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에서 “셰프의 테이블”을 보다가
요새는 무슨 이야기를 하든지 ‘코로나’를 빼놓고는 할 수가 없게 되었죠. 얼마 전에 넷플릭스에서 ‘셰프의 테이블’이라는 프로를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굳이 말하자면 이것도 코로나 때문입니다. 코로나로 외식도 어렵고, 온통 돌밥과 돌밥인 와중에 (돌밥이란 ‘돌아서면 밥’이라는 전문용어인 거 아시죠?) 화면에서나마 남이 만든 근사한 음식들을 구경하겠다는 심정으로 골랐던 프로였으니까요.
그러나 셰프의 화려한 기술이나 군침 돌게 맛있어 보이는 음식에 관한 다큐멘터리일 거라는 예상은 다소 빗나갔습니다. 물론 근사한 음식이 나오는 화면들도 꽤 있습니다만 요리에 관한 이야기든, 레스토랑 운영에 관한 이야기든, 결국 모든 이야기는 사람으로 귀결되더군요. 그리고 요리를 하고, 레스토랑을 운영한다는 것도 내가 어떠한 사람이고, 어떠한 삶을 지향한다는 것을 드러내고 표현하는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다리오 체키니’라는 이탈리아 정육업자/요리사 편을 인상 깊게 보았습니다.
250년간 도축업을 해온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다리오는 도축업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고 합니다. 소를 무척 사랑했던 그는 소를 돌보는 수의사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갑작스레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가업을 이어받아야 했죠. 소를 살리는 수의사가 되지 못하고, 소를 죽이는 도축업자가 된 것이 다리오에게는 마치 커다란 공허에 빠진 것처럼, 혹은 감옥에 갇힌 것처럼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그때 아버지 생전에 함께 일했었던 오를란도라는 고기 선별사가 해준 말이 다리오의 생각을 바꿉니다. 오를란도가 말하죠, 도축업이란 고기를 써는 것이 다가 아니라고요. 우리에게 주어진 동물들이 사는 동안 최고의 삶을 누리도록 해주고, 우리 손으로 그 삶을 거두고 나면, 그 동물이 우리에게 남긴 선물을 우리는 존중해야 한다고요. 도축업 또한 삶의 일부를 다루는 것이니, 수의사는 동물을 살리고 도축업자는 동물을 죽이는 거라고 말할 필요는 없다고 말입니다.
오를란도의 충고는 다리오를 새로 눈 뜨게 해주었습니다. 이제 다리오는 소가 우리에게 남긴 모든 것을 사용하는 것으로 소에 대한 존중을 표할 수 있다는 생각에 위로를 얻습니다. 그러나 어려움은 아직 남아있었습니다. 정육점에 오는 사람들이 사려 하는 것은 주로 스테이크용 고기뿐이었으니까요. 스테이크만을 위해 소를 도살하는 일은 옳지 않지만,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죠. 그래서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다리오는 직접 식당을 운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식당에서 다리오는 할머니가 요리하던 방식으로 소 전체를 이용한 음식들을 만들기 시작하죠. 이곳에서 사람들은 예전에는 먹을 수 있다고 생각지 못한 부분들로 요리한 음식을 만납니다 (여기서 눈알이 든 소시지나, 골수로 찐 사태, 주둥이와 발굽 살라미 등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 음식들이 보기엔 약간 무시무시하긴 하지만, 엄청난 풍미와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맛을 선사한다는 걸 알게 되지요. 이 식당은 입소문을 타고 많은 사람을 불러모읍니다.
저에게는 ‘소가 남긴 모든 선물을 존중하고, 그러므로 소의 모든 부분-내장이든 근육이든 뼈든-을 다 요리해서 먹는다’는 말이 여러 의미가 있는 말로 들렸습니다. 단순히 ’고기‘에만 그치는 이야기가 아닌 것 같았습니다. 이는 내가 ‘다른 사람’을 대하는 방식, 혹은 내가 ‘나’를 대하는 방식과 관련한 이야기이기도 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다른 사람을 대할 때, 그 사람을 전체로서 받아들이지 못하고, 일부분만을 받아들이곤 합니다. 스스로에 대해서도 그럴 수 있지요. 나의 약한 부분,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은 받아들이지 않고, 내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경우들도 많습니다.
누군가는 모든 자녀를 다 같이 사랑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혹은 자녀의 어떤 면은 좋아하지만, 어떤 면은 받아들이지 못할 수도 있겠죠. 자녀의 명랑하고 고분고분한 행동은 당연하지만, 학교성적은 왜 이런지 납득이 안가는 경우도 많지 않은가요. 군대에서 오랜만에 휴가 나온 아들이 왜 나(엄마)랑 24시간 있지 않고, 친구들을 만나러 나가는지 격분했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들이 나의 아들이기도 하지만,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고 싶어하는 청년이기도 한 사실은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가 봅니다.
누군가를 존중한다는 것에는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태도나 행위가 매우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절대 쉽지 않습니다.
내담자들을 만나는 일도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시간 맞춰 상담실에 나타나고, 무엇이 고민인지 솔직하게 털어놓고, 지난 회기에서 주고받은 이야기들을 잊지 않는 내담자들의 좋은(?) 측면들도 있지만, 어떤 회기에서 어떤 내담자는 장황하고 모호한 이야기로 정신을 빼놓거나, 견딜 수 없이 나를 졸립게 하거나, 혹은 계속 지각하고 회기를 까먹기도 합니다.
나를 힘들게 하고, 지루하게 하고, 혼란스럽게 만드는 내담자의 어떤 측면들을 나는 과연 받아들이고 있는가, 거기에서 고개 돌리고 싫어하면서 모른 척하고 싶어 하지는 않는지... ‘전체’를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생각하다가, 잠시 좀 반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