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무늬인 종교성에 대한 성찰
위대한 발견
지난 14일, 미국이 화학무기 시설을 타격한다는 구실로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를 공습했다. 국제기구의 조사를 거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화학무기의 존재를 추정하고 공격을 감행한 미국의 태도는 힘(power)에 기반 한 국제정치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이에 대해 중국 저장(浙江)대학의 리둔추(李敦球) 교수는 「중국청년보」를 통해서 묻는다. 왜 미국이 시리아에서는 전쟁을 선택한 반면 북한에게는 평화적인 연출을 하는가? 해답의 실마리는 북의 ‘핵 무력’ 완성에 있다. 미국은 이 두 동맹국을 동일하게 ‘악의 축’이라고 규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른 대우를 했다. 미국에게 시리아의 죄는 ‘보복할 수 있는 힘의 부재(不在)’였다.
리둔추 교수는 ‘평화도 실력을 갖춰야 지켜질 수 있다’고 말하는 반면, ‘강한 나라와 약한 나라가 동등하게 외교를 갖는 시대’가 되기를 희망하며 글을 맺는다. 이 평이한 결론에는 인식의 균형을 보여주는 두 요소, 냉혹한 현실에 대한 분석과 이상적 미래에 대한 기대가 담겨 있다. 대체로 현실은 이해관계에 따른 강압적인 힘들이 교차하며 구성되는 반면, 미래는 이상적 가치를 구현할 부드러운 힘에 의해서 열릴 것으로 기대된다.
만일 신이 존재한다면 어떤 방식으로 활동할까? 자신의 의도를 관철하기 위해서 강압적인(coercive) 힘을 최대한 발휘하면서 현실을 재조정할까, 아니면 설득적인(persuasive) 힘으로 세계를 유혹하여 현실의 답보(踏步)를 풀어내면서 미래의 아름다움 속으로 끌고 갈까? 이런 문제에 맨 처음 관심했던 철학자는 아마도 플라톤일 것이다. 그는 자신의 우주론을 다룬 「티메이우스」에서, 이 세계의 질서는 ‘필연’(necessity)과 ‘지성’(intellect)이 혼합된 산물(産物)이라고 말하면서, 지성이 필연을 설득하여(persuading) 최선을 향해 가도록 함으로써 이 세계가 움직인다고 주장한다. (Timaeus, 48a)
플라톤의 이 주장에서 종교사상의 미묘한 가치를 발견한 사람은 A. N. 화이트헤드였다. 그는 자신의 책 『관념의 모험』 (Adventures of Ideas)에서 플라톤의 ‘설득’ 개념을 ‘종교사에서 가장 위대한 지적 발견 가운데 하나’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플라톤이 가진 형이상학적 직관의 통찰력은 ‘이 세계 안에 존재하는 신(神)적 요소를 설득적 작인(persuasive agency)에서 찾은’ 점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만일 ‘새로운 종교개혁’이 있다면, 그 영성을 ‘강압적인 힘’이 아니라 ‘설득적인 힘’에 기초를 둔 종교에 의해서 주도될 것이라고 말한다. (『관념의 모험』, 268)
신(神)의 힘을 ‘설득’적인 것이라고 보는 견해는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하나는 강압적인 힘에 기초한 근대사상의 실패에 대한 반성이요, 다른 하나는 설득의 힘에 의해서 구현될 ‘상생(相生)’의 미래에 대한 갈망이다.
근대과학은 물리적 세계의 인과관계를 구성하는 힘을 ‘작용인’(作用因, efficient cause)에서 찾았고 ‘목적인’(目的因, final cause)을 배제하는 사고습관을 가졌다. 작용인은 일방적인 힘이요, 강압적인 힘으로서 상대방의 자유를 제어하는 힘인 반면, 목적인은 교감에 의해서 발생하는 힘이요, 설득적인 힘으로서 상대방의 자유를 증진시키는 힘이다. 만일 신의 힘이 이 세계에서 작용인의 방식으로 이뤄진다고 사고한다면 그 신은 ‘전제군주’와 같은 존재로 연상될 것이다. 그러나 신의 힘이 목적인의 방식으로 이뤄진다고 볼 때 신은 우주를 진리와 아름다움으로 ‘유혹(lure)하는’ 존재로 그려질 것이다. 상생의 미래를 지향하는 사상이 어떤 신을 선호할지는 분명하다. 작용인에 기초한 ‘눈먼 시계공’일지, 목적인에 기초한 ‘우주의 시인(詩人)’일지.
기독교는 자신들의 신을 전능한 ‘우주의 통치자’로 상상하곤 했다. 지배자의 종교로 군림해 오면서 힘의 철학에 주도되어 왔기 때문이다. 전능한 신을 향한 고백이 ‘일방적인 힘의 절대치’를 지닌 존재에 대한 갈망으로 채워질수록 ‘사랑과 공감/연민’의 가치는 희미해졌다. 기독교가 갈릴리에서 발생한 자신의 기원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된 것이다. 신학적으로 볼 때, 전제군주를 염두에 두고 ‘은혜와 사랑’을 증명하려고 하니, 그 사유 또한 조잡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앞으로의 세계를 주도할 종교사상의 방향은 정해졌다고 하겠다. 그것은 설득적인 신에 관한 상상력에 의존할 것이다. 이는 신학의 운명만이 아니라 문명의 미래와도 연관된다. 힘의 논리에 기초한 제국주의의 문명이 아니라, 리둔추가 꿈꾼 ‘강한 나라와 약한 나라가 동등하게 외교를 갖는 시대’를 여는 상생의 문명은 어떤 힘에 의해서 열릴까? 보복할 수 있는 힘의 부재를 죄로 보는 현실 인식이 지배하는 세계에서는 제국의 지배력이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상생의 힘에 대한 갈망과 설득의 힘에 의한 문화의 증진은 폭력적인 제국의 지배력을 걷어가는 동력이 될 것이다. 남북의 화해를 향한 움직임, 그리고 미투(Me Too)운동 등 우리 사회의 곳곳에서 설득적 문명을 향한 목마름이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