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속 아픈 길목을 마주한 평화기행
'기행(紀行)'은 '여행하는 동안에 보고, 듣고, 느끼고, 겪은 것을 적은 것'인데, 글로 '적은 것'은 없고 보고 듣고 느낀 것이 주가 되니 그저 '여행'이라 함이 마땅할 것이다. 길목의 해외(국제)평화기행 역시 다녀온 지 몇 해가 넘어가니 적어 놓은 것이 없어 당시 기록을 찾아 이제야 나의 기행을 만들어 본다.
2016년 1월 7일(목)부터 11일(월) 4박 5일 동안 오키나와 평화기행, 2019년 1월 7일(월)부터 12일(토)까지 5박 6일 동안 베트남 평화기행을 다녀왔다. 각각 스무 명 안팎의 인원이 참가했다. 두 곳 모두 20세기 현대의 이성과 인간성을 파괴한 전쟁의 현장이다. 그리고 우리 한반도 역사와 아픔을 같이 하는 곳이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선명한데도 단죄하거나 청산하지 못해 피해자들의 눈물은 마르지 않고 있다.
오키나와는 매우 복잡하고 얽힌 역사를 가진 지역이다. 고대로부터 류큐왕국으로 독립적인 문명과 언어, 역사를 이어왔으나 19세기 후반 일본제국에 흡수돼 지금은 오키나와현이 되었다. 2차 세계대전 패전으로 미군정의 통치(1945~1972)를 받았으며 미국의 동아시아 패권전략의 추진기지로 미군이 주둔하고 있다. 2차 대전 당시에는 일본군과 미군의 격전지였다. 전쟁의 실상은 참혹했다. 일본 제국주의는 오키나와인들을 본토인과 차별해 전쟁의 총알받이로 내세웠고, 패전이 짙어지자 천황의 신민으로 당당하게 죽음을 택해야 한다고 선동해 오키나와 곳곳 마을에서는 주민들을 산으로 데려가 자결하거나 학살했다. 이 전쟁에 조선인들도 끌려가 징용군으로 죽거나 위안부가 되었다.
평화기행에서는 이런 역사 현장을 모두 다녔다. 전적지, 평화기념자료관, 집단자결지, 일본군 특공대 동굴, 한국인 위령탑, 위안소, 아리랑비, 헤노코 미군기지 건설 반대투쟁 현장, 류큐왕국의 수리성 등.
우리나라와 관련해 본다면 오키나와는 우리가 피해자이지만 베트남은 가해자다. 베트남과 미국 전쟁에 동원된 한국군은 베트남 민간인을 학살했다. 1960년부터 시작된 베트남전쟁에 한국군은 1964년부터 32만 명이 참전했다. 1968년 2월 청룡부대가 평소 안전전략촌인 퐁니, 퐁넛 마을에서 민간인 74여 명을 학살한 것을 비롯해 하미마을 등 한국군이 주둔했던 다낭 지역을 중심으로 곳곳에서 학살이 일어났다. 공산주의자나 게릴라를 찾아내기 위해 소탕작전을 벌였다는 것이다. 평화기행단은 한국군 증오비를 찾았고, 위령비에 헌화하고 추모했다. 학살지를 방문하고 피해자들을 만날 때 몸과 마음 가짐이 조심스러웠다. 죄스럽고 우울하고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김대중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이 재임 당시 양국 정상들 만남에서 과거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민간인을 학살한 사실에 대해 '베트남 국민들에게 고통을 준 데 대해 미안하게 생각한다', '불행한 역사에 유감의 뜻을 표한다'라고 했다. 그러나 공식적인 사과는 하지 않았다. 지난 5월 30일 '진실화해위원회'는 진실규명 대상에서 외국인을 배제한다는 이유로 하미학살 사건을 조사하지 않겠다는 각하결정을 내렸다.
일본에 대해서는 피해자, 베트남에 대해서는 가해자인 한국. 가해자로서 베트남에 진정한 사죄를 할 때 일본으로부터 사과를 받을 수 있는 정당성과 도덕성을 더욱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역사와 기억에 대해 어떤 국가든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전쟁에 관여된 국가들이 자신들만의 특수한 정체성(민족, 이념, 문화 등)을 이유로 피해자들을 배제시켜 전쟁과 학살 범죄를 감추거나 외면하는 것은 모든 인류의 평등과 인간의 존엄성 존중이라는 보편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모든 역사적 사실과 고통의 기억에 응답하고 아픔을 치유할 의무가 있는 세계시민이다.
길목 평화기행 참가자들은 기행의 의미와 가치, 방문한 지역의 고통에 공감하는 이들이다. 서로 대화하기를 즐겨하고 환대한다. 역사와 기억의 공유를 경험한 이들이 실천과 행동으로 이어지도록 나누는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베트남 기행 참가자 중에는 해외에 거주하는 이들도 있어 국제적 활동도 계획할 수 있다. 길목이 참가자들의 후속 활동에 계획과 지원이 있기를 바란다. 코로나 시기를 지난 지금 다시 해외평화기행을 기획해 세계사의 아픔과 마주하는 사람들을 모으는 길목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