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이 난다.
언젠가부터 습관처럼 핸드폰을 시도 때도 없이 만지작거린다. ‘습관처럼’이 아니라 습관이 되어 내 몸에 손가락에 달라붙었다. 지하철을 탈 때도, 사무실에서 잠시 틈만 나면, 피곤해서 잠자리 들면서도 그새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라며 살핀다.
사실 별로 궁금하지도 않다. 그저 관성처럼 내가 움직이고 있다. SNS가 어느새 나를 지배하고 있다. 하루에 내 소식을 하나라도 올리지 않으면 불안하다. 내 글에 ‘좋아요, 힘내요’가 많이 눌러지지 않으면 ‘문제가 있나’라며 탓하기도 한다.
나도 모르게 나만의 SNS 성곽에 둘러쳐졌다. IT 세상의 알고리즘에 나 역시 포로가 된 것이다. 그 조건에서 세상을 보는데 익숙해지니 내 성곽 밖은 잘 보이지도 않는다. 관심 밖일 때도 많다. 어느새 SNS는 나에게 관심을 보인 사람과 내가 누군가에게 보인 관심의 범주에서만 작동하고 있다.
그래서 더럭 겁이 난다.
사람 살맛 나는 세상으로 바꾸겠다며 무지기로 고생만 했던 후배가 지난여름 끝자락 세상을 떠났다. 내 일이 바쁘니까 다음에 한번 보지, 언젠가는 같이 밥 한번 먹게 되겠지 하는 맘으로 늘 여유를 부렸다. 가끔 페이스북에 올라오는 글에 ‘좋아요’나 누르며.
후배는 마지막에 스스로 약을 놓았다고 한다. 몸속으로 파고든 암세포와의 전쟁 같은 괴로움이 오죽했을지 내 상상으론 알지 못한다.
장례식장에 가서 영정 사진을 들여다보며 그 존재가 이미 이 세상에 없음을 알아챘다. 누구도 내일의 실존을 장담할 수 없다. 그런데도 오늘이 아니라 내일로 밀어내고 온 자신이 밉기도 했다.
활동의 공간이나 삶터가 아닌 주로 조문의 자리에서 씁쓸한 표정으로 서로의 안부를 묻는 사람을 여럿 만났다. 더러는 이름조차 가물거리기도 한다. 언제 만날지 모르지만, 다음에 만날 때까지 건강해야 한다며 서로를 챙기기도 한다.
돌아오는 전철 안, 머릿속은 장례식장에서 살아 만난 사람들의 얼굴과 나눈 얘기들이 지나간다.
동시에 내 손가락은 어느새 페이스북을 훑고 있다.
후배의 페이스북에 흔적을 남긴 최근의 감정 반응은 하나, 아니면 둘, 많아도 열몇이다. 글을 다시 찬찬히 읽으니 존재 자체에 몸부림친 흔적들이 느껴져 목울대를 조여 온다. 눈도 코도 동시에 반응한다. 서둘러 티슈를 꺼내고 주위의 눈치를 살피며 꾹꾹 눌러댄다.
코로나로 누군가를 직접 만나 얼굴 맞대기도 쉽지 않았겠다. 면역이 무너진 상태의 몸으로 집을 나서는 것조차 두려웠겠지. ‘좋아요’를 눌러준 그 한둘 중 하나인 나조차도 그의 SNS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든다. 손가락이 관성으로만 움직였다는 그 무엇이 나를 찌른다.
말을 건네고 마음을 나누지 못했다는 미안함, 아쉬움, 슬픔이.
“사랑은 종종 뒤에서 걷는다. 그래 어떤 사랑은 한 발짝 뒤에서 상대를 염려한다.” 후배가 남겨놓은 페이스북 대문 글이다.
한 발짝 뒤에서 걸으며 누구를 염려했을까?
염려를 뒤로하고 세상을 떠나기 얼마나 어려웠을까?
바라만 봐주어도 되는데 말이다.
SNS를 따라 움직이는 내 손가락에 붙은 습관에 마음도 포개 볼까 한다.
손가락만이 아니라 마음으로 바라보고 염려하고 표현해야겠다.
세상을 바꾸겠다고 날고뛰다 지치고 다친 마음 둘 곳조차 없는 오랜 활동가들을 만나야겠다. 얼굴 맞대고 손잡고 가까운 공원에서 낙엽도 같이 밟으며 귀 기울여 줘야겠다.
외로움과 단절의 성에서 같이 탈출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