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방학 전 4학년 여학생들이 상담실로 쉬는 시간마다 모여들기 시작했다. 한 학급의 여학생들이 모여들어서 10여 명 정도가 되었다. 처음에는 2-3명 정도가 재미 삼아 타로점을 보러 왔다. 학교 상담실에서 갑자기 무슨 타로냐고? 하실 분들도 있겠지만 의외로 아이들이 무척 재미있어한다. 처음 상담실 문턱을 낮추고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해 보았는데 나름 성공적이다. 애정운으로 시작해 우정, 학업, 가족문제 등등 다양하게 고민을 상담하러 온다. 타로점으로 방문하던 4학년 같은 학급의 여학생들이 쉬는 시간 간간이 오다가 나중에는 아이들이 아예 놀러 왔다. 그런데 그 양상이 좀 이상했다. 왜 한 학급의 10명 정도가 되는 여학생들이 무리 지어 상담실에 쉬는 시간마다 오는지 이상했던 것이다. 조짐이 심상치 않다고 느끼던 중 한 여학생인 A가 따로 조용히 상담하고 싶다고 신청이 왔다. 하교 후 만나보니 아이들이 왜 그렇게 무리 지어 다녔는지 이해가 되었다.
아이들은 따돌려지는 것이 무서웠던 것이다. 학급에는 이른바 중심이 되는 여자아이 B가 있었고, 그 아이를 중심으로 또 몇 그룹으로 나뉘어 있었다. B는 담임교사에게도 칭찬받고 인정받는 아이였다. 교우관계도 좋고 리더십도 있으며 매사 적극적이고 성격도 좋다고 한다. B가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아이들은 같이 움직였던 것이다. A는 약간은 내성적이고 천천히 움직이는 아이였고, 같은 반인 C가 저학년 때부터 단짝이었다. B를 중심으로 같이 다니기도 했지만 A와 C는 절친이었다. 아이들도 이미 그렇게 알고 있었다. 학기 중반쯤이 되자 어느 날부터인가 A는 C가 달라졌다는 것을 느꼈다. 쉬는 시간에 같이 가던 화장실도 자신과 함께 가지 않았고, 점심시간에 자신과 같이 이동하지 않았으며 점심 식사 후 밥을 좀 느리게 먹는 자신을 기다리지 않고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 놀았다. C는 B와 유난히 더 친한 아이들과 다니기 시작했던 것이다. A는 헷갈렸다. 왜냐하면 다른 아이들이 없는 방과 후 교실과 학원에서는 C가 예전과 똑같았기 친하게 대했기 때문이다. A는 C에게 왜 예전과 다르게 차갑게 말하는지, 쉬는 시간에 왜 이제 같이 화장실에 가지 않는지, 점심시간에 왜 자신을 기다려 주지 않는지 물어봤고 섭섭하다고도 했다. 그런데 C는 그냥 다른 아이가 같이 가자고 해서 그랬을 뿐이라며, 오히려 A에게 오히려 자신에게 너무 집착해서 피곤하다고 했다.
이런 비슷한 경험이 나에게도 있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 친구에게 버려지는 기분을 느꼈었고, 나는 이런 감정이 너무 힘들어 꽤 우울하게 학창시절을 보냈었다. 무어라고 표현할 수는 없지만 나를 함부로 대하는 느낌을 나는 알고 있었다. 중학교 담임선생님은 내가 깔끔하지 않고 적극적이지 않아서 그렇다고 하시면서 내 잘못이라고 했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C가 원하는 것을 무엇일까? 절친이고 꽤 오랫동안 우정을 다져온 A를 그렇게 대하는 C의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B와 더 친해지는 것이 그 학급에서 자신의 위치에 더 도움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B가 A보다 더 좋았을까? 여자 아이들의 이러한 은밀한 따돌림은 꽤 많은 아이들이 경험하고, 여자로 살아온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자신의 힘보다는 누군가의 권력에 기대어 위대해(?)지고 싶은 마음이지 않을까?
아무튼 나는 A에게 너의 잘못이 아니며 무척 상심이 크겠다고 공감했다. 그리고 C 말고 다른 친구들과 더 절친이 되어 보는 것을 권했다. A는 성격이 온순하고 따뜻해서 아이들이 다가오는 것을 거부하지 않았다. 다른 그룹으로 A가 편입이 되자 C의 태도가 다시 달라졌다. 예전처럼 화장실도 가려고 했고, 점심시간에도 기다려 주었다. 둘의 관계는 겉으로는 예전과 같아졌다. 하지만 A는 진실한 우정에 대한 혼란은 여전하다.
나의 우정의 문제를 내 탓으로 돌렸던 나의 중학교 담임선생님은 틀렸다. 아직도 나는 그날의 담임선생님의 표정과 비난하는 말, 그날 창에서 비췄던 햇빛, 눈에서 흐르는 눈물의 느낌이 생생하다. 나는 상처받았다. 최소한 나에게 상담을 왔던 A에게 그런 상처를 주지 않은 것에 감사하다. 좀 더 좋은 세상이 되어 여성들에게 은밀하게 위대해지는 가르침이 더 이상 없기를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