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무늬인 종교성에 대한 성찰 30 : 개신교 극우주의와 차별금지법
전광훈 씨와 그가 속한 사랑제일교회의 돌출행동이 화제다. 코로나바이러스의 슈퍼전파자로서 사회 전체를 위기로 몰고 간 이들의 모습이 상식 세계에서 멀어 보였기 때문이다. 가짜뉴스로 뭉친 의식의 카르텔도 기묘하거니와 타인의 피해에 아랑곳없이 자기 신념에 몰두한 태도는 도덕성에 대한 기본 믿음조차 허물어뜨릴 지경이다. 노골적으로 극우주의 정치에 동원된 그들을 향해 쏟아진 사회적 환멸은 마치 개신교 자체에 대한 사망선고 같다.
이런 상황에서 개신교 안에 두 흐름이 감지된다. 자성하는 마음으로 환멸의 시대를 씻고자 하는 흐름이 있는 한편, 비난의 표적이 된 그들로부터 거리두기를 하는 흐름도 있다. 보수적인 세력일수록 거리두기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는 개신교 보수주의가 극우세력의 텃밭이 되어온 그간의 정황에 기인한다. 십여 년 전, 전광훈 씨가 개신교 극우세력의 행동대장으로 등장할 때, 그는 ‘하나님의 친구인 조용기 목사와 김준곤 목사’가 자기에게 임무를 주었다고 뒷배를 밝혔다. 뉴라이트 정치세력과의 동맹을 이끈 김진홍 목사 역시 얼마 전까지 전광훈 씨를 가리켜 ‘이 시대의 사사(Judge)’라고 치켜세웠다. 이랬던 사람들이 거리두기를 시도하고 있다.
바람대로 보수 개신교는 극우주의의 오점을 씻어낼 수 있을까? 쉽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극우주의 선동정치는 얼굴만 바꾼 채 여전히 활발하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 모습이 차별금지법 제정 반대운동이다. 차별금지법을 어젠더로 삼은 개신교 극우주의는 그간 한국교회의 대표성을 욕망하며 교단 정치를 잠식해왔다. 2017년 7월, 개신교 21개 교단장의 이름으로 ‘동성애 반대’ 성명을 발표한 이후 거의 모든 교단에서 대책위원회가 설치되었다. 이러한 극우주의의 선동정치는 보수 교단에 국한되지 않고, 진보적 목소리를 내 온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가맹 교단에서도 불거지고 있다.
NCCK 가맹교단도 다수 참여한 2019년 부활절 연합예배에서는 뜬금없이 ‘차별금지법 제정에 반대’하는 선언문이 낭독되었다. 그것이 포문이었는지, 올해부터 감리교는 동성애자를 축복했다는 이유로 교단 소속 목사에 대한 징계 재판을 시작했으며, 예장 통합의 경우 성소수자와 연대감을 표현한 학생들을 처벌하는 것을 넘어서, 비교적 온건한 주장을 해온 신학교 교수를 지난달 출교 처분했다. 심지어 차별금지법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NCCK 총무에 대한 소속 교단의 제재가 가동되는 상황에서, 그 교단 사무총장의 ‘차별금지법은 긴급조치를 연상하게 한다’는 발언은 부적절하고 불길하다. 기장의 경우, 7월에 발표한 교단의 ‘차별금지법 지지’ 성명의 철회를 요청하는 집단행동이 목포노회에 소속된 한 교회에서 일었다.
그러나 거시적으로 볼 때, 이런 광풍이 지속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기독교적 양심을 움직이는 설득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기총이 몰락하자 재집결한 ‘한국교회총연합’(UCCK)은 ‘차별금지법 제정반대 기도회’를 열고, 혐오란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이기 때문에 ‘혐오를 표현할 자유’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억측이다.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면 도덕이 무너지고 종교의 자유가 억압될 것이라고 말하며, 심지어 차별금지법은 반대하는 사람을 억압하기 위한 법이라고 말한다. 이는 궤변이다. 이단과의 접경지역에서 제조된 해괴한 논리가 기독교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버젓이 유통되고 있는데, 차별금지법을 가리켜 ‘공산화 전략’이라고까지 말한 변승우 목사가 실은 전광훈 씨의 비호 아래 한기총의 이단해제 조처를 받은 사람이라는 것에 주목하면, 이런 광풍이 허망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교회가 종교적 책임감을 높이기보다는 극우주의적 편법을 통해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그런데, 한국교회가 혐오를 종교상품으로 삼는 극우주의 선동정치에 쉽게 물든 데에는 이유가 있다. 대외적으로는 확장성의 한계상황에서 오는 두려움이요, 대내적으로는 무게감을 상실해가는 정신의 편협함 때문이다. 이는 교회가 번영신학과 성장주의 프로그램에 의존하여 존립해왔고, 종교적 지성을 세우는 훈련을 경시하고 규모의 정치에 넋을 잃었기 때문에 생긴 결과이다. 종교 지성에서 멀어진 영적 프로그램은 세속화되거나 샤머니즘화 되는데, 이때 세속이나 이단으로부터 차별성을 잃은 종교의 불안을 해소하는 결속 프로그램으로서 계발된 것이 바로 순수종교 이데올로기로 제조된 혐오정치이다. 그런 상품판매의 폐해가 결국 전광훈 현상으로 나타났다.
한국교회가 거리두기를 한다 해서 전광훈 현상을 떨쳐낼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교회 내부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의 근본 문제는 정신의 퇴화라고 할 수 있다. 철학자 화이트헤드가 인간 ‘향상’(ascent)의 지표로 삼은 ‘올바름에 대한 감각’이라는 개념을 빗대어 말하자면, 한국교회는 ‘새로운 미덕을 추구하는 것’을 올바르다고 느끼는 정신적 생동감을 잃고, ‘기존의 구조를 보존하는 것’을 올바르다고 느끼는 정신의 퇴화에 시달리고 있다 하겠다. 퇴화한 종교는 ‘자신의 기준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것’보다 ‘타인을 받아들이기 위해 자신을 깨뜨리는 것’이 영혼의 성숙에 이롭다는 사실을 잊는다.
‘혐오를 표현할 자유’를 요구하는 퇴행적 교회는 결국 역사성을 잃은 폐쇄 종교로 전락할 것이다. 역사의 진보는 새롭게 도래하는 가치(value)를 수용하는 미덕(virtue)을 요구한다. 그러나 새로운 것은 익숙하지 않기 마련이다. 이 순간,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혐오를 표현하는 것은 ‘자유’의 문제가 아니라 ‘한계’의 문제이다. 다시 말해서,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한 혐오의 감정이란 그 존재의 ‘한계로서 허용’할 수 있다 할지라도, 그 존재의 ‘자유로서 장려’될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만일 허용된 것과 장려할 것을 구별하지 않고 혐오 감정을 정당화하는 논리에 지배당했다면, 기독교 종교의 역사는 진즉에 끝났을 것이다. 인류는 자신의 정신을 향도하지 못할 종교에 순종하지 않기 때문이다.
종교의 역사가 어두울 때는 차별과 혐오를 경건의 동력으로 삼는다. 기독교 역시 성경의 가르침이라는 이유로 자연을 파괴하고, 성차별과 여성에 대한 억압, 동성애 혐오와 인종차별 등을 장려하는 불량신학을 배출했다. 율법의 이름으로 폭력을 저지른 무지의 시대였다. 그러나 어두운 마음을 씻어내는 하늘의 믿음이 역사에서 솟아나고, 믿음의 사람들은 자신을 자기 시대의 율법이 아니라 신의 은총에 내맡긴다. 그것이 역사를 헤치고 살아나온 종교의 모습이다. 예수의 제자들 역시, 사마리아 지역을 혐오하는 유대적 반북주의를 극복했기 때문에 내부적 가치를 획득하고, 할례받지 않은 비유대인 자매 형제와 식탁공동체를 마련함으로써 외부적 통합을 이루어가며 역사를 써갔다. 그들이 만일 믿음을 율법의 하위개념으로 삼아 율법의 계명을 따른 차별과 증오에 그쳤다면, 그들은 적(敵)을 발명하는 일을 얼마간 하다가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따라서, 만일 종교의 가르침을 진실로 갈망한다면, 바랄 것은 자기 눈에서 비늘이 벗겨지는 것이지 혐오하는 적들의 죽음이 아니다. 역사를 구원하는 신의 은총을 진실로 믿는다면, 귀의해야 할 곳은 자기 편견이 아니다. 복잡한 듯하여도 기독교가 말하는 믿음의 요체는 사실 간단하다. 오직 사랑이 이기도록 자신의 율법적 판단을 중지하고 하나님의 은총에 귀의하는 거다. 예를 들어, 성소수자를 혐오하는 시대를 향해 준 프란시스코 교종의 고백과 같은 것이다. “신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총 아래로 나아가려는 사람(성소수자)을 내가 어찌 정죄할 수 있는가!”
개신교 극우주의는 당분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종교가 혐오 정치에 의존하는 습속에서 벗어나려면 회개가 동반된 긴 정신의 성숙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시민의식이 성숙해지면서 과대표 된 개신교 극우주의의 텃밭이 현저하게 줄어든 것을 수치로 알 수 있다. 올해 4월 국가인권위가 시행한 의식조사에 따르면, 차별금지법 제정에 찬성하는 사람이 88%에 달하며, 성 소수자의 동등한 대우에 대한 의견도 74%에 이른다. 2013년에 시도된 차별금지법 제정을 한국교회가 앞장서 좌초시킬 때에는 60%였다. 빠르게 자라난 사회적 의식과 견줘보면 지체된 기독교의 의식이 아쉽지만, 그것도 살아야 할 우리 현실일 뿐이다. 다만, 타인의 ‘존재’를 부정할 수 있는 자격이 피조물에게 있지 않다는 겸손만 갖추어도 좋겠다. 그렇다면, 교회는 살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보여주는 시금석이 차별금지법에 대한 교회의 태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