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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헌의 인문의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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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헌 인문(人紋)의 종교 31 - 나무들이 합창하는 숲

posted Nov 01,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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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무늬인 종교성에 대한 성찰 31 : 나무들이 합창하는 숲

 

 

코로나바이러스의 감염인구가 세계적으로 오천만 명을 향하고 있다. 고통의 충격 못지않게 문명전환의 요청 또한 크다. 하지만, 요청된 변혁이 근본적일수록 그것을 이루기 힘들다는 비관도 커진다. 역설적으로, 비관은 익숙해서 깊다. 인류는 오랫동안 자연을 약탈해온 소비 문명이 언젠가는 삶 자체를 파괴하는 지점에 이를 것이라는 불안을 안고 살아왔다. 지구온난화를 가속해온 산업 문명이 환경의 역습으로 전환될 것이라는 경고, 사회적 갈등의 뿌리에는 양극화된 빈부격차와 새로운 신분제도를 도입한 자본의 악습이 있다는 인식은 낯설지 않다. 다만, 그 파괴적 문명을 어찌할 수 없다는 묵계가 길었고, 그만큼 불안도 깊어졌다. 

철학자 에롤 E. 해리스는 근대문명이 파국으로 귀결된 본질적인 원인을 근대 과학의 사유방식에서 찾고, 인류의 과제를 낡은 정신적 편견을 떨쳐내는 것에서 찾는다. 그가 말한 낡은 편견이란 뉴턴이 완성한 근대적 사유 패러다임에 담긴 다음과 같은 특징을 말한다. 1) 절대 시간과 절대공간 관념, 2) 물질주의와 기계론, 3) 원자론과 개체주의, 4) 환원주의, 5) 모든 관계는 외적으로만(external) 존재한다는 가정, 6) 선입관이 없는 관찰과 주관적 가치가 배제된 과학의 요구, 7) 목적론적 설명의 거부, 8) 물질과 정신의 완전한 분리. (「파멸의 묵시록: 과학적 패러다임과 일상의 사유양식」, 2009) 

해리스는 이러한 사유방식이 과학만이 아니라 정치학과 경제학, 윤리학과 철학과 신학에 만연하여, 문명의 병폐가 깊어 파멸에 이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여전히 회의주의적 태도를 극복하지 못했다고 진단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윤리적 당위성은 심리적 편의성이나 사회적 효용성으로 대체되어왔으며, 철학은 현상학의 겉핥기나 폐쇄회로를 맴도는 분석철학, 또는 상대주의의 바다에서 해체의 몸짓만으로 자족하곤 했다. 아름다움을 갈망하는 예술적 투혼이 자본에 포획되어가는 동안, 영원과 실재의 깊이를 향한 종교적 탐구는 근본주의적 즉자성으로 번역되곤 했다. 그러는 사이에, 진리를 갈망하는 정신에 거는 기대, 역사적 진보에 대한 확신, 우주적 리듬에 대한 경외가 희미해지면서 미래를 맞이하려는 낙관주의 또한 하찮은 것이 되어갔다. 

다행스럽게도 위와 같은 회의적 묘사는 과장에 가깝다. 현실은 항상 그보다는 더 싱싱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리스가 지적한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새로운 문명을 축조하는 기획이 근대적 패러다임에서 풀려나야만 한다. 그동안 근대적 폐해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없지 않았으나, 대부분의 탈근대주의적 사유와 행위들은 파편화되면서 낡은 질서의 거대한 구조 속으로 재편입되었다. 근대의 이기적 주체 못지않게 탈근대의 해체적 주체도 이해관계나 자기 편견 속으로 잘게 부서져 버렸다. 

탈근대적 해체주의가 한 세대 가까이 문화 권력을 누리는 동안, 진리를 향해 육박해가는 거대담론들이 폭력적이라는 혐의를 입고 퇴조해간 것은 뼈아픈 일이다. 급기야 가짜뉴스마저 취향으로 등극하는 탈진리(post-truth) 시대의 역풍을 맞고 있지 않은가? 근본주의적 일체감이 대중을 선동하는 동안, 탈근대적 다양성과 관용의 정신은 도리어 무능의 지표로 추락해버린 듯하다. 윤리학자 에른스트 트뢸치가 종교 상대주의의 정원을 가꿀 때, 옆집에서는 기독교 근본주의가 발현했던 기구한 역사의 운명이 1세기 만에 재현되었다고 할까? 해체되어 개인의 ‘취향’으로 미끄러진 진리는 마치 묵시록적인 미래에 순종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당파성에 입각한 전통적 저항 담론이라고 하여 무사하지는 못할 것 같다. 일찍이 남미의 해방철학자 휴고 아스만이 주장했던 ‘가난한 자들의 인식론적 특권’은 이제 상실감을 경험한 대중들의 ‘공정성’이라는 명분 앞에서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다. 공항노동자들의 정규직화라는 노동의 꿈이 바로 노동자들에 의해 위태로움을 겪었던 것처럼. 그렇다면, 50년이 지난 오늘 전태일을 기억하는 방식은 사뭇 달라졌다고 하겠다. 

근대를 연 개혁가들에게 노동과 직업은 종교적 ‘소명’(vocation)과 멀지 않았다. 그러나 근대는 결국 노동이 자본에 포획된 채로 마무리되었다. 만 가지 지식의 향연을 멈추고, 묻자. 근대적 패러다임을 넘는다는 것은 도대체 뭔가? 그것은 노동이 질식된 생명 현실을 되살릴 길에 관한 모색, 생명의 노동을 펼칠 수 있는 길을 연다는 뜻이 아닐까? 자본의 욕망에 압도된 노동이 아니라 생명의 필요에 충실한 노동 말이다. 소비주의 시대에 지친 영혼은 물을 것이다. 인간이 과연 ‘필요’에 만족할 수 있을까? 아마 거기에서 시와 노래, 예배가 필요할 것이다. 

삶의 피로감은 대체로 대결 정치나 관념 종교의 편협성에서 비롯된다. 정치와 종교 모두 죄와 악에 대한 감각에서 비롯되지만, 반동적인 정치와 종교는 그 감각 자체를 정화할 수 있다는 현혹의 목소리로 다가온다. 그러나 악을 극복한 선의 세계도, 선에서 벗어난 악의 세계도 이 땅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한 사람의 악행에도 사회 전체의 죄악이 결부되어 있다고 한 함석헌의 외침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실재를 응시한 각성의 거처에는 ‘공동의 고통’에 관한 감각이 있으니, 진정한 혁명은 현실의 무게를 지고 갈 때만 가능하다. 니체의 짜라투스트라가 ‘현실의 무게를 일시에 털어버리고 비상하려는 종교’를 가리켜 ‘반동적’이라고 한 것은 돈오(頓悟)의 감각을 갖지 못한 철학의 한계는 아닐 것이다. 

며칠 전 김언호의 「그해 봄날」이 배달되어왔다. 지난 역사현장의 최전선에서 정신적 지주가 되었던 열여섯 명의 생각을 정리한 책이다. 함석헌, 김대중, 송건호, 이영희, 안병무, 그리고 신영복에 이르러 눈길이 멈춘다. 신영복의 목소리는 ‘더불어 숲’의 한 구절로 표현되었다. “나는 나무들이 합창하는 숲에 서고 싶다.” 그의 가르침이 오래도록 메아리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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