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무늬인 종교성에 대한 성찰 35 : 마음의 북소리
1년이 넘은 코로나의 시간에 지쳐가는 걸까? 시니컬 해진 건 나만이 아닌 듯하다. K-방역 초기의 사회적 응집력은 부동산 역풍에 날아가고, 보궐선거를 앞둔 정치권의 전세는 엎어졌다. 그리스 신화의 에코처럼 촛불 정신은 몸뚱이를 잃고 메아리로만 남았고, 거리엔 상품화된 스펙터클의 정치가 펼쳐지고 있다. 마치 권력획득의 목표 앞에서는 진실도 필요 없다는 듯이, 진영논리를 따라 움직이는 정치마당에 행위의 소란이 퍼지고 있다. 사회적 격돌은 있으나 역사의 지평은 넓혀지지 않고, 주장은 늘어도 인간이 줄어든 느낌이다.
68혁명 시대를 살았던 기 드보르(Guy L. Debord)는 이미지가 진실을 포획한 곳을 가리켜 ‘스펙터클의 사회’라고 불렀다. 그곳은 진리가 볼거리로 환치된 사회이다. 노동과 삶이 상품성으로 대체된 자본주의의 일반 풍경이기도 하다. 그곳에서는 마음의 진정성이 외양의 그럴듯함에 판정패 당하는 경우가 많다. 신성함마저도 증대된 환상에 기식하기 때문에, 진리는 감소해도 각종 신성함이 부풀어 오를 수 있다. 그렇게 사실보다는 이미지가, 본질보다는 가상(假像)이 힘을 가진 스펙터클의 사회에서는 진보의 이상도 보수의 무늬를 띠어간다. 자족하는 교조주의가 도리어 힘을 쌓고, 좌우를 떠나 확증편향이 마음의 문화가 된다. 진정성의 결핍이라기보다는 파편화된 진정성이 문제라 하겠다.
이 스펙터클의 사회에서도 무언가에 대한 믿음이 가능한가? 믿고 고요할 수 있을까? 다행히 우리 삶에는 생동하는 일상이 있고, 거기에 스펙터클을 걷어내는 힘이 있다. 푸코의 말처럼 지식이 권력의 지배 아래 있는 듯하지만, 인간은 관념의 포로만은 아니다. 때로는 진실의 습격이랄까? 실재의 충격으로 인해 관념이 일거에 무너지기도 한다. 경이로움의 감각을 타고 찾아오는 낯선 선물처럼. 아니, 삶의 맥박이 이데올로기를 걷어내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 옳겠다.
마음에서 치는 북소리, 수줍어 붉어진 얼굴, 무언가를 그리워한다는 것은 불가사의한 일이다. 삶이란 실재하는 것이기에 사유하기 전에 경험되는 것이다. 통찰이란 논리를 구성하는 이성에 의존하기보다는 생(生)의 맥박을 따라 진동하는 직관에 기초한다. 생의 철학자 베르그송은 알쏭달쏭한 말을 남겼다. 본능만이 발견할 수 있으나 본능은 찾으려 하지 않고, 지성만이 찾고자 하나 지성에 의해서는 절대 발견되지 않는 것, 그것이 생명이라고. 그는 생명의 통찰이란 압도하려는 이성의 목적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삶을 이어가는 소박함에서 스며 나오는 것으로 본 것 같다.
사랑과 진실이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출 것이라는 시인의 믿음은 노래로 이어진다. (시편 85:10) 그 보이지 않는 역사의 음률을 따라 진리는 자기 길을 내갈 것이다. 그 길을 담은 사람들의 심장에 북소리가 울린다. 마치 모뉴먼트 밸리를 향해 갈 때 한 번도 듣지 못한 나바호 부족의 북소리가 안에서 울리듯이. 누구나 때가 되면 심장의 북소리를 듣는다. 이 봄에 생명의 틈바구니를 경이롭게 열어가는 그 북소리가 다시 울리기를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