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사회적경제 발전과정은 유럽 및 북미지역과는 차이가 있다. 우리나라는 민간중심보다는 정부의 정책 중심으로, 제도화의 틀 안에서 사회적경제의 흐름을 만든 경우이다. 사회적 목적을 띤 경제조직의 등장과 발달 과정을 광의의 사회적경제 역사로 본다면, 1920년 최초의 민간 협동조합이 설립된 이후라고 볼 수 있으나 이후 개별법에 근거해 탄생한 협동조합들은 전통적인 사회적경제와는 다른 양상으로 발전해 온 것이 사실이다. 본격적 의미의 사회적 경제는 1990년대 이후 민간의 자생적 활동 경험을 바탕으로 정부의 활성화 정책이 결합되면서 제도화 중심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제도화 과정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은 아래와 같다.
한국 사회적 기업 진흥원(2019)
역사는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사건을 보는 주안점과 기록이 달라질 수 있다. 마찬가지로 현재 우리나라의 사회적경제를 보는 관점도 여럿 존재하는데, 필자는 사회적경제 영역은 당사자들의 필요와 요구에 의한 자발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보고 있기에 제도화과정보다는 민간의 자발적 노력을 중심으로 다시 한번 정리해 보고자 한다.
우리나라의 사회적 경제의 기원은 보통은 계와 두레, 품앗이의 전통에서 찾는다. 그리고 사회적경제의 핵심인 협동조합을 중심으로 역사를 살펴보면 일제강점기의 협동조합을 시작으로 볼 수 있다. 1932년 <동아일보>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당시 ‘경제적 약자가 출자해 물품을 공동구입, 공동구매, 공동판매, 공동 이용하거나 저리로 자금을 조합원에게 융통해줌으로써 조합원의 경제적 이익을 도모하는’ 협동조합이 97개, 조합원 수가 4만여 명에 이르렀는데, 이 중 소비조합이 압도적으로 많고 생산조합, 이용조합, 신용조합은 각각 불과 수삼 개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참고로 기독교 계열의 협동조합 운동이 가장 활발히 전개된 곳은 평북 정주군의 오산지역이었으며 기독교 농촌운동의 사상과 이론에 입각해 농촌지도자의 양성과 협동조합운동을 통해 유토피아적 예수촌을 건설하고자 했다.
해방 후 민간 주도의 협동조합 운동은, 대체로 신용협동조합 운동에서 출발해서 소비조합운동으로 나아갔다(김소남, 2013). 이런 흐름의 발원지 같은 역할을 한 곳이 강원도 원주였다.
원주 지역에서 협동조합운동 발전의 도화선이 된 사건은 1972년 남한강 대홍수와 그에 대응한 대책위원회 활동이었다고 한다. 재해대책위원회는 긴급구호, 수해복구사업뿐 아니라 한우 지원사업 같은 지속적인 소득 창출 사업과 신용협동조합의 보급에 힘을 쏟게 된다. 특히 주목할 점은 재해위의 구호성 자금 지원 사업은 “(당시의 관행처럼) 무상으로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부락 내에서 협동조직을 구성해 그 부락민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구상해 사업을 추진할 때 그 협동 조직체에만 지원하도록 하며, 그 지원 자금은 일정한 거치 기간을 거쳐 무이자 분할 상환토록 하는 당시로서는 획기적 방안”이었다는 사실이다(김소남, 2013). 이렇듯 원주그룹의 협동운동이 박정희 정부가 주도하던 새마을운동사업이나 농협 같은 관제 협동조합과 달랐던 점은, 민중의 생존권을 중심에 놓고 주민의 자발성을 중시하는 상향식 운동을 전개했다는 것이다. 1970년 4월의 “삥땅사건”과 그해 11월의 전태일 분신사건, 그리고 이듬해의 광주대단지 사건 등은 원주그룹이 자유권과 함께 민중들의 생존권이 운동의 중심 가치가 되어야 함을 일깨워 주었고, 따라서 이후 그들의 운동은 지역 대주의 절실한 필요와 욕구를 파악하고 그것을 당사자 대중이 스스로 나서서 해결하도록 돕는다는 원칙을 분명히 하게 된다. 이후 풀뿌리 대중의 생존권을 중시하는 이들의 가치관은 ‘생명운동’ 담론으로 전화∙발전해 친환경 생활협동조합운동의 사상적 토대가 되는 한편, 비폭력운동 노선의 진지를 구축한다.
서민들에게는 의식주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건강이다. 그래서 한국 최초의 의료협동조합에 대해서도 살펴보고자 한다.
의료서비스 공급을 목적으로 협동조합을 독자적으로 결성한 것은, 부산의 장기려 박사 중심으로 형성된 1968년의 청십자의료협동조합으로 이 의료협동조합은 가난한 서민들의 뜨거운 호응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산동네의 가난한 주민들이 이용하던 주말 진료소가 의료협동조합으로 전환한 경우도 있는데, 진료를 받을 때마다 약값으로 100원씩을 내는 “공짜 진료”가 아닌 적은 돈이나마 “내돈 내기”를 원칙으로 한 난곡희망의료협동조합이 바로 그것으로 1976년 결성되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생협의 역사도 살펴보자.
생명의 가치와 윤리적 소비를 강조하는 생활소비자협동조합의 모형이 만들어지는 데는 원주 그룹의 철학과 실천의 역사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80년의 한살림선언은 한국의 소비조합운동이 소비자의 경제적 권익만을 중시하는 운동에서 생명, 자연, 공동체성의 가치를 추구하는 생활문화운동으로 전환되어야 함을 주장하였고, 신뢰의 관계망을 통해 “생산자는 소비자의 생명을 책임지고 소비자는 생산자의 생활을 책임지는” 도농공동체를 지향하게 되었다.
이 외에도 탁아운동에서 협동조합 방식의 공동육아와 대안학교 등의 운동으로의 발전, 주택조합 운동 등이 보여주듯이 협동조합은 자생적 필요와 요구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동안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협동조합의 종류에는 사업자들의 동업조합이 아닌, 일하는 사람들의 협동조합인 노동자협동조합(직원협동조합)도 있다.
한국노동연구원(2020)의 노동자협동조합의 역사에 관한 연구에 의하면,
해방 직후 적산기업에서 일어났던 노동자 자주관리운동이나 1970년대 빈민운동에서 보고되는 소규모 노동자협동조합의 경험을 제외하고, 한국에 현재와 같은 개념의 노동자협동조합이 등장한 것은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의 노동운동과 빈민운동에 뿌리를 둔 실험적 경험을 통해서이다. ‘노동자생산협동조합’, ‘노동자 생산 공동체’ 또는 ‘생산 공동체’라는 명칭으로 불렸던 이들은, 관련 법적 지위가 없는 상황에서 온전한 기업이라기보다는 공동체적 소유와 협동적 노동과 경영이라는 가치를 추구하는 실험적 경제활동의 성격을 가졌다. 주로 노동자들의 기업 인수와 지역 노동운동과 빈민지역운동의 조직화 사업이라는 맥락에서 시작되었던 초기 실험들은 해외 사례를 통해 제도적 도구들(정관, 운영모델 등)을 점점 갖추면서 보다 분명하게 노동자협동조합 모델로 발전하였지만, 여전히 그 중심은 비공식적이면서도 공동체적 성격에 놓여 있었다. 1995년부터 시범사업으로 시작된 자활지원사업에서는 이들 초기 실험을 제도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생산 공동체’의 맥락을 확장한 ‘자활공동체’라는 명칭을 통해 노동자협동조합 모델에 대한 간접적이지만 제도적 인정을 하게 된다. 2000년대 초반 논의에서는 공동체적 문화와 특징을 자활공동체의 고유한 것으로 간주하면서 해외의 이상화된 모델로서 노동자협동조합과 구분하는 경향과, 반대로 자활공동체가 가진 비공식성과 자활지원사업에 종속된 프로그램으로 퇴행하는 경향에 대한 비판으로서 보다 공식적이고 기업적인 성격의 노동자협동조합 모델을 전면적으로 강조하는 경향 사이의 긴장이 존재했다. 후자의 경향은 ‘한국노동자협동조합연합회’라는 조직을 중심으로 ‘노동자협동조합’이라는 명칭을 본격적으로 사용하면서, 기존 초기 실험들과 자활공동체를 노동자협동조합의 한국적 적용으로 해석하였다. 또한 해외 노동자협동조합 운동, 특히 일본 노동자협동조합 운동 및 CICOPA와의 연계를 통해 한국의 현상을 전 세계적인 수준의 보편적 해석과 연결시키고자 하였다.
하지만 생산 공동체라 불렸던 실험 및 초기 자활공동체들의 실패 요인으로 경영의 비전문성이 지목되면서, 점차 공동체적 성격보다는 기업적 전문성 및 기업가 정신을 강조하게 되었고, 이는 2000년대 초반 사회적기업 논의와 맞물리면서 ‘기업’이라는 명칭을 강조하는 경향으로 이어진다. 2006년 사회적기업 육성법에 따른 사회적기업의 등장과 2012년 자활공동체 명칭이 자활기업으로 바뀐 것이 이러한 경향을 단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지금까지 간단하게 우리나라의 협동조합을 중심으로 한 사회적경제의 역사를 살펴보면, 사회적경제는 사람들의 자발적 필요와 요구에 의해 다양한 형태로 결성∙운영되었으며, 성공과 좌절을 경험하면서 끊임없이 시대 속에서 고민하며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시대와 조응하는 고민의 모색과 변화는 지금도 진행 중으로 완성형이 아니라 “과정형”으로 존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