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카메오 - 영화에서 튀어나온 그림 이야기
21. 라스 폰 트리에의 <멜랑콜리아>: 우울과 불안의 변증법
세계 영화계에서 늘 문제작을 들고 나타나는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이다. 1991년 <유로파>로 칸 영화제 심사위원장, 2000년 <어둠 속의 댄서>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비롯해, <킹덤>(1994), <브레이킹 더 웨이브>(1996), <백치들>(1998), <도그빌>(2003) 등 일련의 시끄러운 문제작을 발표하며 세계의 각종 영화제에서 많은 상을 받아왔다. 그러던 그가 <안티크라이스트>(2009), <님포매니악>(2013)을 발표하며 문제작가에서 ‘문제아’로 떠오르더니, 2018년 <살인마 잭의 집>을 통해서는 아예 영화계 최고의 ‘악동’으로 자리매김이 되었다. 그러나 악동의 시대에 반짝 빛나는 영화가 한 편 있는데 그것이 2011년에 발표한 <멜랑콜리아>이다. 이 영화로 그는 다시 전미 비평가 협회상 등을 수상했다.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영화 <대부>(1972)에서 영화 도입 부분의 그 유명한 결혼식 시퀀스는 무려 27분가량 이어진다. <멜랑콜리아>에서는 영화의 처음 1/2 가량(약 1시간 정도)이 주인공 저스틴의 결혼식 시퀀스로 채워져 있다. 폰 트리에 감독이 이 시퀀스를 만들면서 <대부>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대부>의 결혼식 시퀀스는 성대하고 화려한 잔치와 그 이면에서 벌어지는 마피아의 ‘비즈니스’를 교차시키며 긴장과 이완을 반복하면서 영화가 보여주려는 가족과 범죄의 얽힘 서사를 단번에 각인시켜준다. <멜랑콜리아>에서는 반쯤은 체면상 억지로 참석한 듯한 하객들의 다양하게 이어지는 각종 이벤트와 꾹 참고 있지만 어쩔 수 없이 서서히 드러나는 저스틴의 고질적인 우울증이 언제 주저앉을지 모르는 살얼음판처럼 교차된다. <대부>에서 잔치와 범죄가 하나이듯이, <멜랑콜리아>에서도 부르주아의 호화로운 격식과 우울증은 하나이다.
이 영화를 만들기 전 폰 트리에 감독 자신이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자신의 체험을 고스란히 영상으로 옮겨왔기에 관객은 꼼짝 못 하고 짓눌려 있는 상태의 우울증을 영화를 통해 몸으로 실감하게 된다. 영화의 2부로 넘어가면 새로운 장이 펼쳐진다. 2부만을 놓고 본다면 그 어느 재난 영화나 디스토피아 영화도 따라오지 못할 장대하고 환상적이고 격렬한 지구 멸망의 순간을 목격하게 된다. 1부의 키워드가 우울이라면 2부의 키워드는 불안과 두려움이다. 우울은 텅 빈 상태이고, 불안은 가득 찬 상태이다. 아니 그 반대인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인간이 경험하는 가장 불안정한 심리상태인 우울과 불안을 극적으로 그리고 시적으로 대비시켜 놓은 것이 이 영화이다. 영화 전편에 깔린 바그너의 <크리스탄과 이졸데> 서곡은 이 두 가지 심리상태를 전 우주적인 멜랑콜리로 휘감는다. 영화 제목 ‘멜랑콜리아’는 지구와 충돌하는 지구보다 몇 배나 큰 떠돌이 행성의 이름이다.
폰 트리에 감독은 “우울증 환자는 일반적으로 재앙이 닥칠 때 보통 사람들보다 더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다”라고 말하면서 1부에서 우울증에 짓눌려 있던 동생 저스틴이 인류의 멸망이 닥쳐오는 2부에서는 태연하고 담담하며 평온을 유지한다. 반대로 1부에서 이성적이고 사려 깊은 언니 클레어는 2부에서 불안과 두려움으로 어쩔 줄 모르며 당황하고 분열된다. 동생 저스틴은 불안에 휩싸인 언니 클레어에게 “지구는 사악해. 그러니 애석해할 필요 없어. 없어져도 아쉬울 거 없어.”라고 담담하게 말한다. 이러한 극명한 대비를 통해 감독은 인간이 가지는 불안정한 심리상태의 양 극단을 파헤친다. 또한 두 극단을 하나로 묶어버리기도 한다.
이러한 효과를 위해 감독은 미술 작품을 사용한다. 장대하게 펼쳐지는 매우 인상적인 영화의 인트로에서 피테르 브뤼헐의 작품 <눈 속의 사냥꾼>이 서서히 불타는 모습이 나오며, 존 에버렛 밀레이의 작품 <오필리아>의 이미지를 차용한 화면이 등장한다(이 화면은 영화의 포스터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그림이나 이미지로 감독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우울은 자연과 합일된 상태의 증상이고, 불안은 자연과 분리된 상태의 증상이라는 것이다. 영화 전편을 통해 저스틴은 자연과 뒤섞여 있다. 지구를 흡수해버릴 행성 ‘멜랑콜리아’와도 무엇인가 연결되어 있는 듯이 묘사된다.
미술 작품은 1부의 중간쯤에서 다시 한번 노골적으로 등장한다. 18라운드 골프장이 저택을 감싸고 있는 집의 주인인 형부의 서재에 펼쳐진 화보집의 그림들을 보고 저스틴은 기겁을 한다. 형부가 펼쳐 놓은 그림들은 대부분 20세기 초 러시아의 화가 카지미르 말레비치의 작품들이다. 말레비치는 절대주의 운동의 창안자로 추상회화를 가장 극단적인 형태까지 끌고 갔다. 구체적인 현실을 초월하여 보다 궁극적이고 본질적인 시계를 추구한다는 논리로 작품을 제작했다. “예술가는 자기 그림 속의 형태들이 자연과 아무 공통성이 없을 때만 창조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자연으로부터 완전히 단절되어 인간의 이성만을 사용하여 사물을 구축한 것이 말레비치의 작품이다. 형부 존은 철저히 과학을 믿으며 과학자들이 행성이 지구를 비껴갈 것이라고 계산한 결과를 믿는다. 하지만 그 결과가 오류임이 점차 드러나자 아내와 아들을 남겨두고 제일 먼저 약을 먹고 자살해 버린다. 이러한 존의 세계관 또는 심리상태를 폰 트리에 감독은 자연과의 단절을 통해 객관 세계를 구축한 화가 말레비치의 작품으로 비유한 것이다.
우울증이 도진 저스틴은 이 화보집들을 던져버리고 다른 그림들로 대체한다. 영화의 인트로에서 등장했던 브뤼헐의 <눈 속의 사냥꾼>과 밀레이의 <오필리아>를 비롯해, 16~17세기 이탈리아 화가 카라바지오의 <골리앗 머리를 든 다비드> 등이 눈에 뜨인다. 이 작품들에 특별한 공통점을 찾기는 힘들지만 말레비치의 절대주의 추상화에 비교한다면 모두 생명과 자연의 힘이 가득 들어차 있다. 여기서는 우울과 불안이 역으로 교차된다. 우울은 가득참이고 불안은 공허함이다. 이러한 그림의 대비를 어떻게 해석할지는 명료하지 않다. 하지만 감독은 이러한 대비를 통해서 인간이 가진 두 가지 불안정한 심리인 우울과 불안을 극명하게 형상화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저스틴이 선택한 그림들에는 모두 생명과 자연의 힘이 가득 들어차 있다고 했지만 그것은 긍정적인 힘으로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실재 그림들에는 아름다운 자연이나 긍정적인 생명이 살아 숨 쉬는 것이 아니라 실망과 초라함, 죽임과 포효, 난장과 허무함이 짙게 배어 있다. 우울은 생명 한가운데 있지만 그 생명을 부정하는 힘에 밀려 텅 빈 상태라고 하면 적절한 표현일까? 감독은 우울을 긍정하고 불안을 부정한다. 우울은 인간의 원초적인 본질이고 불안은 현대 사회의 왜곡된 상태이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손 치더라도 생명을 우주의 바이러스로 치부하는 것은 어쩌면 말레비치의 절대주의 추상화와 상통하는 해법이 아닐까 생각된다.
스스로 우울증 환자였던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인류와 생명을 압도하는 전 우주적 우울증을 시전하였다. 전 우주의 유일한 생명체(영화에서는 그렇게 확신한다.)가 살고 있는 지구의 멸망을 전혀 애석하게 여길 필요가 없다는 관점은 쉽게 동의할 수도 없고 심한 저항감을 일게 만들지만 이 영화가 보여주는 마지막 장면의 장관(지구의 종말 장면)을 보면서는 일종의 희열을 느끼게 된다는 점에서 감독은 자신의 주장을 영화에 담는 데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르네상스 시대 철학자 피치노는 “우울이 없이는 창조적 상상력도 기대할 수 없으며, 모든 창조는 이것으로부터 연유한다.”라고 말했다. 한 발자국을 걸어가지도 못하고, 음식물 하나를 제대로 넘길 수 없는 극단적인 우울, 무엇인가에 모든 생명의 활력이 짓눌려 꼼짝도 못 하는 그런 우울, 그로 인한 완전한 무(無)의 상태로의 전환. 거기서 우리는 종종 새로운 창조의 기운을 얻게 되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