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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원의 아트 카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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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카메오 22 - <아무르> : 죽음이 다가오는 속도

posted Dec 02,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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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카메오 - 영화에서 튀어나온 그림 이야기

22. <아무르> : 죽음이 다가오는 속도

 

 

“한 폭의 그림 같다.”라는 말이 종종 사용된다. 이러한 표현이 영어단어에도 있다. ‘픽처레스크(picturesque)’가 그것이다. 미학이나 미술사에서 픽처레스크는 좀 더 깊이 있는 설명을 요구한다. 여기서는 이 말이 현실을 전도시키게 된 이유를 짚어보고자 한다. 우리는 보통 아름다움과 숭고함이 넘치는 자연 풍광을 보고 “한 폭의 그림 같다.”라고 표현한다. 이것은 엉뚱한 뒤집힘이다. 아름다운 자연이 먼저 있고 그것을 묘사한 그림이 나중에 있을 터인데 어떻게 ‘자연’을 보고 ‘그림’ 같다 라고 말하는 것일까?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문제가 있다. 인간이 언제부터 자연을 아름답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을까 라는 문제이다. 산업혁명 이전에 자연을 묘사한 그림은 대부분 인간을 위한 조연일 뿐이다. 좀 더 자연을 주인공으로 묘사했다면 그것은 신의 창조물로서의 자연 즉 신에 대한 예찬으로 그려졌을 뿐이다. 인간이 자연을 본격적으로 지배하기 시작한 것은 산업혁명 이후이다. 그 이전에 자연은 공포의 대상, 인간을 무력하게 만드는 힘, 인간에게 힘든 노동과 비참함을 안겨주는 적대적 대상일 뿐이다. 문학에 대해서는 문외한에 가깝지만 산업혁명 이전에 자연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묘사한 문학작품이 있을까 의문시된다.

도시가 발달하고, 공장이 곳곳에 세워지고, 빈민굴과 매음굴이 도시의 바닥을 채워나가고, 잘 사는 부르주아조차 이런 도시문화에 섞여서 살아나가게 된 시대가 되어서야 예술가의 눈에 자연 풍광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처음에 이런 풍경화는 값싸고 품위가 떨어지는 미술작품으로 치부되곤 했지만 어느새인가 풍경화는 부르주아에게 환영받는 장르가 되었다. 자연이 원래 아름다운 것은 아니었다. 여기에 아름다움을 부여한 것은 화가의 눈이었다. 도시문화에 찌든 사람들은 풍경화를 접하며 비로소 자연을 아름답고, 풍요롭고, 생동감 넘치고, 인간에게 삶의 희열을 안겨주는 존재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러니 이 말은 맞는 것이다. 자연 풍광을 보며 “한 폭의 그림 같다”라고 표현하는 것 말이다.

그러나 풍경화는 여기서 머물지 않았다. 자연은 천의 얼굴을 가지고 있으며 그렇기에 인간이 품은 내면의 모습에 따라서 다양한 형태로 진화하기 시작했다. 영화 <아무르>에서 보이는 풍경화처럼 어느덧 삶의 끝자락에 바싹 다가온 죽음의 그림자와 같은 모습을 띠기도 한다. 2012년 개봉된 이 영화는 오스트리아의 영화 아티스트 미카엘 하네케에게 2009년 <하얀 리본>에 이어 두 번째로 황금종려상을 안겨주었다. 이 영화의 도입 장면 이외에는 단 한 번도 주인공 노부부 조르주(장-루이 트란티냥)와 안느(엠마누엘 리바)의 집을 벗어나지 않는다. 집에는 그랜드 피아노와 많은 음반, 빼곡하게 서고에 꽂힌 책들, 그리고 여기저기 걸려 있거나 대충 놓여 있는 풍경화들이 가득하다. 영화의 카메라는 시종일관 벽에 걸린 그림에 포커스를 맞추지 않는다.

<아무르>의 스토리는 그리 특별할 것도 없고 복잡하지도 않다. 치매로 생각되는 상황에서 병원에서 경동맥이 막혔다고 수술을 하고 그 결과가 나빠서 반신불수가 된 아내와 그녀를 돌보는 늙은 남편의 이야기다. 마지막까지 서로 간에 품위와 따스함을 잃지 않으려 하지만 몸도 마음도 점점 병들어간다. 그녀에게 다가오는 죽음의 속도는 노부부가 적응하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다가온다.

2시간이 넘는 영화의 러닝타임 동안에 감독 미카엘 하네케는 노부부의 심리적인 변화를 치밀하게 파고들며 난생처음 겪는 죽음과의 대면을 때론 담담하게, 때론 격렬하게 들추어낸다. 이것이 지루할 것만 같은 스토리 전개에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도록 만든다.

누군가의 장례식을 다녀온 조르주가 장례식의 모습을 우스꽝스럽고 천박하게 묘사하자 아직 정신이 또렷한 안느는 “계속 살아야 할 이유를 모르겠어. 앞으로 더 힘들어질 게 뻔하잖아. 우리가 왜 같이 힘들어야 해?”라고 말한다. 이것이 이들이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대한 첫 번째 힌트라고 할 것이다.

영화에서는 그리 강렬하지는 않기에 쉽게 기억하기 힘들지만 감독의 의도가 정확히 담긴 두 번의 몽타주가 나온다. 처음으로 안느에게 병의 징후가 나타난 후에 카메라는 당황스러운 듯 집안의 여러 곳을 어두침침하고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로 약 45초 동안 번갈아 보여준다. 두 번째는 보다 노골적이다. 한 번도 카메라의 초점을 받아보지 않았던 집안의 풍경화 6점이 약 1분간 순차적으로 화면을 꽉 메운다. 이 장면은 영화의 ‘작은 충격’(‘큰 충격’은 뒤에 나온다)이 있고 난 뒤에 바로 따라 나오기 때문에 감정적으로 한껏 고조된 분위기인지라 관객들이 그냥 흘려보내는 경우가 많다. 영화의 3/4이 지난 후에 안느는 ‘내 엄마’와 ‘아파’라는 말밖에 하지 못한다. 그런데 남편이 정성 들여 가져다준 음식을 안 먹으려고 하며 물도 제대로 마시지 않는다. 겨우겨우 물을 입안에까지 넘겼지만 안느는 삼키지 않고 뱉어버린다. 그 순간 남편은 아내의 빰을 때린다. 안느가 물을 삼키지 않는 것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의식적인 행동인지 단지 또 다른 고통 때문인지 알 수는 없다. 겨우겨우 안느의 삶을 지탱하려는 남편 조르주는 안느의 행동보다는 본능적으로 튀어나온 자신의 돌발적 행동 때문에 더욱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이 장면 바로 직후에 6점의 풍경화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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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들은 그림을 그린 화가 이름을 알아내기 힘들 만큼 그리 유명한 작가의 작품은 아닌 듯하다. 위 캡처 화면은 영화 속에서는 더 어둡게 나온다. 풍경화를 좀 더 분명히 드러낼 수 있도록 명도를 높인 것이다. 하나같이 ‘한 폭의 그림같이 아름다운’ 풍경과는 거리가 멀다. 보일 듯 말 듯한 인물들은 자연에 파묻혀 있다. 자연은 인간이 걸어가야 할 어쩔 수 없는 길, 운명적인 힘처럼 묘사되었다. 처음 화가가 풍경화를 발명했을 때의 그 아름다운 자연은 뒤로 물러나고 이제 풍경화는 인간의 내면적인 감정이나 심리상태를 빗대는 대상이 되었다. 유별나게 영화 속에 6점의 어두운 그림을 약 10초씩 보여주는 하네케 감독의 의도 또한 주인공 조르주가 죽음이라는 현실을 대면할 수밖에 없도록 하기 위함이리라.

영화 속에 몇 차례 등장하며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던 딸 에바(이자벨 위페르)가 최악의 상태로 접어드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진지하게’ 이야기해야 한다고 아버지에게 강변한다. 그 후 장면이 바뀌어서 그 ‘진지한’ 이야기가 어떤 이야기였는지 알 수는 없다. 그리고 남편 조르주는 어려서 여름 캠프에 갔던 기억을 아내에게 들려준다. 그때 조르주는 엄마와 약속을 했는데 캠프가 마음에 들면 꽃을, 아니면 별을 그린 엽서를 보내기로 했는데 조르주는 엄마에게 별이 가득한 엽서를 보냈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를 하는 동안 안느는 마치 이야기를 다 이해했다는 듯이 조용해지고 이야기가 끝난 후에는 눈을 깜빡거리며 보일 듯 말 듯 고개도 끄덕인다. 그리고 영화의 ‘큰 충격’이 펼쳐진다. 조르주는 아내 안느를 베개로 눌러 질식사시킨다. 이처럼 갑작스럽고 충격적인 장면의 도입이 감독 미카엘 하네케의 전매특허 중 하나이다. 자칫 충동적인 행동처럼 느껴지는 이 살인을 다시 꼼꼼히 되짚어 보면 남편과 딸과 아내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공모’였다고 볼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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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법적으로는 살인이요 도덕적으로도 용인될 수 없는 것이기에 논란이 될 만하다. 게다가 이 영화의 제목을 <아무르> 즉 ‘사랑’이라고 하였으니 말이다. 하네케 감독은 2019년 영화 <해피엔드>를 만드는데 여기서도 장-루이 트란티냥과 이자벨 위페르는 부녀 관계로 나온다. <아무르>에서 지식인이었던 장-루이 트란티냥은 <해피엔드>에서 고약한 부르주아로 나오지만 여러모로 조르주의 분신이다. 그는 손녀에게 자신이 아픈 아내를 간병하다 그녀를 질식시켜 죽였으며 그것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고백한다. 그러면서 하루빨리 죽음이 자신에게 찾아오길 바라며 차를 나무에 들이받거나 미용사에게 총과 총알을 부탁하는 등 몇 번이고 자살을 시도한다. <아무르>에서 죽음은 사랑의 징표일 수 있지만 <해피엔드>에서는 죽음이 그저 본능과 위선으로 뒤섞여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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