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합원의 책 소개 : 한 권으로 읽는 쇄미록 | 오희문 저 | 사회평론아카데미
-또 하나의 임진왜란 기록, 오희문의 난중일기
조선 중기에 한 선비가 있었습니다. 자긍심이 대단한 사람이었지만 일찍이 과거를 작파했기에 평범한 유생으로 일생을 마쳐 다만 족보에 이름 석 자나 전했을 법한 그런 사람이었죠. 그런데 이 사람은 임란 전후 9년 3개월을 꼼꼼히 기록한 방대한 분량의 일기를 남겨, 후일 조선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됩니다. 그의 이름은 오희문이고 그가 남긴 일기는 『쇄미록(琐尾錄)』입니다.
총 7책, 1,670쪽, 51만 9,973자의 방대한 기록인 『쇄미록』은 이순신의 『난중일기』, 유성룡의 『징비록』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 기록물로 일컬어집니다. 다만 『난중일기』는 최일선 장수의 진중일기요, 『징비록』은 전쟁이 끝난 후, 후일의 방책으로 기록한 일종의 컨설팅 보고서의 성격을 가진다면, 『쇄미록』은 비록 양반의 신분이나 피란민의 시각으로 전란 중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는 데 의의가 있을 것입니다. 이 책이 주목을 받은 것은 한 개인의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당대의 생활상을 아주 꼼꼼하게 기록하여 생활사, 풍속사, 사회경제사 연구의 귀중한 사료로서의 가치가 높기 때문입니다. 이런 가치를 인정받아 1991년 보물 제1096호로 지정됩니다.
모든 일기가 그렇듯이『쇄미록』은 사적영역의 기록입니다. 그것은 공간(公刊)을 염두에 두고 적어나간 글이 아니라는 얘기죠. 그렇기에 글쓴이의 솔직한 기술이 읽는 이의 감동의 무게를 좌우하게 됩니다. 적어도 그 부분에서 이 책은 어느 정도 성공하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자신의 실수나 미숙함, 양반으로서 가질 수밖에 없는 시각의 한계 그리고 자식들의 영달과 가문의 번성을 위한 기원, 가부장적 면모 등을 여지없이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편애한다는 생각마저 드는 막내딸에 대한 애틋한 사랑과 그 죽음에 대한 애통함은 읽는 이의 가슴을 적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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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의 시작은 오희문이 외거노비들의 신공을 거두기 위한 여행으로 시작됩니다. 그러니까 임란 전의 평화로운 일상에서 시작되는 것이죠. 지방 여러 곳에 사는 노비들에게서 신공을 받아내기 위한 여정은 말 그대로 여행의 성격을 갖는 것이었을 겁니다. 도중에 난리가 일어나 가족과 생이별을 하고 어처구니없는 피란생활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죠.
서두부터 저는 꽤 당혹스러워집니다. 한 평범한 선비가 여행길에서 받은 지방 수령들의 환대가 낯설고 어색할 뿐만 아니라, 요즘의 공직자 윤리와는 사뭇 다르게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양반들의 네트워크가 얼마나 견고하게 작동하는지 보게 됩니다. 대부분의 지방 수령들이나 토호들과 인연이 있거나 혹은 이름을 들어 안다는 것의 힘이 지금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이었다는 것이죠.
- 간신히 관청(목천)에 도착하니, 현감 조영연이 내가 왔다는 말을 듣고 즉시 동헌으로 나와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회포를 풀었다. 영연은 내리 사흘을 머물면서 풍악을 울리며 취하도록 마시고 후하게 대접했다. (임진남행일록)
- 장흥부는 남쪽 지방의 큰 고을이다. 부사와는 본래 한 동네 살면서도 데면데면할 뿐 친한 사이는 아니었는데, 이번에 내가 방문하자 친절하게 대접하고 노자까지 주었다. (임진남행일록)
- 양식을 구하는 일로 함열 현감에게 사내종 막종을 보냈다. 함열 현감은 비록 큰아들 윤겸의 친한 친구라지만, 나에게는 본래 친속도 아니고 일찍이 알던 사이도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 집을 대접함이 남들에게 하는 것보다 지극히 후하여, 한 달에 두세번 사람을 보내어 부탁해도 전혀 난색을 표하지 않았다. (갑오일록 2월 23일)
또한 후일 큰아들 윤겸이 평강현감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 밀려드는 친구들의 도움 요청을 들어주지 못하는 데에 대한 두려움을 토로하기도 합니다. 강고한 양반 네트워크가 마치 유목민들의 손님 환대문화를 보는 듯합니다. 선초의 양반수를 전인구의 3~5%로 어림하고 신분제가 크게 흔들린 시기를 왜란 이후로 본다면 오희문이 살아 낸 당시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고, 양반들은 대개 관리가 아니더라도 한양의 사족들은 여러 이유로 그 이름을 들어 아는 사이였을 것입니다. 그러니 서로 섭섭하게 해서 후환을 남기지 말아야 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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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쇄미록』에는 전쟁의 참상이 아주 사실적으로 묘사됩니다. 그것은 오희문이 전란의 와중에 휩쓸려 피란생활을 하면서 보고 들은 생생한 이야기를 기록했기 때문이죠. 또 혼란 속에서도 관리들에게만 전달되던 조보를 볼수 있었고, 남다른 정보력으로 전황을 비교적 소상히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은 경이롭기까지 합니다.
- 경상좌도 병사(兵使)가 군대의 위엄을 세우기 위해 큰 몽둥이와 끓는 물로 가는 곳마다 엄한 형벌을 가해서 매를 맞아 죽는 자가 무수히 많았다고 한다. 그러니 사람들이 분통을 터뜨리며 너 나 없이 적이 쳐들어오기를 기다리게 되었고, 갑자기 전쟁이 터지자 어느 한 사람 의기를 분발해 적을 토벌하여 성상의 수치를 씻어주기는커녕 숲속으로 도망쳐 목숨을 구걸한다고 한다. (임진남행일록)
- 또 들으니, 성주에서 성을 점령한 적 역시 1백여 명에 불과한데, 자기들이 목사가 되고 우리나라 중으로 판관을 삼고는 관곡을 나누어주며 인심을 수습하자, 백성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서로 받으면서 엎드려 목숨을 구걸했고, 개중에는 “새로운 상전이 나를 살렸다.”라고 했다고 한다. (임진남행일록)
임란 초기의 민심이 이 지경이었으니 당시의 국가경영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어느 사학자는 왜란 당시 왜군의 절반은 조선 백성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밥과 옷을 주니 그저 그를 따른 것이죠. 그 조선의 백성은 대부분 피지배계층이었을 것이고, 국가의 보호시스템에서 벗어나 있었던 존재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에게는 ‘내 나라’가 존재했을 리 없었겠죠. 조선은 철저한 카스트에 의해 움직였던 나라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 지난번 김천 전투에서 어떤 여인이 왜적의 포로가 되어 창고에 갇혀 있다가 전투가 끝난 뒤 밖으로 나와 살려달라고 애걸했다. 그 여인에게 사는 곳을 물었더니, 처음에는 숨기고 말하지 않다가 이실직고했다고 한다. 본래 성주에 사는 선비의 아내로, 흉적이 갑자기 마을로 들이닥쳐서 외숙모와 함께 피하다가 적에게 잡혀 이곳에 왔는데, 적들이 돌아가며 강간을 하자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자결을 하려다가 뜻대로 되지 않았고 외숙모의 생사도 모른다고 했다. 허리에 찢긴 치마만 걸쳐 있을 뿐 속옷도 입지 않았는데, 우리 군사들이 들춰보니 음문이 모두 부어서 잘 걷지도 못했다고 한다. 아주 참혹한 일이다. 고을 사람 중에 군대를 따라갔던 자가 직접 보고 와서 전한 말이다. (임진남행일록)
- 나이가 열두세 살쯤 된 여자아이 하나가 문밖에서 먹을 것을 구걸한다. 사는 곳과 부모를 물었더니, 집은 죽산 땅에 있고 그 부모는 전란 초기에 왜적의 손에 죽었다고 한다. 고모부와 함께 전라도 지방을 떠돌면서 걸식하다가 북쪽으로 돌아가는 중에 이 읍안에 임시로 걸식했는데, 고모부가 이번 달 초에 저를 버리고 자기 처자식만 데리고 도망했다고 한다. (갑오일록 5월 21일)
예나 지금이나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여성과 아이들입니다. 완력을 쓸 수 없는 사람들이죠. 완력은 폭력입니다. 폭력은 평시엔 잠복해 있다가 비정상적 상황이 되면 정의나 생존의 가면을 쓰고 더러운 손을 휘두릅니다.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은 그것의 비열함을 깨닫지 못하고 우월감에 젖어 우쭐거리게 마련이죠. 비정상적인 상황이 오래 가게 되면 일상이 되어버립니다. 그렇게 일상이 되어버린 비정상은 마비되고 변질한 심성에 각인되어 정상적 삶으로의 복귀를 어렵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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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참화 속에서 사람들을 목숨을 위태롭게 한 또 하나의 요인은 질병이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에도 이질과 학질이 대단히 유행하여 많은 이들이 고통받다 죽어갔다고 합니다. 『쇄미록』에는 특히 학질에 의한 고통이 아주 절절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오희문의 가족들과 노비들도 이질과 학질에 걸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을 정도였으며, 심지어 오희문은 가장 사랑하는 막내딸을 잃기도 합니다.
- 올해 1월 10일에 병이 걸려 2월 24일에 조금 나았고, 27일에 비로소 흰죽을 먹었다. 3월 초에 비로소 된밥을 먹었고, 10일 후에는 나날이 점점 차도가 있어 식사량을 날마다 늘렸다. 보름 후에는 지팡이를 짚고 방 안에서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처음 병에 걸리고 나서 열흘 정도까지는 병세가 몹시 심해서 나날이 더 위태롭고 고통스러워 인사불성이었다. 생원(둘째 오윤해)의 양모도 이 병에 전염되어 누운 채 17여 일을 앓았다. 생원도 이 병에 걸려 몹시 아프다가 20여 일 만에 조금 차도가 있었다. (계사일록)
위의 기록은 전염병을 앓아 쓰지 못한 일기를 나은 후에 적은 내용입니다. 무려 석 달을 고생한 것입니다.
- 이리저리 떠돌며 곤궁한 데다 온 집안의 병환이 또 이런 극한 상황에 이르렀으니, 밤중에 가만히 앞으로의 일을 생각해 봐도 대책이 없다. 지난봄에 병에 걸렸을 때 차라리 죽어서 아무것도 모르는 게 차라리 나았겠다. (계사일록 8월 25일)
- 아내와 두 딸, 생원과 계집종 넷이 모두 학질에 걸려 누워 있어서 저녁밥을 지을 사람이 없다. 그들이 조금 낫기를 기다렸다가 밥을 짓는다면 분명 밤이 깊을 것이다. 안타깝다. (계사일록 9월 17일)
- 계집종 서대가 병이 나서 냇가에 움막을 쳐서 내보냈는데 돌봐주는 사람이 없어 목이 말라 물을 마시려고 냇가로 기어가다 그곳까지 가지도 못하고 엎어져 죽었다고 한다. 더욱 슬프다. (계사일록 11월 4일)
흔히 전염병을 일컬을 때 ‘평등한 죽음’ 혹은 ‘위대한 평등자’ 운운합니다. 지위의 귀천 혹은 부의 다소, 배움의 크기를 불문하고 누구나 걸리고 죽는다는 거죠. 그러나 정말 그런가요? 지난 해부터 전세계를 공포 속으로 몰아 넣은 21세기의 흑사병이라 할 ‘코로나19’ 대유행을 계기로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분석과 전망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의사학자 올리바리우스는 ‘역병이 평등자가 아니며 오히려 기존 사회경제적 질서를 공고하게 해주었다’고 힘주어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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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착취경제로 지탱한 사회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착취의 대상은 이른바 ‘노비들’입니다. 노비들은 양반가의 경제를 지탱해주는 노동 주체였을 뿐 아니라, 온갖 잡역에 시달렸습니다. 농사는 물론이고 가사를 오로지 전담하였고 서신을 전달하는 일, 외거노비의 신공을 거두는 일, 부동산의 매매나 노비의 매매를 맡아 하는 등 온각 일상이 그들의 손과 발을 통해 이뤄진 거죠. 심지어는 노비가 없으면 외출도 할 수 없었다니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 내일은 어머니를 찾아뵈려는데, 송노가 지금까지도 오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윤해(둘째 아들)의 사내종 춘이를 빌려서 데리고 가야겠는데, 이곳에 부릴 사내종이 없어 걱정이다. (갑오일록 4월22일)
- 요새 사내종이 없어서 오랫동안 나무를 베어 오지 못해 아침저녁으로 밥을 짓기도 부족한데, 하물며 온돌까지 덥힐 수 있겠는가. (계사일록 11월 12일)
- 노비 넷을 시켜 논을 매게 했는데, 오후에 비가 내려서 그만두고 돌아왔다. (갑오일록 5월 19일)
- 작고한 구례 현감 조사겸의 첩이 계집종 둘을 샀다가 도로 내놓았으므로 내가 무명 13필을 주기로 약속했다. (중략) 이광춘을 불러 권리를 증명하는 문서를 쓰게 하고, 증인은 그 외숙의 노비인 끗산과 소지가 섰다. (갑오일록 10월17일)
조선의 반가에서 사노비는 재산이었습니다. 상속은 물론이고 매매의 대상이기도 했죠. 『쇄미록』에 드러난 오희문의 노비관도 다르지 않습니다. 16세기 말, 17세기 초를 살았던 그에겐 시대가 주는 사유와 제도의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었습니다. 따라서 노비는 다만 부려서 집안을 이롭게 할 존재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죠. 그래서 도망한 노비를 원망하고, 병들어 죽어가는 노비를 보며 곤궁한 피난 생활에 부담이 될까 봐 노심초사하기도 합니다. 그런 모습이 전형적인 당시 양반들의 사유체계를 보여주는 것이라면, 시제를 지내고 남은 제수로 공이 있던 노비의 제사를 지내주었다는 기록은 오희문 개인의 심성이 드러나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 근래 막정이 한 짓을 보면 죽어도 아까울 것이 없지만, 이전에 애쓴 일이 매우 많고 타향에서 객사했으니 애통함을 금치 못하겠다. 관을 준비해서 묻어주고 술과 과일을 차려 제사 지내주었다. (을미일록 12월 18일)
- 한식날이다. 생원 윤해가 광주의 산소에 가서 제사나 지내는지 모르겠다. (중략) 남은 제수로 일찍 죽거나 자식이 없지만 공이 있는 노비들의 제사를 지내주었다. (병신일록 3월 8일)
- 제사를 지낸 뒤 남은 음식으로 살아 있을 때 공이 있었던 노비 중에서 자식이 없어 제사를 받지 못하는 자들의 제사를 지내주었다. (정유일록 8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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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장제를 지탱하는 근간은 개인이 아니라 가족이라는 단위 구성체입니다. 가족이라는 구성체는 단일 형질을 가진 고체와 같습니다. 유교적 가부장제가 조선 사회를 지탱하는 이데올로기로 작동했던 것은, 그것이 가진 맹목성의 견고함이 충효라는 다소 강요된 윤리적 덕목의 왕조 이데올로기와 절묘하게 부합하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가족은 사회의 기본 구성단위를 넘어서는 보편적 시공간을 조직해 냅니다. 더구나 유교적 이데올로기가 뼛속에 각인된 채 살아야 했던 조선의 양반가에서는 그것이 현실이 되는 것이죠. 제사라는 의식을 통해 시간의 연속성을 무력화시키기도 하고, 씨족 공동체에서 양반 공동체로 외연을 넓히면서 공간의 제약을 사정없이 뛰어넘기도 합니다.
『쇄미록』에는 오희문의 어머니, 동생, 자식들의 이야기가 끝도 없이 펼쳐집니다. 개인적 기록이니 당연합니다. 아울러 외가와 처가에 관한 이야기가 오히려 친가의 이야기보다 압도적입니다. 그것은 오희문의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었기 때문일 수 있지만, ‘장가간다.’는 말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처가살이가 당연시되고 외가에서 자라는 등 당대의 사회현실과 개인의 처지가 반영된 결과라 생각됩니다. 일기의 초입에 영동의 외가를 방문한 이야기는 그가 얼마나 외가와 외척들과 친밀한 관계를 이어나갔는지 여실하게 보여줍니다.
- 며칠 머물면서 외할아버지 산소에 제물을 올렸다. 나를 기르느라 애쓰신 은혜를 회상하다가 나도 모르게 그만 눈시울을 적셨다. 내가 이 고을에서 태어나 외할머니 손에 자라서 부모와 같은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다. (임진남행록)
가벼운 여행길이 느닷없는 피란생활로 이어지는 동안 오희문은 어머니와 형제자매 그리고 아들들의 안위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했던 것 같습니다. 전쟁통에 모실 수 없었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죄스러움이 곳곳에 있으며, 누이의 부음을 듣고도 갈 수 없는 처지를 한탄하기도 합니다. 아들들의 과거시험에 대한 소회가 자주 나오는 것을 보면, 그 자신은 비록 과거를 폐했지만 자식들의 출사를 염원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큰아들 윤겸이 음서로 평강현감을 하면서 대과에 급제하자 ‘한 가문의 경사를 말로 어떻게 표현하겠는가?’라며 기쁨을 감추지 않습니다. 떠들썩한 유가행렬까지 장황하게 기록하지만, ‘이제부터는 내 아들이 아니다.’라며 공직자 아들에 대한 비장한 마음을 나타내기까지 하죠. 다만 신축년 둘째 아들 윤해의 급제소식에 대한 기술은 단촐하기 짝이 없어 의아하기도 합니다.
막내딸 단아의 오랜 투병과 죽음은 오희문에게 씻을 수 없는 한을 남긴 듯합니다. 3년 상까지 지내주고 더는 상식하지 못하게 됨을 안타까워합니다. 더구나 자주 꿈에서 보고 그 슬픔을 피를 토하듯 적어나갑니다.
- 간밤 꿈에 죽은 딸을 보았다. 깨고 나니 비통한 심정을 이기지 못하겠다. 즉시 일어나 앉아 집사람과 꿈 이야기를 하며 슬퍼서 계속 울었다. (정유일록 7월 7일)
사실 오희문은 막내딸만이 아니라 딸들에게 아주 자상한 아버지였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폐쇄적인 사회의 엄한 아버지가 아니라, 요즘 만날 수 있는 딸바보의 모습이 생생합니다.
- 세 딸과 함께 뒷산 봉우리에 올랐다. 한껏 멀리 바라보고 산나물을 뜯기도 하면서 거닐다가 돌아왔다. (갑오일록 3월 29일)
『쇄미록』은 책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일상사와 소소한 것들의 소상한 기록입니다. 일기이니까요. 그래서 더 값진 책입니다. 거대담론에 가려진 당대의 생활상이 보이는 것이죠. 이는 후일 새로운 문체를 실험하는 이들의 글쓰기에 닿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들이 이 책을 읽어보았다는 기록은 없지만 기록을 중시하고 소소한 일상을 세밀히 기록해 가는 작법에서 맥락이 이어진다고 할 수 있죠.
이 책은 해주오씨 추탄공파 문중에 전해져 오다가, 그 문중에서 한학자 이민수 선생에게 번역을 의뢰하여 펴내게 됩니다만 절판되어 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사단법인 올재에서 그 판본을 받아 『난중일기』『징비록』과 함께 한 세트로 펴냅니다. 이게 제가 구해 읽었던 책이었죠. 그 후 국립진주박물관의 기획과 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의 새로운 번역으로 원문표점본까지 8권의 방대한 책이 완역 출간되었고 『한 권으로 읽는 쇄미록』은 그걸 간추려 엮은 편집본입니다. 이 책의 미덕은 오희문의 가계도, 그의 여정 등을 도표로 보여주고, 당대의 사회상과 풍습을 사학자 신병주 교수가 주제별로 덧붙이는 등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 몇 가지 장치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처음엔 간략한 책 소개로 그칠 생각이었는데 일기의 본문기사를 인용하다 보니 글이 길어 졌습니다. 장맛을 보려면 손가락으로 찍어 먹어 보듯, 조금이나마 맛을 보게 하고 싶은 욕심이 앞선 결과이니 그 허물은 전적으로 제게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