하게도 ‘세계로 가는 퀴즈’, 서울에서 출발해 암스테르담을 거쳐 북유럽을 돌며 퀴즈를 풀다가 최종 목적지인 핀란드 산타마을에 도착해 최종 우승자를 가리는 거대 프로젝트였다. 방송국 건너 아파트에 살던 후배가 ‘재밌겠는걸!’이라는 신념 하나로 받아온 참가신청서를 두고 밤새 마시다 낄낄거리며 서명했던 것이 시작이었다. 올림픽 사이클 경기장에 모인 만이천 명 중 하나였던 나는 운 좋게도 몇 번의 OX퀴즈, 필기고사, 일대일 퀴즈 등을 통과한 20명 중 하나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내 인생 첫 해외여행은 심지어 국적기를 타고 시작되었더랬다. 해외 편의 콘셉트는 서바이벌! 매일 오전 진행되는 프로그램에서 탈락한 1~2명의 참가자는 바로 다음 날 짐을 싸서 한국행, 뭐 그런 거였다. 첫 장소였던 암스테르담을 지나 스톡홀름, 오슬로 등을 거치는 동안 절반으로 줄어든 우리는 핀란드행 초호화 유람선 앞에 섰다. 발트해 횡단 유람선에서 사우나를 즐기며 헬싱키에 입성하느냐, 집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기내식을 먹어야 하느냐가 결정되는 상황에서. 나는 그만 마지막 한 문제를 넘지 못한 채 탈락하고 말았다. 노을이 드리운 항구에 정박한 유람선을 바라보며 마셨던 커피가 무척 썼던 것이 ‘내 첫 해외’에서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그 후로 지금까지 핀란드는 내게 무작정 가보고 싶은 땅으로 남아있다. 지금까지 영화 ‘카모메 식당’을 열 번 이상 보는 것에는 대리만족심리도 있지 싶다. 서기 이천년 전에 꼭 가고 싶었던 해외, 그 꿈을 이뤘지만, 마음엔 또 다른 갈증이 남아있었다. 이성에는 끝이 있지만, 욕망엔 출구가 없는 듯하다.        

 

 

2

 

그 마음속 여행로망 1순위, ‘휘바’의 고장 핀란드는 엄청 추운 나라다. 여름엔 새벽까지 해가 떠 있고, 반대로 한 겨울에는 대낮에도 어두컴컴하다. 이 때문에 핀란드를 포함한 북유럽 국가 대부분에서 일정 수준 이상의 호텔이 되기 위해서는 하지에도 빛을 차단해 줄 3중 커튼과 정원 만큼의 눈가리개 구비가 필수다. 핀란드는 아니지만, 앞서 언급했던 스웨덴과 노르웨이에서 새벽 3시쯤은 되어야 어두워지던 하지를 경험하며, ‘밤새워 놀 수 있겠군’이라는 철딱서니 1도 없는 생각을 했었다.

극지방을 포함하고 있는 핀란드의 겨울은 이렇듯 길고도 춥다. 그래서 ‘술’ 하면 러시아처럼 보드카 같은 독주만 들이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핀란드는 생각보다 꽤 괜찮은 맥주의 나라다. 일단 독일 같이 맥주 하면 생각나는 곳과 같이 어지간한 동네엔 지역맥주가 있다. 이를 기반으로 하지 기간 내내 전국에서 맥주축제가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우리에겐 그저 ‘맥주’하면 하나의 개념으로 법제화되어있지만, 핀란드는 도수에 따라 1~4등급으로 체계화하여 관리되고 있다. 4등급 맥주의 알코올 함유량이 가장 높은 식이다. 

한편 전통적인 맥주강국은 자국, 자기고장 맥주에 대한 긍지가 자부심을 넘어 간혹 자만에 이르기도 한다. 그 때문에 크래프트 맥주와 같은 새로운 도전이 무시되는 경우도 있다. 이에 반해 핀란드는 전통맥주 뿐 아니라 실험적이고 상당한 실력을 갖춘 양조장도 대중적 인기 속에서 성업 중이다. 특히 수도 헬싱키는 북유럽 크래프트 맥주의 중심 도시 중 하나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닐 정도다. 

‘저 멀리, 만리타향에 금 덩어리가 있으면 뭘 하나? 아무리 핀란드 맥주가 괜찮다 해도 맛을 볼 수 있어야지?’라며 핏대와 항의를 장착하려는 분들! 한국하고도 편의점에서도 ‘라핀 쿨타’라는 근사한 핀란드 맥주를, 그것도 네 캔 만원에 맛볼 수 있으니, 그 화를 좀 내려놓으시길. 원래 라핀 쿨타는 다양한 도수의 맥주를 생산한다. 심지어 무알콜 맥주도 있다. 이중 수입되는 라핀쿨타 라거는 5.2%다. 핀란드 기준으로는 3~4등급에 해당한다. 라핀 쿨타의 첫 느낌은 강하다. 아마도 캔을 따고 향을 처음 접하는 분들은 ‘라거 치곤 센데?’하실 것이다. 홉과 보리가 어우러진 라핀쿨타 특유의 향은 짙고 여운이 길다.하지만 그에 비해 맛은 라거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겠다는 듯 무척 산뜻하고 가볍다. 지금 한국에서 마신다면, 이어지는 비의 후텁지근함과 코로나19로 인해 무거운 마음을 일순간이나마 개운하게 해 줄 것이다. 인상 깊은 향과 대비되는 산뜻함, 라핀쿨타는 북유럽 일대에서 대규모 라거 생산체계를 선도했던 칼스버그의 계보에 닿아있다. 강렬하게 코를 자극한 맥주가 목을 타고 시원하게 넘어가기 전 만나게 되는 빛깔도 상당히 인상적이다. 반짝이는 황금빛인 라핀쿨타의 색깔은 ‘라플란드의 황금’이라는 이름의 뜻과도 잘 어울린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북쪽, 매서운 추위가 몰아치는 극지방을 일컫는 라플란드는 오래도록 북유럽의 황금창고로 불릴 만큼, ‘골드러쉬’를 이뤘었다. 라핀쿨타는 이 지역을 대표했던 황금, 그 빛깔을 닮은 맥주다. 평소 칼스버그를 좋아했던 분들, 라거 중 체코 필스너의 묵직함보다 날렵하고 산뜻한 뒷맛을 더 선호하는 분들, 독일・벨기에・아일랜드 등 편의점 진열 칸에서 익숙하게 보았던 녀석들을 넘어 새로운 시도를 해보고 싶은 분들에게 권해 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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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pin Kulta brewery in Tornio

 

3

 

핀란드에서 반짝이는 것은 라플란드의 금이나 라핀쿨타 맥주만이 아니다. 핀란드는 2019년 기준 세계 최연소 정부수반을 세운 나라다. 안나 마린, 2019년 12월 의회 인준 기준, 전 세계에서 가장 젊은 나이인 34세에 총리가 된 그는 여성 동성커플 가정에서 자란 여성이었다. 또 한국이라면 입시 준비에만 매진해야 할 18세에 만나 열렬히 사랑해 온 연인과 동거를 이어오던 중, ‘혼외 자녀’를 출산한 엄마이기도 했다. 그이의 경력은 화려하다. 정치학을 공부하던 20대부터 핀란드 사회민주당 활동을 시작한 마린은 서른에 국회의원이 되었고, 지난해 초에는 교통부장관에 발탁되었다가 연말, 마침내 총리가 되었다. 현지시각으로 지난 8월23일에 열린 사회민주당 전당대회에서는 만장일치 속에서 당대표로 추대되기도 했다. 핀란드 역사상 세 번째 여성총리인 안나 마린 내각의 현재 성적은 매우 훌륭하다. 집권하자마자 맞이하게 된 코로나19 상황에서 마린 내각의 핀란드는 전 유럽에서 가장 낮은 확진율을 보인다. 이에 따라 사회민주당의 지지율도 지난해 같은 때(17.7%)보다 높은 20% 이상을 유지하고 있다. 

한편 20대 초반 판매노동자로 일했던 그의 이력에 대해 이웃 나라 에스토니아의 내무부 장관 마르트 헬메가 “판매원이 총리가 됐다”며 조롱하는 일이 있었다. 이에 대해 마린은 트위터를 통해 “가난한 집 아이가 교육을 통해 삶의 목표를 이룰 수 있는 핀란드가 매우 자랑스럽다”고 응수하기도 했다. 안나 마린은 그저 경력이 특이한 여자 사람이 아니다. 그는 극우정당의 약진으로 녹록지 않은 북유럽의 정치권에서 자신의 영역과 가능성을 만들어내고 있는 ‘찐 정치인’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 정도면 핀란드에서 반짝이는 존재의 반열에 올려도 문제없지 않을까? 

 

 

4

 

반면 서기 이천 년 하고도 20년이 지난 지금, 대한민국 국회에서는 때아닌 복장 논쟁이 벌어졌다. 지난 8월 초, 정의당 류호정 의원이 국회 등원 시 입었던 노란색 마스크와 원피스에 대해 일부 정치권에서 ‘격에 맞지 않는 복장’임을 내세우며 문제 제기한 이후 벌어진 갑론을박이었다. 뭐, 그 복장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는 있겠다. 그리고 조폭처럼 검은색 양복 입은 중장년 남성 가득한 대한민국 국회에서 분홍색 땡땡이무늬 원피스는 익숙하지 않은 탓에 당황했을 마음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무슨 군인처럼 출근할 땐 어떤 복장, 머리를 어떤 스타일이라 정한 규정이 있을 리도 없는 국회에서 남의 패션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참 웃프다. 국회의원에 대한 평가는 의정활동이 어떻다거나 정치철학이 어떠하다거나 뭐 그딴, 좀 고급지고 있어 보이는 것들이어야 하지 않을까? 도대체 얼마나들 할 일이 없으면 저러고 있을까 싶기도 하다. 

더욱이 류 의원에게 가해진 ‘티켓다방’, ‘룸살롱 새끼마담’ 등의 언어들 앞에서 나는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이 어처구니없는 언어들에는 국회의 절대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중장년 남자 사람들이 여성을, 자신보다 나이 어린 사람을 평소 어떻게 생각하고 또 대하고 있는지를 압축해서 보여주고 있다. 그자들 앞에 만약 안나 마린 총리가 선다면 분명 그들은 말할 것이다. 

 

아니, ‘샤대’는 고사하고 ‘스카이’도 가보지 못한 노동자 주제에?

저런 어린년이?

뭐? 동성애 가정에 동거에 혼외출산? 개신교 세력이 가만있을 것 같아?       

 

서기 이천 년 하고도 2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정말 이 시대를 사는 것일까? 민간자본에 의한 우주탐사가 현실이 된 지금, 초등학교 때 내 그림 속 세상은 분명 곧 오겠지만, 우리는 안다. 그 세상에서도 노동자는 그 우주선을 만들지만 탈 수는 없다는 것을, 그뿐 아니라 매번 반복되는 산업재해 속에서 그 노동자는 죽거나 매 순간 죽음의 공포를 느끼며 일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슬프게도 21세기에도 전근대적인 중장년 남자 사람들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어린 사람은, 여성은 대상화된 채 늘 미숙한 존재로 비난받을 것이다. 

하지만 또한 우리는 안다. 그리 공고화된 세상 속에서도 파열음을 내는 이들은 늘 존재해왔다는 사실을, 그 사람들의 고귀하고 발칙한 상상력과 실천으로 세상은 이만큼이나마 전진해 왔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니 다가올 21세기가 그리 희망적이지 않다고 해도 너무 슬퍼하지 말도록 하자. 우리에겐 ‘개김성’ 풍부한 감수성과 그 마음에 힘과 위로를 더 해 줄 맥주 한 잔이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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