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옥희(여성농민)75

보이지 않는 존재에서 농업의 주체로

보이지 않는 존재에서 농업의 주체로

- 무급가족종사자에서 여성농민으로 인정받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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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인구의 52.5%를 차지하고, 농업노동의 절반이상을 담당하고 있는 여성농민들의 현재의 삶은 어떠할까?

 

혈연, 지연, 학연으로 똘똘 뭉친 가부장적인 농촌사회에서 여성농민들은 본인의 이름대신 '누구댁'으로 불리면서, '농촌부녀' '농촌여성'으로 분류되면서 보이지 않는 존재로 살아왔다. 농가단위의 농업정책 속에서 경영주가 주로 남성인 현실에서, 경영주가 아닌 여성농민은 '단순 가족종사자' '농가주부'로만 인식되었다. 그래서, 실제 농업의 주체이면서도 본인 이름으로 된 통장도, 구매·판매실적도 없고, 본인 명의의 농지도 없는 여성농민은 조합원자격도 갖추기 힘들고 각종 농업정책에서 소외되어 왔다.

 

그러다 보니 과거의 여성농민정책은 부엌개조, 생활개선, 명패달기, 취미활동 지원 등이 주를 이뤄 여성농민을 단순한 복지의 수혜대상 정도로 인식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85년 소값 파동투쟁, 87년 부당수세 거부투쟁, 88년 의료보험, 고추파동 투쟁등을 통해 여성농민들이 투쟁의 맨 앞에 나서면서 여성농민들의 존재를 부각해 냈다. 1984년 말 가톨릭 농촌여성회가 가톨릭 여성농민회로 개칭하면서 '여성농민'이라는 이름이 시작되었다. 1989년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을 출범시키면서 농업의 주체로서 여성농민의 사회적 지위와 권리를 찾기 위한 다양한 노력과 투쟁을 여성농민 스스로 만들기 시작했다.

 

처음엔 독자적인 여성농민조직이 왜 필요하냐는 반발이 있었다. 노동조합의 여성위처럼 농민회 산하 여성위에서 활동을 보장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가족농을 근간으로 유지되는 농업의 특수한 환경에서 특히 가사노동, 돌봄노동, 농업노동, 마을대소사, 문중제사까지 모두 온전히 여성농민이 책임지고 있는 가부장적인 농촌의 현실을 고려하지 못한 얘기이다. 독자적인 조직이 있었기에 여성농민의 특수한 환경을 이해하고, 실정에 맞는 교육 및 활동, 정책들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농촌의 성평등 강사단이 따로 육성되어야 하는 이유도 맥락이 비슷하다. 도시와 농촌 여성의 차별구조 및 고민의 수준이 다르다. '농촌에 들어오는 순간 20년 전 세상으로 돌아간 것 같다'는 청년여성들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농촌에서의 여성문제는 매우 복잡하고, 고민의 수준이 다르다. 저 또한 결혼 후 시부모님이 계신 집으로 들어왔는데, 동네 절반이 친인척이었다. 거의 모든 농촌이 이러니 성폭력이나 가정폭력이 발생해도, 쉬쉬 하거나 여성이 피해자가 아닌 오히려 헤퍼서 그렇다는 둥 빌미를 제공한 당사자가 되는 억울한 상황이 발생한다. 심지어는 부인을 둘을 두고 한 동네에서 따로 살림을 내어 자식 낳고 살아온 집들이 더러 있다. 대부분이 고령인 농촌에서 새로운 인구가 늘지 않다 보니 폐쇄적인 문화가 지속되고, 남자는 그럴 수 있다는 잠재의식이 짙게 깔려있어 성적인 농담정도는 애교로 봐야 한다. 그렇기에 농촌에서의 성평등문제는 다르게 접근해야 한다.

 

여성농민회 활동이 처음엔 일을 하기 위해 아이를 맡겨야 하는 발등의 불을 끄기 위해 농촌탁아대책위를 구성하고 공동탁아소를 운영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농업문제 해결, 사회적 지위향상과 복지활동 등으로 발전해 갔다. 1992년 '쌀 전량수매와 학교급식 실현을 위한 전국여성농민대회'를 단독으로 개최하였고, 총 14개 항목의 여성농민의 인간다운 삶을 위한 <여성농민 개혁안>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지금은 너무나 당연한 학교급식과 친환경 급식이 여성농민들의 요구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여성농민의 지속적인 활동으로 1994년 12월 1가구 1조합원제를 규정하던 농협법이 개정되어 1가구 2조합원제의 제한적인 복수조합원제가 시행되었다. 이후 1999년 협동조합법 개정으로 1가구 1조합원제의 원칙이 완전 철폐되어 지금에 이르렀다. 그 이후 여성농민들도 농협의 조합원이 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었다.

 

2001년부터 여성농업인육성법이 시행된 후 5차 여성농업인 육성기본계획('21-25년)이 수립되기까지는 전여농의 여성농민대개혁안이 큰 역할을 했다고 본다. 5차 여성농업인 육성기본계획의 주요 슬로건은 '성평등을 통한 여성농업인의 행복한 삶터, 일터, 쉼터'이다. 4차 기본계획의 주요 슬로건인 '양성평등'에서 진일보했다고 본다.

 

4차 기본계획(2016-2020년)을 거치며 2016년 공동경영주 제도가 도입되었다. 여성농민도 농민으로서 직업을 보장하라는 줄기찬 요구로 만들어졌지만, 공동경영주 제도는 현재의 농어업경영체 등록 제도하에서 이름만 있을 뿐 별다른 권리가 주어지지 않는다. 어떠한 법적인 권한도 없이 단지 경영체 등록서류 별지 서식란으로만 존재하고 있다. 각종 정책토론회를 통해 여성농민의 현실을 알려내는 노력들이 진행되고 있다. 현재의 농업, 농촌, 식품산업기본법을 근본적으로 뜯어고치고, 농업인 규정부터 성인지적 관점에서 다시 수립하여 여성농민이 농업의 주체로 인정받기 위해 농민기본법 제정운동이 시작되었다.

 

2019년부터 해남군에서 시작된 농민수당제도가 시행되면서, 지급대상을 농가당 한 사람으로만 규정하여 여성농민이 제도적으로 배제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 후 여성농민들의 농민으로서 직업적 지위보장 요구는 더 거세지기 시작한다. '모든 농민에게 농민수당을 지급하라'는 여성농민들의 요구가 처음엔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지금까지 농가중심의 농업정책 속에 여성농민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성농민을 개별 주체로 인정해야 한다는 인식이 증가하게 되면서 뒤늦게 농민수당 조례가 마련된 제주와 충남, 경남에서는 공동경영주 및 모든 농민에게 농민수당을 지급하기 시작했다.

 

2022년 농민기본법 국민청원운동을 시작으로, 본질적인 여성농민의 권리보장을 명시하는 농민기본법을 제정하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농지 및 농업생산설비는 부부 공유자산으로 한다'는 개념이 등장하며, 여성농민의 권리보장 투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30년 동안 여성농민들은 여성농민의 직업적 지위 보장을 위해 여성농민전담부서 설치를 줄기차게 요구해 왔다. 현재 농림부뿐 아니라 일부 지자체에서 전담부서를 설치하고는 있지만, 여성농민 고유사업만 전담하는 곳은 드물다. 시, 군까지 전담인력이 배치되지 못하다 보니, 중앙부처의 여성농업인 정책이 지역에서 제대로 이행되고 확산되지 못한 한계가 드러나고 있다.

 

2019년도 제주도에선 여성민우회와 여성농민회가 성평등 마을규약 사업을 최초로 시작하였다. 2017년 '여성친화도시 제주 실현을 위한 제주여성 100인 원탁회의'를 개최해 성평등 의제를 발굴한 것이 시작이다. 2018년 행정부지사 직속으로 '성평등정책관'직제가 신설되고, 여성농업인 지원팀(3명)이 생겨나면서 성평등 실현을 위한 다양한 사업이 활성화되고 있다. 그 후 전남에서도 양성평등기금을 지원받아 작년에 처음으로 도내 5개 마을에서 성평등 마을규약 사업을 시행하고 성평등교육을 마을로 들어가 실시하고 있다. 마을 주민들 스스로 성평등 마을규약을 만들면서, 마을이장이나 마을개발회의의 구성에 여성의 참여권을 보장하게 되고, 밥 하는 역할에 국한되었던 부녀회의 역할에 대해 스스로 고민하면서 마을의 여성회로서 전환을 꾀하게 된다. 마을회관이라는 공간을 성인지적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마을의 운영 또한 성인지적 관점에서 들여다보는 계기가 되고 있다. 몇 군데 시범사업에 그칠 것이 아니라 모든 지역에 다양한 과정에서 성평등 교육이 실시되어야 한다.

 

3년 전부터 시행되고 있는 여성농업인 영농여건개선교육을 통해 여성농업인 정책을 알려내고, 성평등 의식을 높일 수 있는 교육들이 진행되고 있다. 마을로 들어가 여성농민들을 직접 만나 소통하는 장이 되고 있어 여성농업인 정책이 한 단계 진일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첫해 한 지역당 120개 마을을 들어가게 되는데 첫해 영광, 순천, 구례 2회째 진도, 화순, 담양, 고흥 올해는 나주, 무안까지 합류하면서 영농여건 개선교육이 진행될 예정이다. 실제 공동경영주 제도가 있는지도 몰랐던 여성농민들이 많았는데, 교육을 통해 공동경영주 가입이 늘어나고 있다.

 

2018년 여성농업인 실태조사에 의하면, 여성농민이 농사일 중 50% 이상을 담당하는 비중이 더 높은데도 불구하고, 본인의 직업적 지위를 '공동경영주'또는 '경영주'로 인식하는 경우는 38.4%이며, 가족종사자로 인식하는 비중이 61.6%로 나타났다. 여성농민 스스로 본인의 역할을 낮게 인식하는 게 여전히 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응답결과 81.1%가 여성의 지위가 남성보다 낮다고 대답하였다. 또한, 여성농민의 하루 가사노동 시간은 283분이고 남성은 37분으로 나타났다. 여성의 가사노동 시간을 100으로 했을 때 남성은 13에 그치고 있어 성별불균형이 여전히 심각하다. 그럼에도, 예전과 달리 사회참여 기회가 많아지고, 의견개진이 자유롭다는 이유로 가정 내 성평등이 이뤄줬다고 착각한다. 살림을 못하는 여성을 흉보면서 여전히 가사노동은 여성의 일로 여기는 성역할 고정관념이 고령화된 농촌에선 심해 청년농들의 농촌 정착의 기피원인이 되고 있다.

 

실제로 2020년 전여농에서 실시한 성평등 실태조사에 따르면, 딸에게 농사일을 물려주고 싶냐는 질문에 90% 이상이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이는 여전히 농촌지역에서 성차별 문제가 심각하다는 반증이다.

 

농촌인구의 절반이상이 여성인데도, 여성조합원 수는 33.9%에 불과하다. 여성대의원수는 21.1% 정도이며, 여성이사는 12.2%이고, 여성조합장은 전국 1113개 조합 중 단 7명 0.6%(2022년 기준)에 불과하다. 2023년 시행된 동시조합장 선거에선 그나마 13명(1.2%)이 당선되어 진전이 있긴 하다. 이렇듯 농촌지역에서 여성이 대표성을 갖기란 여전히 많은 장벽이 있다. 여성이장이 늘고는 있지만, 여전히 마을의 주요 의사 결정기구에서 여성은 부녀회장만 당연직이고, 대부분이 남성들로 구성되어 있다.

 

기후위기의 최대 피해자는 농민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상기후의 증가로 가뭄, 냉해, 홍수, 병충해등 듣도 보도 못한 재해발생이 늘어나고 있다. 이는 농작물의 피해와 농업소득감소로 이어질 뿐 아니라, 농업노동 시간의 증가로 나타난다.

 

2018년 여성농업인 실태조사에 의하면 농업노동의 50% 이상을 여성농민이 담당하고 있으며, 여성농민은 88.4%가 '수확작업'에 주력하고 있다. 또한, '수확 후 관리' '출하 준비'등의 역할을 주로 담당하고 있다. 반면 남성은 '농약살포''비료주기''농기계작업'을 주로 담당하고 있다. 각종 재해, 병충해의 증가는 여성들의 노동시간의 증가와 비례한다. 상품성이 떨어지는 농작물에 대한 손질과 2차 가공등의 역할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기후위기는 식량의 위기이다. 전 세계적 폭염은 주요 작물의 잠재적 생산량을 감소시키고 있다. 생산량 감소는 기아의 증가와 농업소득의 감소를 야기한다. 기후변화로 일할 수 있는 노동시간 또한 짧아지고 있다. 심각한 열과 태양빛에 노출되는 시간이 길어져 농민들의 건강 악화로 나타나고 있다. 특히, 밭농사등 장시간 볕에 쪼그리고 앉아 수확하는 일을 여성농민들이 도맡아 하다 보니, 기후위기는 여성농민들의 건강에 더 많은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열 스트레스로 인한 급성 신부전, 탈수등의 증상이 자주 나타난다. 국가인권위 농민건강 설문조사에 의하면 '허리, 무릎 등 근골격계 질환(61%)이 가장 많았고, 알레르기등 피부질환(37.7%), 온열질환(29.9%) 순으로 나타날 정도로 기후위기가 농민들의 건강을 더 악화시키고 있음이 드러났다. 그래서 전여농은 여성농업인 특수 건강검진 확대를 통해 농부병에 대한 국가의 책임 있는 치료체계를 만들 것을 요구하고 있다.

 

전여농은 기후위기와 식량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활동들을 전개해 왔다. WTO-FTA에 이르는 신자유주의 개방농정에 맞서 식량주권을 지키기 위한 노력들을 해왔다. 다국적 기업이 장악한 농산물 무역개방에 맞서 살아남기 위해 규모화, 단작화된 농업을 하다 보니 사라지는 종자가 많다. 기후위기가 가속화될수록 단작화된 농업은 전 세계적 식량위기를 불러올 가능성이 크다. 전여농은 오래전부터 종다양성을 유지하고, 농민의 손에서 손으로 이어져온 종자주권을 지키기 위해 토종종자 지키기 사업과 1농가 1토종씨앗 심기운동을 꾸준히 벌여왔다. 또한 탄소감축과 생태다양성을 보존하기 위한 농생태학을 꾸준히 실천하고 있다.

 

이제는 농민기본법을 제정하여, 농업을 시장경제의 논리에 내맡겨 중소농을 몰락시킨 현재의 농업, 농촌, 식품산업 기본법을 근본적으로 바꾸려는 노력들을 하고 있다. 식량주권과 농민의 권리, 국민의 먹거리 기본권을 지키기 위한 농민기본법 제정으로 지속가능한 농업, 농촌을 만들려는 노력들을 하고 있다.

 

전남 지역에 여성농민전담부서가 생겨나면서, 가장 크게 한 일은 행복바우처 제도의 확대일 것이다. 도시에 비해 문화적 혜택이 부족한 농촌여성들에게 행복바우처 카드를 지원해 문화적 기회를 넓히기 위해 시행된 제도이다. 65세 이하 10만 원 지원(자부담 2만 원)에서 그나마 75세 이하 20만 원 지원 자부담을 없애게 된 것도 전담부서가 해낸 일이다. 하지만, 그 외에는 여성농업인 정책이랄 게 여성친화형 농기계 지원 말고는 별로 찾아볼 수 없다. 이는 시, 군 단위의 전담부서나 인력이 없어 여성농업인 정책개발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탓도 있고, 여성농민 스스로 본인의 권리를 찾고자 하는 노력들이 부족해서 일수도 있다. 그럼에도 나주시에 여성농민전담부서가 생겨나면서, 농사비법대회를 통해 여성농민의 일과 능력을 인정해주기 시작했고, 영농여건개선교육이나 성평등 교육이 체계적으로 이뤄지고, 여성농민 반값농기계 지원사업등이 시행되는 등 여성농업인 정책 개발이 발 빠르게 이뤄졌다. 하지만, 지자체장의 입맛에 따라 전담부서가 폐지되는 등 여전히 여성농민은 주요한 정책대상이 되지 못하고 있다.

 

30년 전부터 주장해 온 여성농민의 권리보장 요구는 지금도 달라진 게 없다. 행정기관에 여성농민전담부서나 전담인력을 요구하면, 하루 축제에 연예인 섭외비용으로 몇십억을 써도 여성농민 전담인력 마련에는 예산타령을 먼저 한다. 농민수당 지급대상을 여성농민들까지 늘려달라 하면, 보건복지부 사회보장협의회 핑계를 대며, 지자체가 맘대로 하면 지방교부금이 준다며 난색을 표하기 일쑤다. 농업의 주체로서 여성농민들을 인정하고 지원해야 할 필요성을 못 느껴지기 때문이다.

 

농촌지역의 고령화가 심각하다. 청년농들이 정착하게 하기 위해서도, 성평등한 농촌건설은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다행히 2020년도부터 농촌형 성평등 강사단이 육성되어, 농촌에 맞는 성평등 교육이 이뤄질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이제, 각종 교육에 성평등 교육을 의무화시켜 농촌의 문화를 성평등하게 바꿔내야 한다.

여성농민이 행복한 삶터, 일터, 쉼터는 성평등으로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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