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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목연재-終] 고상균의 男다른 성교육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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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 그 설레는 매력의 현장, 성교육

posted Mar 09,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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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호수 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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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 그 설레는 매력의 현장, 성교육 강의

 

 

1

 

1330년, 느닷없이 서해의 고도(孤島) 대청도가 갑자기 동아시아 역사의 중심에서 오르내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썩어도 준치라고, 아무리 흔들거리는 원 제국이라지만,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큰 영토를 호령하는 나라가 아니던가? 그 대제국의 황자 토곤 테무르가 권력암투에서 밀려 대청도로 귀양을 오게 된 것이었다. 대청도나 제주도 같은 한반도의 섬에 귀족들이 귀양 가는 경우가 자주 있긴 했다. 하지만 황실의, 그것도 칭기즈칸 직계의 귀양은 매우 이례적이었다. 아무튼 멀고도 먼 한반도의 대청도에서 유년시절을 보내게 된 토곤은 자연스럽게 고려의 풍습과 언어, 고려 사람들에게 익숙해졌다.

 

그렇게 사라질 뻔했던 토곤 테무르가 갑자기 부상하게 된 것은 극심한 권력다툼 속에서 13년간 무려 7명의 황제가 죽어나가는 바람에 더는 대통을 이를 사람이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대청도를 포함해 여러 유배지를 떠돌던 토곤이 하루아침에 혜종황제가 된 것은 실로 우연이라 할 수 있겠다.

 

그의 삶에 우연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어릴 적 겪어야 했던 유배살이로 인해 어머니의 정에 늘 굶주려 있었던 혜종은 따스한 눈길로 차를 따르는 시녀에게 온통 마음을 빼앗겨 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원 제국의 요구에 의해 강제로 끌려온 고려 공녀 기씨, 훗날 우리 역사에서 기황후로 불리게 되는 이 여인은 혜종으로 하여금 어머니의 정뿐 아니라 대청도를 통해 익숙해진 유년기 고려의 향수를 떠올리게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뻥을 조금 첨가해 정리해 보자면, 대원제국의 마지막이라는 그 거대한 사건의 주역인 황제와 황후의 만남은 토곤 테무르가 대청도로 유배를 가지 않았다면, 13년 동안 7명의 황제가 죽지 않았다면, 행주 기씨 집안의 처자가 공녀로 끌려가지 않았다면, 그리 잡혀간 공녀가 차 따르는 보직을 맡지 않았다면 결코 성사되지 않았을 것이다. 때로 사건은 여러 겹의 우연이 쌓여 만들어진 무대 위에서 역사가 되기도 한다.

 

2

 

'아이 C-8 X같네!'

 

그 엄청난 사건이 벌어진 반을 맡게 된 것 역시 우연이었다. 성교육을 담당한 강사들이 오는 순서대로 반 배정을 했고, 나는 두 번째로 도착했을 뿐이고, 세 번째로 오신 분이 '좀 드세다'는 반 분위기를 듣고 주저하시기에 아무 생각 없이 바꾸자고 했을 뿐이다. 그렇게 어느 날 아침의 우연이 겹쳐 내 앞에 펼쳐진 학급의 앞문을 여는 순간, 피가 뚝뚝 떨어지는 이마를 손으로 막고 있는 와중에도 다양한 욕을 찰지게 시전하며 뛰쳐나오는 학생과 마주쳤다. 1분만, 아니 30초만 늦게 들어갔어도 마주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면 이것 또한 그날의 우연 중 하나라면 하나겠다.

 

쉬는 시간에 두 명의 반 친구가 싸움을 벌였다. 전 쉬는 시간에 놀림당한 한쪽이 씩씩거리다가 수업이 끝나자마자 텀블러로 놀린 친구의 머리를 찍으면서-생태와 환경을 지킨다는 텀블러의 창조적 사용이 아닌가!- 시작된 싸움이었다. 결국 한 친구가 피나는 머리를 싸쥐고 양호실로 뛰어가면서 일단락되었지만, 반 분위기는 그야말로 엉망진창....... 교실 한 중간엔 핏자국이 뚝뚝, 당사자 학생은 운동장 쪽 창문을 바라보며 씩씩, 대사건 앞에서 급우들 대부분은 몹시 흥분한 채 우우, 수업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렸지만 도무지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45분을 몽땅 써도 부족한 강의를 한 마디도 떼지 못한 채, 야속한 시곗바늘은 참 신나게도 돌아갔다. 뭔가 해야만 했다.

 

3

 

'이젠 앉아 봅시다.'

완전 목소리를 깔고, 이 정도 상황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표정으로 말했지만.......

이러다 망하면 어쩌지?

사실 나는 완전 '쫄아'있었다. 다행히도 참여인들은 하나 둘 자리로 돌아갔고, 뭐라고 하려는지? 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이미 시간도 지나 있었고, 분위기상 계획된 강의는 진행할 수 없었다. 그래, 싸움에 대해 말해보자 싶었다.

 

'왜 싸움이 일어났나요?'

이에 대해 참여인들은 마치 중계방송을 하듯 신나게 앞다퉈가며 전후관계를 설명했고, 남아있는 당사자의 입장도 들을 수 있었다. 이어 그 상황에서 반 친구들은 모두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나눠보았다. 어떤 이들은 싸움을 부추겼다며 스스로 부끄러워했고, 또 어떤 친구들은 무관심했음을 말했다. 아주 소수는 말려보았지만 소용이 없어서 속상했다고 했고, 누군가는 내 알바가 아니라고도 했다. 참여인들과의 이야기 속에서 민주적 소통에 대해, 당사자 옆에 있는 목격자의 역할에 대해 설명했고, 그 소통이 친구들 간의 관계뿐 아니라 연인 간의 관계에서도 중요한 것이고, 사건의 목격자, 즉 주변에 있는 이들의 행동에 따라 성폭력가해자가 당당하게 행동하는 세상이 될 수도, 또 피해자를 더욱 아프게 만드는 공동체가 될 수 있음도 이해시키기 위해 노력했던 것 같다. 그 이야기들이 끝날 때쯤 머리를 다쳤던 친구가 돌아왔고, 수업이 끝난 후엔 반 친구들이 모두 모여 사과와 화해를 나눴다. 물론 학폭 관련 조사과정은 별도로 진행될 것이고, 여전히 허세스럽게 '더 싸워봐! 누가 이기나 보게'를 외치는 자들도 있었지만.......

 

4

 

우연한 사건은 몹시 당황스럽지만 전혀 예상치 못했던 감동과 만나게 해 주기도 한다. 사실 가부장적 남성사회구조 속에서 일 년에 두 시간 혹은 네 시간 정도의 성/평등 교육이라는 만남 자체가 참여인들과 강사들에겐 우연일지도 모른다. 비록 찰나와도 같은 순간이지만, 그 같은 우연이 충실히 쌓이고 쌓인다면, 각자의 '삶의 자리'는 지금보다 더 성평등한 환경으로 변화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저 지금은 그 한 번의, 하루의 강의를 충실히 준비해 만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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