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늬들만 치유 받으려 하니?” - 돈의 치유력
자본주의는 인간의 불안을 먹고 산다. 인류가 발명해 낸 것 중 인간의 기본적인 불안감과 가장 강하게 붙어 있는 것이 자본주의가 아닐까 싶다. 돈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해서 항상 마음이 행복해지거나 삶이 느긋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돈만큼 행복과 느긋함의 성공 가능성을 더 높여줄 수 있는 것은 없어 보인다. 돈은 구체적인 실체를 가진 숫자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인간을 불행과 초조함에서 구해낼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은 돈이라고 설득하고, 이 가능성 하나로 모든 사람들의 행동 방식과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하지만 사람은 늘 일상의 불안에 시달리기 때문에 이런 구체적인 현실을 알아차리기가 조금 힘들다. 더구나 우리가 살고 있는 때와 장소가 자본주의의 한복판이기 때문에 더더욱 어렵다. 사람들은 늘 지쳐있어 이런 류의 하나 마나 한 이야기에는 관심을 둘 이유도 없다. 불안과 이를 해소하기 위한 노력의 결과로 다가오는 피곤함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잡는다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이때는 잠시 생각을 멈추고 돈을 쓰면서 쉬어야 한다.
자본주의를 벗어나면 영 딴판인 세상이 펼쳐진다.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지는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겠다. 다만 벗어나 있는 상태가 어떤 것인지는 말할 수 있다. 불안이 내 삶의 근간을 흔들고 있지 않는 상태이다. 사람은 늘 불안하기 때문에 개인마다 차이가 날 것이기에 그게 어떤 것인지는 자신만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아, 조금만 더 여유가 있었으면 할 수 있었을텐데...’라는 최종적인 결론을 내렸다면 자본주의에 조금 깊이 빠져있는 상태이다. 삶에서 ‘조금 더’는 없다. 지금이 바로 그 여유가 시작되는 시점이기에 미루지 않고 새로운 계획을 꿈꾸기 시작할 수 있고 그때가 자본주의를 벗어난 순간이다.
삶은 불안과의 싸움이고, 자본주의라는 늪과의 싸움이다. 싸움터에서는 더 불안하게 느껴지고 잠시도 마음을 놓기가 힘들다. 마음을 놓을 수 있도록 더 많은 돈을 쌓는 것 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는 악순환이 여기서 시작된다. 심지어 이 불문율을 무시하는 사람을 불쌍하게 여기고 따돌리기까지 한다. 그 불안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을 수 없는 사람들의 진심이 그러한 것이다. 그 불안의 끝에서 간혹 하늘을 바라보는 방법을 발견하긴 하지만 그건 일상이 아닌 ‘사이(間)에 있을(或)’뿐이다.
자본주의는 인류에게 축복이기도 하다. 인간의 원초적인 불안을 낮춰줄 수 있기 때문이다. 돈은 그중에서도 가장 믿음직한 처방전이다. 미래에 다가올 불안까지 해결해 줄 수 있으니 더더욱 고마운 존재다. 문제는 그 처방이 세상에 퍼져갈 수 있게 제도를 만드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길이 편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불안한데 제도는 소수의 불안만 구제한다. 그래서 이 편중된 길을 바로잡으려는 모든 문제 제기는 정당하다. 그 정당성이 불안을 해소하려는 인간의 마음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각자에 정당한 것이 모두에게 정당한 제도로 만들어진다는 보장은 없다.
가장 빠른 길은 한땀 한땀 같이 만들어가는 길이다. 만들어가려는 방법이 나와 다르더라도 조급해하지 말고, 엉뚱한 방향으로 가지 않나 불안해하지 말고, 이 길이 나의 불안을 조금이나마 낮추는 길임을 잊어버리지 않고 가는 것이다. 내 불안은 내가 참여한 길에서 내가 치유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