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목 제주 청년기행을 다녀와서
저는 2022년 2월 8-10일에 제주로 청년 기행을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기행의 주제는 ‘청년, 어둠의 역사를 넘어 평화와 마주하다’였습니다. 기행의 스케줄은 주로 제주 4·3의 역사를 톺아보는 시간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사실 저는 2018년에 4·3 70주년의 해를 맞아 제주도에 평화 기행을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마음 맞는 친구들과 함께 곳곳을 다니며 여전히 제주 땅에 남아있는 슬픔의 역사를 배웠습니다. 기행 내내 어두운 역사에 대해 배우다 보니, 일정이 끝나갈 때 즈음에는 덩달아 우울해지고 무기력함이 찾아와 인제 그만 봐도 좋으니 얼른 집에 가고 싶어 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납니다. 4년이 지나, 비슷한 주제로 제주를 찾아가며 또 무엇을 느끼고 돌아갈 수 있을지 기대와 두려움이 뒤섞여 있었습니다. 다만 이번에는 함께 기행을 가는 청년들이 평화에 각별히 관심을 두는 청년들이라는 점이 제게 색다른 설렘을 주었습니다.
제주를 돌아보는 동안에는 ‘빌레 하우스’라는 피정의 집을 운영하고 계신 윤태현 목사님께서 가이드를 맡아주셨습니다. 명확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2일 차에 동광 큰넓궤 유적지에서였나요, 목사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흔히 4·3을 생각하면 제주 사람들이 입었던 피해와 슬픔만을 생각하지만, 사실 제주의 역사는 슬픔으로만 설명될 수 없다고요. 4·3은 단순히 일방적인 피해의 역사가 아니라, 아무 이유 없이 생명과 삶의 터전을 빼앗겨야 했던 사람들이 끝까지 살아남아 그에 저항했던 역사라고요. 목사님께서 해주신 이 말씀이 제게 남은 일정을 소화해 내는 데 큰 버팀목이 되어주었습니다. 제게 4·3은 영원히 슬픔에만 잠겨있는 이야기인 줄만 알았는데, 이제 그것은 우리에게 무언가 해야 한다고 말을 거는 것 같았습니다. 폭력과 이념 대립의 희생자인 줄만 알았던 제주가, 평화의 주체로 제게 변화하는 순간이었습니다.
함께 모인 청년들과의 대화도 즐거웠습니다. 우리는 4·3에 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다양한 평화의 주제를 갖고 한참 떠들었습니다. 숙소에 모여 하루를 돌아보며 나누는 다양한 맥락의 대화들이 아직도 잊히질 않습니다. 처음 만난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도 전혀 해롭지 않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가능성의 공간이었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인간관계가 뜸했던 요즘, 새롭게 활력을 찾을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3월 초인 지금은 날마다 들려오는 우크라이나의 침공 소식에 마음이 무겁습니다. 평화가 무엇인지에 대해 계속 생각하게 됩니다.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피신하지 않고 전선에 남아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세계 군사력 2위인 나라의 침공을 빤히 보면서 한 발자국도 도망치지 않는 사람의 마음은 어떤 것인가 속으로 묻게 됩니다. 군인들의 총칼 앞에서도 기죽지 않고 좁은 굴속에서 옷가지를 태우며 연기로 입구를 막아냈던 제주 사람들도 비슷한 마음이었겠죠. 평화를 이룬다는 것은 이다지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행동일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그 행동이 우리를 피해자에서 주체로 만든다는 것, 역사의 관점을 변화시키는 힘이 거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로부터 온 흐름 속에 존재하며
우리의 역할은 그 흐름을 이어가는 것이다
누구는 용기를 가졌고 누구는 그렇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영웅이 될 필요가 없고 될 수도 없다
우리는 모두 하나의 조짐, 희미한 움직임이다
바통을 주고받는 이름 없는 주자들이다
그 바통 위에는 ‘끝나지 않았어’라는 말이 새겨져 있다
- 심보선, 끝나지 않았어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