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MZ 평화 올레길 내고 싶다는 김영국 조합원
<길목인>에서 ‘노란조끼’를 연재하고 있는 김영국 조합원을 만났습니다. 요즘 한가한 시간엔 마라톤에 빠져 있지만 트레킹의 경험에서는 ‘DMZ 평화 올레길’을 만드는 꿈을 꾸기도 했습니다. 그가 하는 일인 교통연구의 과제 역시 보행자가 대접받는 명품 길을 만드는 것이라 합니다. 길을 걷다 보면 동료가 생기고 뜻이 모이면 소망하는 일들도 이룰 수 있겠습니다. 장맛비처럼 비가 내리던 명동 향린 창립주일, 예배에 참석한 그와 길에서 체험하고 생각했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십자가를 꼭 부여잡고 사진을 찍었다. 허리가 좋지 않아 복대를 둘렀다. 십자가 뒤에는 이런 글귀가 붙어 있다. “Don’t forget, we are all bare feet in our socks”
Q ᅵ 오늘(5월 16일) 향린 창립주일이면서 ‘굿바이 명동, 헬로우 광화문, 행사에 참석하였습니다. 소회가 어떤지요?
기독교인으로 거듭나게 한 명동 향린
향린교회가 이제 명동에서 물리적으로 시대의 소임을 다하고 광화문으로 옮겨간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가봐야 하는데 어떻게 할까 하고 고민하던 차에 인터뷰 요청을 받았습니다. 마침 잘됐다, 예배도 드리고 인터뷰도 하면 아귀가 잘 맞는 일이겠구나 했지요.
명동 향린은 제게 첫 교회입니다. 이 말은 향린교회에 나오기 전까지는 제가 기독교인이 아니었다는 뜻이지요. 홍근수 목사님이 담임목사 시절, 새교우 교육을 받고 2002년 4월 부활주일 때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로부터 2~3주 후 결혼했어요. 그런 인연으로 이곳 향린은 제게 기독교인으로 거듭나게 한 의미 있는 곳입니다.
Q ᅵ 섬돌 향린교회에 나가고 있습니다. 파리 파견 근무시에도 집에서 가깝다는 이유로 작은 교회를 선택했어요, 작은 신앙공동체에서의 신앙생활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신앙의 깊이와 폭이 더 넓어지게 한 섬돌 향린
기독인으로서의 삶은 명동 향린 교회에서 이미 배웠다고 해야겠습니다. 통일문제라든지, 사회의 불의에 저항하고 정의를 추구한다든지, 작은 교회를 지향하여 분가선교를 한다든지 등이 향린의 지향점이고 이를 이해하고 삶에서 실천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섬돌향린에 와서는 그 폭이 더 넓어졌다고 하겠습니다. 2013년 섬돌향린으로 분가하고 이후 섬돌 교우로서의 삶은 또 한 번 신앙이 더 넓어지고 깊어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기독인의 사랑이 무엇인가?’ ‘그 사랑의 범위를 어디까지 넓혀 가야 하며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가?’ 등의 주제에 깊이 생각하고 갈등하는 시기였는데요, 소수자 문제라든가 이런 문제는 기존의 사고방식과 세상의 통념으로는 풀어내기가 어려운 주제들인 거지요. 아마 이런 이슈들을 명동 향린에서 해결하려고 했다면 어려웠겠다, 이 말은 작은 교회에서 가능하지 않을까? 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슈가 생기면 오랜 시간 동안 긴밀히 깊은 토론하고, 숙고하여 합의를 이뤄내는 것은 작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여겨집니다. 명동 향린에서 분가되어 나올 때는 어디엔가 또 하나의 명동 향린을 만든다고 생각했는데 나와 보니 전혀 다른 겁니다. 이슈마다 치열한 토론하는 가운데 작은 공동체에서의 새로운 영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섬돌에서는 평신도를 중심으로 한 예배형식이 보다 더 심화된 것입니다. 목회자가 중심이 되는 설교에서 벗어나 평신도와 함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지요. 매번 어린이와 함께 예배를 드리면서 어린이를 위한 설교와 어른을 위한 설교, 두 번의 설교가 이루어집니다. 이 두 번의 설교 중 거의 절반 이상을 교우들이 담당하게 됩니다. 이제는 전통이 되어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일 년에 한, 두 번씩 차례가 오는데 부담이 되긴 하지만 평신도들의 메시지는 큰 울림을 줍니다. 오늘 명동 향린 창립주일을 맞아 제작한 다큐 영상에서 조헌정 목사님의 ‘목회는 결국 사람을 키우는 것이다.’라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신앙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성서에 기반해서 사회의 현상을 해석하고 이를 선포하는 능력을 키워나가는 것이 평신도 사역의 핵심이 아닌가 합니다.
천길 낭떠리지 위에 십자가가 세워져 있다
Q ᅵ ‘길목인’에서 <걸으며 생각하며>라는 큰 제목 아래, ‘트레킹’ 연재에 이어 현재 ‘노란조끼’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는 파리 파견근무 시에 접한 일종의 취재기입니다. 취재 동기와 후기가 궁금합니다.
‘노란조끼’시위는 우리의 촛불민중 평화시위와 대비되어 시사하는 바가 커
말하기 전에 우선, 길목 회원들과 독자들께 이 기회에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글은 시의성, 현재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의 연재는 그런 점을 담보하고 있지 못합니다. 저는 파리 파견근무를 마치고 2019년 8월에 귀국했습니다. 지금 연재하는 글은 귀국하기 전에 쓴 글이지요. ’노란조끼’ 연재는 2~3회 정도면 끝이 날 것 같습니다. 한국으로 돌아 올 때의 노란조끼 상황은 시위 숫자나 시위 강도가 많이 낮아져 있었습니다. 제가 ‘노란조끼’에 특별히 관심을 두게 된 이유는 한국에서 일어났던 ‘촛불시위’와 많이 대비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촛불시위는 결국 선거혁명을 통하여 정권교체를 이뤄냈었습니다. 권력의 교체를 시위라는 동력을 통해 폭력 없이, 그것도 밤에 수십 차례 진행되었지만 평화롭게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런데 소위 공화제라는 민주주의를 시작한 프랑스인데, 노란조끼 시위는 폭력성이 부각되면서 한국의 촛불 평화시위와 대비가 강렬했던 것입니다. 시위는 매주 토요일마다 벌어졌는데 이슈는,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결국 저소득 계층의 복지축소입니다. 직접적인 촉발 계기는 마크롱 정부가 경유세를 인상하여 벌어졌습니다. 화석연료 사용을 줄여야만 하는 상황이 정부의 입장이었는데 저항을 불러오게 된 것입니다. 기후변화 협정에 따라 탄소배출을 줄여야 하는데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닙니다. 화석연료소비 감소는 요금을 인상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정책입니다. 프랑스 정부는 경유 소비를 줄이려고 세금을 올렸습니다. 그런데 이는 저소득자, 즉 경유를 사용하는 트럭운전수와 경유를 이용하여 장사하는 서민계층에게 직접적인 타격을 주었습니다. 정부가 정책을 시행할 때 면밀히 검토하고 국민이 수용할 수 있는 정도를 잘 판단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단이 나고 강한 저항을 불러일으킨 것입니다. 더구나 친기업 정책과 부자에 대한 감세와 맞물리면서 노란조끼 시위가 촉발되었습니다. 사실 파리 기후변화 협정에서 각 국가는 언제까지 얼마만큼의 탄소를 줄일 것인지를 논의하고 이를 지켜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프랑스 민중은 마크롱 정부의 방식으로는 안 된다는 경고를 한 셈입니다. 이로 인해 마크롱 정부는 그들만의 옮음을 시행하려다 리더쉽에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 노란조끼의 폭력이 메스컴을 통하여 세계에 알려지면서 여행객이 줄어들고 호텔을 비롯한 관광업계도 타격을 입게 되었습니다. ‘노란조끼’는 정치세력화하여 2019년 5월 실시된 유럽의회 선거에 후보를 냈지만 당선자를 내지 못했을 뿐 만 아니라 득표율도 미미했습니다. 한때는 프랑스 전역에서 매주 토요일 수백만이 참석한 시위였고 여론조사에서 2, 3위까지 올라갔던 지지율이었으나 시위는 동력을 상실하고 단일화하지 못하고 소수로 남아서 흩어지며 결국은 정치적 성과를 내지 못했습니다. 이는 우리나라도 비슷한 상황이 아닌가 합니다. 전국적으로 조직되지 않은 대중의 힘이 정치세력으로 성장하는 것은 굉장히 어렵다는 것입니다. 촛불 민중이 매주 촛불을 들고 지난한 과정을 거쳐 정권교체를 이뤄 냈지만 그 혜택은 기층 민중이 아니라 기존 민주당이라는 정치세력이 받아 갔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시도한 개혁을 보면 민주당은 그들의 정치적 틀에 갇혀 서민과 다수 대중이 원하는 바를 구현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촛불 민중의 힘을 제도화하는 시간적 여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월호 진상규명이 여전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고, 중대재해기업 처벌법은 누더기가 되었으며, 비정규직과 플랫폼 노동자들은 더 높은 노동강도와 낮은 시급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지키기 위한 노력을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한 결과라 생각합니다. 노란조끼 시위를 보며 정부가 면밀한 검토와 국민이 수용할 수 있는 수준을 잘 파악하지 못한 채 정책을 시행할 경우 이런 문제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배우고 반성한 시간이었습니다.
돌로미테에는 전쟁 때 팠던 동굴이 지금은 트레킹 코스가 되었다
Q ᅵ <몽블랑 트레킹> <돌로미테 트레킹>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면서 본인의 소망을 엿보았습니다. 바로 <DMZ 평화올레>를 만들고 싶다는 건데요, 실현을 위한 구상이 있을까요?
남과 북의 이념대립의 상처, 같이 걸으며 치유할 수 있지 않을까
몽블랑과 돌로미테 트레킹을 각각 일주일, 그리고 30일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습니다. 모두 파리에서 파견근무를 할 때 두 번의 여름을 보내면서 휴가 중에 걸었던 길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돌로미테는 이탈리아 북부 산악지대인데요, 세계 1차대전의 흔적들이 여기저기 남아 있었습니다. 100년 전쯤의 전쟁터에 포탄들이나 진지를 구축한 철조망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2,500m나 되는 산 위에 군인들이 굴을 파서 만든 터널들이 지금은 트레킹 루트로 여행객들이 오가고 있었습니다. DMZ 안에도 이런 순례길을 만들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민족의 역사적이며 가장 큰 비극인 전쟁의 상처를 걸으며 풀어야겠구나! 라고 말입니다… 길에서는 같이 걷는 동료도 생기고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또 거듭 생각하다 보면 안 풀리는 문제가 없겠구나! 라고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순례를 하는 동안 하루 30km 정도 거리는 쉽게 걸을 수 있는 거리가 아닙니다. 하지만 누군가와 같이 걸으면 목적지까지 가는데 어려움이 덜합니다. 길을 걸으며 “나는 누구인가?”에서부터 이 길이 어디로 닿게 되는 걸까?” 하는 생각과 “비극이 남아 있는 전쟁터에 많은 사람이 찾아오게 하는 근원은 무엇일까?”, “기독교인이나 비기독교인이나 산티아고 길에서 인생과 종교의 문제를 안고 구도자가 되어 순례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질문들이 끊임없이 이어졌습니다. DMZ 공간 역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고 사람의 손길이 미치지 않아 원시 자연의 상태가 보존되어 영성의 순례길에 부합하는 조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DMZ 공간은 큰 양대 세력인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이 부딪히는 접점으로 우리 민족의 분열된 상처이며 이념대립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아이러니하게 20세기 세력의 대립공간이 되었기에 원시의 자연상태로서의 공간이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이 DMZ에 순례길을 조성하여 남북의 시민들이 같이 걸으며 오해와 불신을 풀어야 합니다. 이를 통해 그동안의 분단으로 인한 간극이 좁혀질 수 있으며 이념대립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남북 정상들이 대화한 그 도보다리에 남북 시민들이 함께 걷고 더 나아가 세계의 시민들과 지도자들을 초청하여 비극의 현장을 평화의 현장으로 변모시켜 나아가는 데 동참하도록 권유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노력은 정치에 기댈 것이 아니라 시민들이 “DMZ공간의 문을 조금만이라도 열어달라.” “도보다리를 열어달라.” “365일 안 된다면 일 년 중 특별한 날에라도 열어서 걷게 해 달라.”고 하는 자발적 움직임이 지속적으로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이를 위해 ‘도보다리 걷기 시민운동’을 하고 싶습니다.
녹슨 탄피 옆에 개양귀비 꽃이 피어나고
Q ᅵ 일하는 곳이 ‘한국교통연구원’이라고 했습니다. 연구 과제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내 주변의 길이 안전하고 편해야 대접 받고 사는 것이다.
네, 교통 관련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넓은 범위에서 ‘보행’은 가장 원초적이며 환경친화적이며 필수적인 교통수단입니다. 저는 자동차 없이 살고 있습니다. ‘좋은 보행로’라는 것은 집에서부터 나와 대중교통에 접근하기까지 모든 사람이 걷기에 좋은 길이어야 합니다. 고령화가 진전될수록 이러한 걷기 좋은 길이 더욱 중요합니다. 내 주변이 안전하고 걷기에 편리한 길이 있어야 대접받고 사는 것입니다. 결국 보행로를 어디에 좋게 만들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길이 좋지 않으면 당연히 사고 나고 다치게 됩니다. 사람이 제대로 대접받는 안전한 길을 만드는 것이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걷기 좋은 많은 길이 우리나라에 조성되었습니다. 산과 하천 주변의 휴식공간에 산책로를 조성하는 것도 중요하고 내가 살고 있는 일상의 환경에서 걷는 보행로도 중요합니다. 일상생활에서 걷기 좋은 명품 길을 만드는 것이 중요한 교통의 과제가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보면 연구라기보다는 인식을 바꾸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유모차나 휠체어가 다니기에 불편함이 없는 길이 되어야 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미래교통 역시 교통약자들이 이용하기에 편리하도록 설계되어야 합니다. 나이 많은 사람들이나 신체 불편한 사람들이 최종 목적지까지 불편하지 않도록 교통망과 교통수단이 발전해야 할 것입니다.
Q ᅵ 미래의 교통 문제는 자연스레 기후위기에 연결 짓게 되는데요.
기후재앙에 대한 인식 절박하다
화석연료를 기반으로 유지되는 문명은 이제 시효가 끝났다고 봅니다. 화석연료에 기대지 않는 문명을 고민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이러한 전환을 통해 변화해야만 인류의 미래가 있습니다. 우리가 몸으로 체험하여 경험해 온 것을 되짚어 보면 분명 10~20년 전과는 다르다고 느낄 정도가 되었습니다. 아마 늦었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늦더라도 노력하여야 합니다. 화석연료 의존을 점차 줄여나가고 전기차, 수소차와 같은 새로운 대안을 도입해야 하고 태양광이나 풍력과 같은 지속 가능한 에너지원으로 전환하는 것만이 인류를 살리는 길이고 기후의 재앙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입니다. 하지만 아직 인식들이 널리 퍼지지도 않았고 절박하거나 심각하게 인지하고 있지도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가 각성된 상태에서 끊임없이 고민하는 자세를 유지해야 합니다.
Q ᅵ ‘노란 조끼’ 연재에 이어서 기고하고자 하는 글이 또 있는지요
걷고 달리면서 생각해온 내용들을 간간히 적어두긴 했습니다. 노란조끼 시위와 같이 연재 형식은 아니고 각기 다른 주제로 기고를 할 생각입니다. 일터 주변에서 산책하다가 만난 두꺼비 이야기, 집 뒷산에 오르며 맡았던 아카시아 꽃향기 이야기, 그리고 어머니와 함께 운문사 갔다가 절집 앞 남새밭이 주차장으로 바뀐 이야기 등이 생각나네요.
Q ᅵ ‘사회적협동조합 길목’ 활동에 제안할 말이 있다면
길목 회원이긴 하지만 그동안 활동을 하지 못한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적절하지는 않지만 몇 마디 보태겠습니다. 길목은 교회가 중심이 되어 조직되었지만 애초 기획하는 바가 교회 밖 사회선교로의 역할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회에서 어려움을 갖고 있는 사람들과 소외된 자들, 상처치유가 필요한 사람들을 위하는 활동에 더 집중하기를 바랍니다. 결국 이웃 사랑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것이 길목의 역할이라고 봅니다. 사회의 약자에 대한 돌봄의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는 생각으로 돌봄에서 벗어난 자들을 찾아서 지원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