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으로 의존성을 다정하게 안아주는 사회를 꿈꾸며
30년 동안 가족을 돌보신 분의 굽이굽이 인생사를 들으면서 돌봄이 ‘사랑의 노동’으로서 삶을 얼마나 더 가치 있게 만들고 성장시키는지를 배우며 존경의 마음이 절로 일어납니다. 물론 그 오랜 시간이 흐르도록 여전히 가족에게, 여성에게 주로 전가되고 있는 돌봄 불평등이라는 씁쓸한 현실을 마주하면서요.
돌봄노동에 종사하는 분들이 이용자와 정서적 유대를 형성하며 정성껏 돌보면서 삶의 의미와 보람을 느끼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역시 연민은 본능이고 사람이 선하고 아름다운 존재임을
따뜻하게 느낍니다. 그러나 코로나 초기 마스크 대란이 일어났을 때 필수 돌봄 인력인 간병인이나 요양보호사 등에게 마스크 지급조차 되지 않는 사실을 환기하면 우리 사회가 돌봄노동과 종사자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를 뼈저리게 알 수 있습니다.
돌봄노동은 ‘다른 사람에게 의존을 해야 하는 환자나 노인, 어린이와 같은 사람을 돌보는 모든 활동’이라고 합니다(국립국어원 개방형 사전 우리말샘). 즉, 돌봄은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취약한 집단에게만 필요한 보조적 노동으로 중요하지 않은 영역이라는 사회적 인식이 반영된 것이지요. 그런데 정말 그런가요?
우리는 모두 혼자서는 생명을 유지할 수 없는 취약함을 갖고 태어나기에 의존성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켈트너의 ‘선의 탄생’을 보면 인간은 서로의 어려움에 반응하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고 가장 취약한 동물인 아기를 돌보기 위해 연민을 키울 수밖에 없다고 해요. 사람을 뜻하는 한자어인 ‘人’이 서로 기대어 있는 사람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처럼 우리들 삶의 전체 여정에서 돌봄을 주고받는 활동은 보편적이며, 그에 따른 의존이 인간 존재의 자연스럽고 필연적 속성이지요. 물론 독립과 의존의 적절한 변주는 우리 삶이나 관계에서 다양한 심리적 어려움을 일으키지만요.
그런데 근대 이후 취약성과 의존성은 극복해야 할 과제로, 신자유주의의 무한 경쟁, 승자만이 살아남는다는 사회문화에서 연약한 것은 열등한 것으로 간주됩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돌봄은 사적인 영역의 일로 주변화되어, 하기 싫고 어려운 일, 덜 중요하며 때로는 하찮은 일이 되고 취약성은 개인의 책임으로 개별화되어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되어버립니다. 우리는 완전하지 못함과 나약함을 자책하며 우울과 불안의 소용돌이로 빠져들게 되지요. 이렇게 사회 문화 환경은 우리의 마음건강에 영향을 미칩니다.
상담에서도 관계, 돌봄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는데요. 처지나 상황은 다르지만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은 심정은 비슷하고 돌봄에 대한 욕구가 다양하다 보니 이를 조율하는 과정에서 갈등을 빚기도 하지요. 그런데 이야기를 듣다보면 의존하는 것은 나약하고 미성숙한 것이라는 생각을 마주할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면 우리 사회가 과도하게 독립적인 인간을 이상적으로 규정하고 있어 정서적 고통을 더 심화시키고 있음을 함께 알아차립니다.
우리 모두는 연결되어 있고 다양한 층위의 돌봄을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돌보는 행위를 통해 연민과 유대감이 더 깊어지는 경험을 합니다. 공동체에서 돌봄이 정의롭게 분배될 때, 취약함과 의존성을 자연스러운 본성으로 인식하고 드러낼 수 있을 때 우리는 안전하고 다정하게 살아갈 수 있어요. 나이 들어 몸이 아파도 돈이 없고 혼자인 것이 두렵지 않은 서로를 다정하게 돌보는 안전망이 촘촘하게 짜인 사회를 꿈꿔봅니다. 너무 철없는 생각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