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기후위기의 시대
구글코리아는 2022년 한국인이 구글에서 가장 많이 검색한 단어가 '기후변화'라고 발표했다. 그만큼 기후위기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날씨가 좀 추워지던가, 시원하던가 하면 '지구온난화 맞아?'라는 의문을 던진다. 이와 관련해서 미국 소설가 마크 트웨인이 했던 말을 인용하는 것이 좋겠다.
"If you don't like the weather in New England, just wait a few minutes."
("뉴잉글랜드―미국 북동부―의 날씨가 마음에 안 들면, 그냥 몇 분만 있어 봐.")
날씨((weather)는 특정 장소에 단기적으로(분, 시간, 날) 일어나는 대기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날씨는 수시로 바뀐다. 하지만 기후(climate)는 특정 지역 혹은 전 지구 차원의 장기적인(최소 30년) 날씨의 평균 상태(경향성)를 말한다. 날씨는 하루는 춥고 하루는 더울 수 있다. 따라서 날씨가 바뀌었다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지만, '기후가 바뀌었다'(climate change, 기후변화)는 것은 장기적인 경향이 바뀌었다는 것이므로 큰 문제가 된다.
도날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2013년 트위터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로스앤젤레스에 있는데 정말 춥다. 따라서 '지구온난화'라는 것은 완전한 거짓말이다." 미국 대통령도 날씨와 기후를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1975년부터 '지구온난화'란 말이 쓰이다 21세기부터는 '기후변화'라는 말이 더 많이 쓰이게 되었다. 단지 지구의 평균 온도가 높아진다는 것만이 아니라, 탄소 배출 증가의 결과로 발생하는 복합적인 상황을 모두 표현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20년도 안 되는 시점에 기후변화가 너무 심각해졌다. 그래서 최근에는 '기후위기'라는 표현으로 바뀌었다. 그에 따라 지구'온난화'라는 말이 지구'가열'로 바뀌었다. 이 '위기'가 '파국'으로 가지 않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지구의 평균표면온도는 산업화 이전 대비 (기관마다 측정치의 차이가 있는데) 최대 1.28℃ 상승했다. 특히 지난 50년간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다. 그 원인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 활동'에 있다는 것에 대부분의 과학자가 합의했다.
이에 따라 전 세계 해수면은 매년 3.7mm씩 상승하고 있다. 상승의 원인은 물 분자의 팽창으로 인한 것(붉은색)과 빙하가 녹은 결과(파란색)로 대별되는데, 두 개가 합쳐진 결과가 보라색 그래프다.
해수면이 높아지면 태평양의 섬나라부터 물에 잠기게 된다. 작년에 '26차 기후협약 당사자회의'(COP26) 때 태평양 폴리네시아에 있는 섬나라 '투발루'의 장관은 바다에 기자회견 장소를 만들어 전 세계에 위기를 알렸다. "현재 만조 시에 투발루 수도의 40% 지역이 이미 해수면 아래에 있습니다." "투발루는 가라앉고 있습니다."
기후위기의 결과는 여러 측면에서 관측된다. 일단 환경적 변화를 말할 수 있다. 가뭄, 폭염, 폭우, 폭풍, 산불, 해수면 상승, CO2 용해로 인한 해수 산성화, 해수 용존산소 감소, 영구동토층 파괴로 인한 메탄 방출, 해류 중단 등이다. 이런 환경의 변화는 비인간 생명체에게 직접 작용한다. 서식지가 파괴되어 종이 멸종되며 먹이사슬이 붕괴되어 해충이 발호하게 된다. 인간에게는 흉작, 기근, 영양실조, 혹서, 감염병, 홍수 등이 닥치고, 그 결과로 빈곤, 무정부상태, 내전이 발생한다. 기후위기로 인한 농업의 위기는 이미 현실로 닥쳤다.
유엔난민고등판무관(UNHCR)의 보고에 따르면 2008년 이후 기후난민은 연간 평균 2,150만 명에 달한다. 호주의 '경제평화연구소'(IEP)의 추정에 따르면 2050년이 되면 지구에 기후난민이 12억 명에 달할 것이라 한다. 각 나라들이 이제 기후위기를 '안보'의 차원에서 접근하기 시작했다.
시리아 내전은 여러 가지 원인이 있지만 기후위기가 그 배후에 도사리고 있다. 2010년 러시아에서 대 가뭄이 있었다. 밀 생산이 격감하자 러시아는 곡물 수출을 제한했다. 그러자 러시아에서 주로 밀을 수입하고 있던 시리아의 밀가루 가격이 폭등했고, 그것은 폭동으로 이어졌다. 국민의 생활고가 심각해지게 되자, IS 혹은 친서방 반군들이 발호하기에 매우 좋은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시리아 내전은 엄청난 난민을 낳았고, 그 난민들은 독일 등 유럽 나라로 밀려들어갔다. 그러자 대중들의 경제적, 사회적 불안정이 외국 이주자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 선동하는 극우 정치가 유럽에서 점점 힘을 얻게 되었다. 영국은 유럽연합을 탈퇴했고(Blexit), 최근 이탈리아에서는 극우 정치 세력이 집권을 하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기후위기는 단지 환경적 현상에 그치지 않는다. 인간의 사회적, 경제적 삶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고 기존의 정치까지 전복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기후위기 문제를 현재의 정치가 해결하지 못한다면, 기후위기 해결을 약속하면서 민주주의를 빼앗고 국민에 대해 전면적 통제를 실시하는 '기후 파시즘'이 출현할 가능성조차 예견되고 있다. 기후위기는 인간 사회에 대한 전방위적인 위협이 되었다.
2. 기후위기와 불평등, 그리고 기본소득
기후위기의 직접적 원인은 화석연료 연소 등 다양한 배출원에서 기인한 이산화탄소, 메탄 등 '온실가스'의 과다 배출이다. 그럼 그 많은 온실가스는 누가 배출했을까? 다음은 2020년 국가별 CO2 (다른 모든 온실가스를 CO2로 환산) 배출량이다.
역시 중국!.....이라고 말하면 안 된다. 지구 온도가 높아진 것은 지난 몇 년간의 온실가스 배출 때문이 아니다. 산업화 이후의 온실가스 배출 누적 총량을 비교해야 한다. 산업화 이전(1850년)부터 최근까지의 국가별 누적 CO2 배출량을 살펴보자.
역시 미국이 배출량 1위이다. 그럼 '미국'이 가장 큰 책임이 있겠군..... 이렇게 말하고 넘어가면 안 된다. 일본 사람이 모두 '전범'이 아니듯이, 미국 사람이 모두 기후위기 '주범'이 아니다. 미국인 중에도 기후악당이 있고, 오히려 기후위기 피해자도 있다. 다음은 소득 분위별 탄소배출의 양을 표시한 그래프이다.
녹색이 소득 상위 10%의 1인당 탄소배출, 주황색이 소득 하위 50%의 1인당 탄소배출이다. 전자가 후자의 5배를 넘는다. 미국만 그런 것이 아니다. 모든 나라가 다 그렇다. 한 나라 안에서도 기후위기의 주범과 기후위기의 피해자가 공존한다.
또한 한 나라에서 발생한 탄소 배출도 오롯이 그 나라 탓으로 돌리면 안 된다. 하나 앞에서 본 국가별 누적 CO2 배출 그래프를 다시 보자. 회색 그래프는 화석연료와 시멘트에 의한 탄소 배출이다. 그런데 녹색 그래프는 삼림을 베어내고 농작물을 경작한 것에 따른 탄소 배출이다. 삼림을 베어내면 그 순간 나무가 머금고 있던 탄소가 배출되며 또한 탄소를 흡수하는 나무가 사라진다. 나무를 베어낸 후 초국적 농업 기업 등에 의해 '단작'으로 재배되는 환금 작물들(예컨대 아보카도, 팜유) 등은 토양을 고갈시키고 기후위기를 심화시킨다.
그래프를 보면 브라질과 인도네시아가 삼림 남벌로 인한 탄소배출이 상대적으로 매우 크다. 그런데 생각해 보자. 브라질의 나무를 베어 아보카도를 심었는데, 과연 그 아보카도를 브라질 사람들이 다 먹었을까? 미국과 유럽, 그리고 아시아의 중산층 이상들이 주로 다 먹었을 것이다. '그 나라의' 탄소배출로 잡혀 있지만, 그 탄소배출의 원인은 다른 나라의 부유층에 있다.
따라서 나라별로 탄소배출량을 표시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 오히려 전 세계 시민을 상대로 소득분위별 탄소배출을 파악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다. 비영리단체 Oxfam은 '소비 기반'으로 탄소 배출을 측정한 자료를 발표했다. 다시 말해서 누가 생산했는지, 어느 지역에서 탄소가 배출되었는지가 아니라, 이 생산물을 누가 소비하는지, 이 비행기에 누가 타고 있는지 등의 관점으로 탄소 배출을 측정하여 소득 분위와 탄소배출의 관계를 표시하는 그래프를 발표한 것이다.
1990년부터 2015년까지 25년간, 전 세계 상위 1%가 15%의 탄소 배출을, 전 세계 상위 10%가 무려 52%의 탄소 배출을 했다. 그에 반해 세계 하위 50%는 고작해야 7%의 탄소 배출을 했을 뿐이다. 물에 잠기는 '투발로'의 주민들 대부분은 하위 50%에 해당할 것이다. 탄소 배출은 부자들이 해 놓고, 그 피해는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이 입고 있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세계 상위 10%가 세계 소득의 절반 이상을 가져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세계 상위 10%가 세계 탄소 배출의 절반 이상을 하고 있다. 결국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소득불평등은 곧 탄소불평등이다." 탄소를 많이 배출할 수 있다는 것이 어떻게 보면 부유의 징표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기후위기를 사회적 불평등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태도를 '기후정의'(climate justice)의 관점이라 부른다.
이렇게 기후정의의 관점에 서면, 거꾸로 이런 결론이 가능하다. "소득불평등을 완화하는 것이 탄소배출을 억제하는 길이다." 따라서 기본소득과 같이 적극적인 소득재분배 정책은 기후위기 대응에 큰 도움이 된다. 일단 기본소득은 소득/자산 불평등을 감소시켜 과시적 소비 및 지위재에 대한 수요를 줄인다. 또한 기본소득은 의료, 교육, 주거 등의 영역에서 특정 필요의 발생 자체를 줄이므로 (아픈 것의 주요 원인은 빈곤이다) 물질적 소비/낭비를 줄인다. 더 나아가 기본소득은 '먹고사니즘'을 넘어선 "자율적 영역"(앙드레 고르츠)에서 다양한 생태적 활동으로의 이행을 유도할 것이다.
지구는 더 이상의 성장을 감당할 수 없다. 기후위기는 그것의 징후이다. 따라서 성장 중심의 체제를 '탈성장'의 체제로 바꾸지 않으면 기후위기는 극복될 수 없다. 탈성장은 GDP를 줄이는 것이 아니다. 경제의 물질과 에너지 처리량을 줄여 생명세계와 균형을 이루도록 되돌리는 것, 그러면서 소득과 자원을 더 공정하게 배분하고, 사람들을 불필요한 노동에서 해방시키며, 사람들이 번영하는 데 필요한 공공재에 투자하는 것에 관한 이야기다. 탈성장 경제는 성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때 기본소득은 소득과 자원의 공정한 배분, 불필요한 노동의 해방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기본소득은 소비를 조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덜 생산하고 덜 소비하기 위한 체제 전환에 있어서 사람의 생존을 도모하는 기본 수단인 것이다.
3. 소농 중심 농촌의 재건
탄소 배출을 줄이는 것이 목전의 과업이 되자, 정부는 국가별 온실가스 감축 목표(NDC)를 설정하고 각 부문의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제시했다. 다음은 문재인 정부가 제시했던 부문별 감축 목표이다.
전환(발전) 부문과 산업 부문의 탄소 배출량이 압도적이기 때문에 그 부문의 탄소 배출을 줄여야 한다. 그런데 전환 부문은 2018년 대비 44.4% 감축안을 제시했지만, 산업 부문은 고작 14.5% 감축을 제시했을 뿐이다. 그에 반해 농축수산은 27.1%를 줄이라고 제시하고 있다. 물론 농축산업에서 탄소 배출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다 더해봤자 전체의 2.9%에 불과한 이 부문에서 탄소 배출을 줄이라고, 정부는 다음과 같은 농축산 부문 탄소배출 억제 정책을 내려 보냈다.
그중에서 '벼 재배'로 인한 탄소 배출량이 농업 전체 중 29.7%에 달한다고 보고, 정부는 벼 재배로 인한 메탄 발생을 억제하기 위해 '중간물떼기' 혹은 '중간물떼기+걸러대기'의 방식을 하달했다.
대기업들은 대한민국 전체 온실가스의 35.8%를 내뿜고 있는데도(포스코는 제철소 두 곳에서 대한민국 탄소 배출의 11%를 담당하고 있다) 이들에게는 별 말을 하지 않고 감축 목표도 얕게 설정한 정부가, 사람이 먹고사는 필수품을 생산하는 벼 생산은 메탄 발생이 많다고 시비를 걸고 있는 것이다. 필수 식량공급과 공산품 생산은 1:1로 비교가 불가능한 영역이다. 오직 탄소 배출이라는 수치적 인식만을 가지고 (그것도 2.9%의 1/3도 안 되는 벼 재배를 가지고) 이 문제에 접근하는 것은 '기후정의'의 관점이 아니다.
UN은 '밀레니엄 생태계 평가' 종합보고서에서 "농업은 생물학적 다양성에 큰 위협"이 된다고 말했다. 독일 비영리단체 World Future Council도 "지구 전체 온실가스의 14%는 농업에서 발생"한다고 하면서, 농업을 기후위기의 주범으로 몰아세웠다. 하지만 이것은 농업 '일반'의 문제가 아니다. 농업에서 배출되는 온실가스의 대부분은 초국적 농업 기업, 기업농, 약탈농, 상업적 대농, 기업적 목축업에서 발생하고 있다.
그뿐이 아니다. 이와 같은 기업농과 상업적 대농은 화학비료와 농약, 단작(monoculture), 공장식 축산을 통해서 토양과 지하수, 해양을 파괴하고, 이로운 미생물과 익충을 죽이고 병충해를 유발하고 있다. 소농, 가족농 중심의 농촌 전환이 있지 않고서는, 농업에서의 기후위기 대응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소농은 지속가능성의 위기에 처해 있다. 왜냐하면 (농산물 가격이 오른다 하더라도) 소농의 생산량으로는 최소한의 영농 지속성을 보장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떻게 소농을 안정적으로 지킬 수 있을까 하는 것은, 단지 농민의 생존권 문제가 아니라 기후위기 대응과 연결된 중대한 문제가 된다.
이때 농민기본소득은 소농∙가족농을 지속가능하게 하여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생명농업 재건에 기여한다. 친환경 순환농법. 지역순환 농업을 가능케 하고, 생물다양성과 종자다양성을 보장하며, 땅과 물을 살리는 농업을 만들고, 기업적 농경의 산림 파괴를 막을 수 있다. 소농의 유지가 곧 탄소 배출을 줄이고 탄소 흡수를 높이는 길이기도 한 것이다. 물론 농민기본소득을 지급했다고 이것이 자동적으로 일어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를 위한 주요한 기반을 조성하게 된다.
앞에서 전 지구적인 소득불평등의 완화가 전 세계적인 탄소 배출을 줄이기 위한 주요한 수단이라고 말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농촌 내의 소득불평등의 완화는 농촌 내의 탄소 배출을 위한 주요한 수단이 된다. 하지만 지금의 '농업직불금' 제도는 농촌 내의 소득 격차를 오히려 확산시키고 있다. 현재의 공익직불금 제도는 3단계로 단가를 조금씩 줄여 설계하기는 했지만, 결국 기본적 설계는 경지 규모가 클수록 많은 직불금을 받게 되어 있다. 이론적으로 최대 직불금은 연간 5,734만 원에 달한다. 겨우 120만 원 받는 농업인과 5,734만 원 받는 농업인이 함께 사는 곳에, 단일한 '농민'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 지불되는 직불금도 대부분이 '면적' 직불금이다. 다음은 2020년 공익직불금 현황인데, 2021년, 2022년도 총액도 내역도 별반 다를 바 없다.
즉 공익형직불제는 농촌 내 소득격차를 오히려 확산시키고 있다. 결국 농지 중심주의, 생산주의 농정, 사람보다 작물 생산에 중심을 둔 농정관이 이런 직불제를 낳은 것이다. 농촌 내 소득 격차를 확산시키는 제도는 결국 농촌 내 탄소 배출도 늘리는 제도이다. 농지의 규모, 농지의 보유 유무와 관련 없이, 실제 경작에 참여하는 모든 농민 개인에게, 정기적인 현금을 조건 없이 지급하는 '농민기본소득'이야말로 소농의 지속가능성을 보장하는 첩경이다. 현재의 농업 현실에서 농민 1인당 월 30만 원 정도(3인 농민 가구라면 가구당 월 90만 원)의 농민기본소득이 지급된다면, 농촌의 풍경은 완전히 바뀔 것이다.
재원이 부족해서 농민기본소득 지급이 어렵다는 주장이 있다. 이런 소리를 들으면 화가 난다. 지난 수십 년간 정부는 농업 예산을 빼내서 다른 부문을 지원해 왔다. 그래 놓고 농촌을 살리는데 돈을 쓰라고 하면 돈이 없다고 한다. 다음은 지난 정권에서의 국가예산 증가율, 그리고 농식품부 예산 증가율, 그다음으로 국가예산 대비 농식품부 예산의 비율을 표시한 그래프이다. (하늘색이 이명박 정부, 분홍색이 박근혜 정부, 노란색이 문재인 정부, 붉은색이 윤석열 정부)
국가예산은 껑충껑충 뛰고 있는데 농식품부 예산은 거북이걸음을 해 왔다. 심지어 0.02% 증가한 해도 있다. 이것은 실질적인 감소이다. 사태가 이러하다 보니 국가예산 중 농식품부 예산이 차지하는 비율은 2008년 4.8%(수산 포함 5.4%)에서 문재인 정부 중인 2021년 3% 벽이 무너졌고, 현재는 국가 예산의 2.7%에 불과하다. 겨우 10여 년 만에 거의 반토막이 난 것이다.
농식품부 예산을 국가 예산의 4%로만 올리면 '모든' 농민 개인에게 월 30만 원의 농민기본소득 지급이 가능하다. 2008년이 아니라 2013년 정도의 비율로만 돌아가도 가능하다는 얘기다. 2021년 12월 1일 기준 농가인구수는 2,215,000명(통계청 '농림어업조사')이다. 그렇다면 월 30만 원 농민기본소득에 필요한 예산은 7조 9,740억이 된다. 2023년 농림축산식품부 예산 17조 2,785억 원에 농민기본소득 예산 7억 9,740만 원을 증액하면 25조 2,525억 원이 필요하므로, 2023년 국가 예산안 639조 대비 3.95%면 충분한 것이다. 만약에 비슷한 성격의 소농직불금 예산을 통합하면 24조 7,115원이면 되고, 이것은 국가 예산의 3.87%이다. 기본형 직불금(소농+면적, 2조 2805억 원)의 재원을 통합해서 농민기본소득 지급에 쓴다면 국가 예산의 3.59%로 가능하다.
문제는 돈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의지가 없는 것이다. 물론 농업의 '정의로운 전환'의 농민기본소득만을 가지고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생산, 가공, 운송, 유통망에 걸친 푸드시스템의 전환, 농민의 참여와 소통 강화, 의료, 교육, 문화, 체육 등 공공서비스의 확대 등이 뒷받침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에 더하여 농촌 내의 '불평등'의 해소가 없이는, 극심한 농촌 내의 계급 분화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농촌의 종합적인 구조 개혁이 불가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