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째별77

길뜬별 | 7번 국도 완주 순례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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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뜬별 : 7번 국도 완주 순례길 1

 

 

영하 10도의 혹한을 뚫고 경주 문무대왕릉 봉길대왕암 해변부터 칠포항까지 닷새간 100km 이상 걸어 2020년부터 도보 순례한 7번 국도 혹은 해파랑길을 완주했다. 2024년 1월 21일부터 27일까지의 분량이 너무 많아 21일부터 23일까지를 먼저 싣는다. 

 

프롤로그 

 

2023년 11월 30일 새벽 고요한 잠을 찢는 굉음이 울렸다. 긴급재난문자였다. 평소 휴대전화기를 무음으로 해 놓는 나는 처음 듣는 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휴대폰을 열어보니 새벽 4:55 긴급재난문자였다. 

[기상청] 경북 경주시 동남동쪽 19km 지역 규모 4.3(이후 4.0으로 발표) 지진발생/낙하물 주의, 국민재난안전포털 행동요령에 따라 대응, 여진주의. 

지도를 보았다. 경주 나아리 인근이었다. 지진이면 핵발전소는? 새벽인데도 불구하고 탈핵 벗들에게 문자를 보냈다. 벗 한 명이 황분희 월성원전인접지역이주대책위원회 부위원장님과 통화를 했는데 대피 준비를 하신다고 했다. 여진 걱정으로 날 밝을 때까지 다시 잘 수 없었다. 강의 후 낮에 부위원장님과 직접 통화하니 그냥 댁에 머물러 계신다고 했다. 종강하면 곧 내려가겠다고 했다. 

그리고 12월이 지나고 다음 해 1월이 되었다. 울산 북콘서트 일정이 잡혔고, 내려간 김에 곧바로 경주~포항 구간을 이어 7번 국도 도보순례를 완주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하필 한파가 몰아닥치는 시기였다.

 

2024년 1월 21일 일요일 

마지막 배추로 끓인 된장국을 다 먹고 집안을 싹 걸레질하고 반듯하게 정리한 후 집을 나섰다. 영화 <델마와 루이스> 첫 장면처럼. 언제 다시 돌아올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내 자취를 깨끗하게 남기는 것. 외출할 때 항상 하는 습관이다. 

동네 좌석버스를 놓치고 자동차까지 돌아가는 동안에도 배낭이 무척 무거웠다. 운전해서 대전역 근처에 주차했다. 하차하기 직전에 우비, 누비바지, 비니 beanie 모자와 색깔 맞춘 주황색 캐시미어 목도리, 회색 캡 모자를 조수석에 놓고 내렸다. 

2020년 2월 첫 7번 국도 도보순례를 나설 때와 똑같은 장면을 연출하려고 같은 옷에 같은 모자를 쓰려고 했지만 무게 때문에 모자 둘 중 하나는 포기해야 했다. 더 따뜻한 모자를 선택했다. 

대전역까지 1.5km를 걸었다. 허리 벨트와 가슴 벨트를 해서 조였는데도 배낭이 꽤 무거웠다. 대전의 자랑 성심당에서 나아리에 드릴 선물로 튀소 3종세트와 순수롤케이크를 샀더니 두 봉투에 따로 담아주었다. 스틱을 잡을 손이 없어 스틱을 매달았더니 배낭은 더 무거워졌다. 

대전역 플랫폼에서 두유와 삶은 고구마로 간단하게 점심식사를 했다. 그리고는 드디어 수첩 비닐을 벗겼다. 작년 말 서울 교보문고에서 산 MOLESKINE 몰스킨 클래식. 나를 위해 이 수첩을 다시 사기까지 무척 오래 걸렸다. 비움실천한다고 한동안 저가 위주로 살았다. 나를 찾는 시작이 예전에 사용하던 몰스킨 수첩을 다시 쓰는 것이었다. 몰스킨에 어울리는 펜으로 선택해 가져온 건 초록색 F SCOTTFITZGERALD 스콧피츠제랄드 1896-1940 지우개 달린 연필. 끝부분에는 내 이름이 쓰여있다. 예전에 엄마가 해 주시던 방식으로, 나무 끝부분을 칼로 도려내고 내 이름을 써준.

 

13:05→14:05 대전에서 경주까지는 기차로 한 시간. KTX를 오랜만에 탔더니 쾌속이 무언지 새삼 느꼈다. 그런데 기차에서 이번 도보순례를 위해 새로 마련한 1인용 코튼라이너를 깜빡 잊고 왔음을 알아차렸다. 전날 밤 11시까지 다큐멘터리 대본을 작성해서 송고하느라 정신이 좀 없었다. 

신경주역은 작년인 2023년 12월 28일부터 경주역으로 명칭 변경이 되었다. 경주역에서 50번 버스를 타고 경주고속버스터미널로 갔다. 거기서 45분을 기다려 오후 3시 20분에 150번 버스를 탔다. 

4:20 감은사지 석탑을 지나 잠시 후 나아·원자력발전소 후문 정류장에 내렸다. 황분희 월성원전인접지역이주대책위원회 부위원장님 댁까지는 혼자 찾아갈 수 있다. 무거운 배낭을 어깨에 메고 양손엔 빵 봉투를 들고 걸어갔다. 집 근처에서 개가 경계하며 다가온다. 

“저 왔어요~.”

문이 열렸다. 검은 원피스의 황분희 부위원장님이 서 계셨다. 현관에 배낭을 내려놓고 스틱을 떼어내고 엎드려 등산화 끈을 풀었다. 그사이 부위원장님은 내 배낭을 옮기려고 드시더니, “아유 무거워. 이렇게 무거운 걸 어떻게 메고 다녀?”

오면서 마시지도 않아 다 식은 원두드립커피는 왜 텀블러에 타왔는지. 오후 늦게는 커피를 못 마셔 한 모금 마시고 버렸다. 

 

부위원장님과 사 간 케이크와 만들어 놓으신 무전을 먹으며 안부를 여쭤보았다. 

31번 우회도로가 집 앞으로 나는 바람에 토지 절반 정도가 잘려나가서 봄에는 집을 지으실 계획이라신다. 보상은 받았지만, 부위원장님이 이사 나가면 이주대책위원회 유지가 어려우니 그냥 계신다고 한다. 미안하지만 다행이었다.

마을 소식으로는 풀빌라가 은행 대출을 제때 갚지 못해 경매에 넘어갔단다. 지난번(2022년 7~8월)에 방문했을 때 성업임을 확인하고 갔었는데 어찌 된 일이냐고 반문했다. 전 이장이 절반 정도 호실을 로비로 사용했단다. 게다가 아직도 현 이장에게 마을 운영권을 인수인계해 주지 않고 있다고 한다. 법원에서 판결이 나도 막무가내란다. 한수원을 등에 업고 장기집권했던 전 이장의 세력은 마을에서 막강했다. 

 

다섯 시 반이 넘어 이른 저녁식사를 했다. 

배추된장국에 날배추와 멸치와 김치. 부위원장님이 최근 채식 위주로 식단을 조정하셔서 예전처럼 반찬이 가득하지 않았지만, 국만으로도 맛있게 식사했다. 

식사 후 옆방을 따로 내주셔서 나는 곧 조용히 쉴 수 있었다. 

 

다음 날은 울산 북콘서트. 그다음 날부터 도보순례를 할 계획이다. 짐을 빼고 또 뺐는데 대체 배낭은 왜 무거운 걸까? 배낭 자체의 무게가 꽤 됐기 때문이다. 면 실내복으로 환복하고 그 댁에 있는 내 책을 통독했다. 술술 잘 넘어간다. 새록새록 지난 5년이 스쳐 갔다. 

 

밤 10시 넘어 일찍 소등하고 잠을 청했다. 

꿈을 꾸었다. 

 

깨어보니 자정 50분. 어깨가 아파서 만져보니 부어올랐다. 물파스를 발랐다. 배낭이 너무 무거워 이대로는 종주 불가. 게다가 기온은 점점 내려가 영하 10도. 바람 소리가 두렵다. 포기하든가 짐을 부치고 간단하게 걷든가 선택해야 한다.

 

다행히 예비용 20l(리터) 68g 초경량백 울트라 데이백을 매달고 왔다. 

입고 있는 것을 포함해 내가 소지한 물품은 다음과 같았다. 

 

팬티 3장, 발가락양말 3켤레, 등산 양말 3켤레, 기능성 내복 하의 한 장, 평소 입는 내복 하의 한 장, 속옷 담은 광목 주머니, 양말 담는 손수건으로 만든 주머니, 옷 담는 주머니 둘, 검정 바지 한 벌, 검정 캡 내의 한 장, 검정 얇은 목폴라 한 장, 검정 아웃도어 후드티, 회색 집업 수트, 검정 얇은 오리털 파카. 주황색 비니, 얼굴 가리는 버프 두 장, 자전거 탈 때 끼던 연분홍 얇은 장갑, 검정 천 마스크, 손수건, 소변 거즈, 약품과 얼굴에 바를 크림 샘플, 앰플 스틱, 선블록, 비비크림, 핸드크림, 콤팩트, 은수저, 손톱깎이, 빨랫줄, 수건, 비누, 칫솔, 치약, 치실, 립스틱, 립밤, 몰스킨 수첩, 올해 다이어리, 연필, 사인용 잉크 펜, 가죽 지갑, 휴대전화기, 소형 카메라, 카메라 여분 배터리, 카메라와 폰 충전기 각 하나씩, 370ml 스테인리스 텀블러, 300ml 티타늄 컵, 핫팩 한 개, 마스크팩 두 장, 일회용 마스크 3장, 간식용 헝겊필통에 믹스커피 5봉, 블랙커피 2봉, 얼그레이 티백 2, 오설록 1봉, 짜 먹는 홍삼 진액 5봉, 홍삼단 3봉, 비타민 C 10정. 홍삼 사탕 3개. 약 파우치에 소화제, 마데카솔, 종합감기약, 테라플루 나이트 4봉, 바셀린, 바르는 파스, 반짇고리, 헤드 랜턴, 휴대용 방석. 코팅한 기도문. 

 

흠~ 나열하고 보니 많긴 많네. 

산티아고 순례길부터 썼던 36리터 배낭에 있던 짐을 20리터 초경량 배낭으로 옮겨 쌀 수 있을까? 고민하다 새벽에 다시 잠이 들었다. 

 

 

2024년 1월 22일 월요일 

아침 일찍 서둘러야 했다. 월성 핵발전소 앞에서 출근시각에 맞춘 상여시위가 있다. 

7시 넘어 세수만 하고 옷을 입었다. 부위원장님이 내 식사만 차려주셨다. 배추된장국에 밥을 말아 먹고 배낭을 챙겼다. 

부위원장님이 배낭을 저울에 재보니 6kg. 전날 스틱까지 매달았으니 아마도 7kg은 됐을 거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선 10kg을 메고 35일여 걸어 다녔다. 그땐 7년 전. 석 달 전 지리산 화대종주 때도 느꼈지만 이제 내 체력은 예전 같지 않음을 인정해야 했다. 

 

8시 좀 넘어 집을 나섰다. 바람이 찼다. 천막 농성장에 연기가 나고 있었다. 누군가 먼저 와 있는 것이었다. 인기척이 반가운 월요일 아침이다. 

천막농성장에는 모든 게 낡았다. 천막에는 전기도 끊어진 지 오래고 상여도 빛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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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전 2017년 8월 23일 수요일과 2024년 1월 22일 월요일

 

 

천막 안에 마을 주민 한 분이 불을 피우고 계셨다. 이어 양남면 이재걸 새마을지도자협의회장, 김진선 총무님, 경주환경운동연합 이상홍 사무국장, 은정이 도착했다. 부위원장님과 나까지 모두 일곱 명이 8시 20분부터 9시까지 3438일 차 상여시위를 했다. 중간에 유튜브 방송하시는 한 분이 더 오셨다. 나도 노란 드럼통을 밀고 맨 끝에 가느라 사진을 제대로 찍지 못했다. 

시위가 끝나고 전날 내가 사 온 성심당 소보로 세트와 차를 나누며 잠시 담소를 나누었다. 마을에 또 무슨 사업장이 들어오는지 황분희 부위원장님이 이상홍 사무국장에게 물어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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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38일 차 상여시위

 

 

오전 9시쯤. 은정의 차를 타고 울산으로 향했다. 

오전 10시경 도착한 울산광역시청 앞에 있는 <북카페 사람>은 노무현재단 울산지역위원회 사무실이었다. 시간이 충분했으므로 준비를 다 한 후 36리터 재색 배낭에 있는 짐을 20리터 얇은 주황색 배낭에 담아보았다. 꾹꾹 욱여넣으니 가능했다. 은정이 자신에게 맞는 배낭 무게는 몸무게의 1/10이라고 했다. 그럼 4kg대로 줄여야 한다. 메고 온 배낭 무게만도 2kg쯤 되는 듯하다.

 

오전 11:50 근처 <고을> 식당에서 은정이 스태프와 내게 낙지돼지볶음을 사주어서 맛있게 먹었다. 

 

오후 2시부터 한 시간 남짓 북콘서트를 했다. 청와대 앞 시위 때 만난 박진영이 새 웹자보와 현수막을 제작해 왔다. 예상하지 못했는데 라이브 생방송이 준비되고 있었다. 유튜브로 얼굴이 나가다니 신비주의는 끝났다. 하지만 울산의 정성을 내 신조로 인해 중지시킬 수는 없었다. 

그 추운 날에 스무 명 남짓 모여주셨다. 김슬기 활동가의 사회로 은정의 인사말로 시작해 신윤철 교장 선생님의 오카리나 축주와 내 이야기와 황분희 부위원장님의 말씀이 이어졌다. 

 

궁금하신 분은 유튜브 북콘서트 일곱째별의 탈핵 순례 동영상으로 확인하시면 된다. 

 

북콘서트가 끝나고 남은 간식을 좀 챙겼다. 은정이 차로 황분희부위장님과 나를 다시 나아리로 태워주겠다고 했다. 먼저 우체국에 들러 달라고 부탁했다. 우체국에서 제일 큰 종이상자를 사서 36리터 배낭을 담았다. 분홍 다이어리와 일회용 마스크 둘과 양말 두 켤레와 코팅기도문과 헤드 랜턴과 콤팩트도 함께 택배로 부쳤다. 

먼저 집에 가 있으렴. 

 

근처 공익활동지원센터에서 첫 웹자보를 만들어주신 배성희 작가를 깜짝 방문으로 만났다. 주민투표 때 <바보 주막> 주모였던 그이는 지금 공익활동을 하고 있었다. 한데 상반기로 센터 업무가 종료한다고 했다. 현 정권은 많은 공익활동 지원예산을 끊고 있다. 여기저기서 현실로 접한다. 쑥차와 과자를 대접받고 서둘러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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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부터 함께해 온 내 배낭

 

 

오후 4:50 다시 나아리. 

은정은 우리를 내려주고 서둘러 울산에 회의하러 돌아갔다. 황분희 부위원장님이 곤드레밥을 지어주셨다. 아주 맛있어서 두 그릇이나 먹었다. 세수하러 간 욕실 앞 발매트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었다. 

 

I COULD WALK FOREVER IN MY GARDEN I THINK ABOUT YOU

 

아…… 내가 원하는 삶인데…….

 

밤이 되자 어깨 통증이 걱정되었다. 테라플루 나이트타임 한 봉을 뜨거운 물에 풀어 마시고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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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성원전인접지역이주대책위원회 황분희 부위원장님

 

 

<지금쯤 따뜻한 중남미에 있었겠지>

2024년 1월 23일 화요일 도보순례 첫째 날

문무대왕릉에서 양포항까지 21.2km

 

04:58 거센 바람 소리에 잠에서 깼다. 

도보순례를 취소하고 귀가해야 할까 고민이 시작됐다. 날씨는 영하 10도. 집에 강아지 콩이 물이 얼었을 텐데 가서 물을 줘야 하지 않을까. 명분을 찾아보았다. 지도를 보고 또 보고 걷다가 돌아갈 방법을 검색해 보았다. 

 

6:30 다시 잠을 청했다.

 

7:30 일어나 출발할 준비를 했다. 

하의는 스포츠 팬티, 스포츠 내복, 평소 입던 내복, 아웃도어 바지, 발가락 양말, 등산 양말. 상의는 캡 내의, 검정 얇은 폴라티, 검정 후드 아웃도어, 회색 지퍼형 슈트

얇은 배낭엔 면 상하복과 팬티 두 장, 양말 두 켤레, 각종 약품과 간단한 화장품, 수건, 빨랫줄, 텀블러, 몰스킨 수첩, 파카 주머니엔 지갑과 연필과 볼펜과 휴대폰과 카메라와 손수건. 

 

부위원장님이 굴 미역국을 끓여주셔서 밥과 함께 먹었다. 

“다음에 오면 이 집이 아니겠네요. 이 집에서 얼마나 사셨어요?”

“38년 살았지.” 

나아리에 들어와서부터 사신 집을 이제 곧 떠나셔야 한다. 집 앞으로 31번 우회도로가 나면서 천 평에서 480평이 남는다고 하신다. 

 

부군께서 들어오셨다. 

“지금 영하 9도야.”

다행이다. 1도 올라갔다. 

부군께선 지금 집은 동향인데 새로 지을 집은 남향으로 지으실 거라고 하셨다. 잠자코 듣고 계시던 부위원장님이 말씀하셨다.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나중에 조용할 때 와서 우리 둘 사진 좀 찍어줘.”

 

순간적으로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다. 

“네.”

 

내가 부위원장님을 만났을 때는 고희. 그로부터 7년이 지났다. 연세 드신 분이 사진을 원할 땐 딱 한 가지 이유이다. 

 

9:20 마지막 검정 파카를 입고 그 위에 앞에는‘이주만이 살길이다.’뒤에는 ‘월성원전이주대책위원회’라고 쓰인 노란 조끼를 입고, 빵빵한 주황색 얇은 배낭을 메고, 얼굴에 버프를 올리고, 주황 비니를 쓰고 그 위에 핫팩을 주머니에 넣은 검정 아웃도어 옷 후드를 쓰고 파카 후드도 쓴 채 얇은 연분홍 장갑을 끼고 파란 스틱을 집고 떠날 채비를 했다. 현관에서는 욕실 앞 발 매트가 보인다. 

 

I COULD WALK FOREVER IN MY GARDEN I THINK ABOUT YOU

 

인사하고 집을 나섰다. 부위원장님이 문을 여신 채 오래 서 계셨다. 

“잘 가.”

 

정원이 없어도 나는 영원히 걸을 것이다. 그대를 생각하면서.

 

나아리 정류장 안내판도 한국수력원자력(주) 월성원자력본부 제공이었다. 

9:29 나아리 정류장에서 150번 버스에 올랐다. 

 

9:38 봉길터널을 지나 문무대왕릉·봉길해수욕장 정류장에 내렸다. 문무대왕릉 쪽으로 가보았다. 문무대왕은 죽어서도 용이 되어 왜구로부터 신라를 지키겠다고 동해에 묻어달라고 하셨다. 15년 전 와보았을 때는 웅장하던 사적 158호 대왕릉이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5km 아래 핵발전소가 있기 때문이다. 681년의 문무대왕은 1982년에 근처에 핵발전소가 생길 줄 아셨을 리 만무했을 것이다.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던 시절에는 핵발전 같은 건 생각지도 못했을 테니까.

 

걷기 시작했다. 바람이 거셌다. 스틱을 잡은 얇은 장갑으로 시린 바람이 투과되었다. 접었던 파카 소매를 내려 손등을 덮었다. 검정 파카는 선목이 입다 버린 걸 아까워서 내가 입은 지 한 10년쯤 되었다. 2020년 2월 첫 개인 도보순례를 나설 때 입었던 옷이니 이번에 마지막 기념으로 입고 왔다. 언젠가 어디서 담배 불똥이 튀었는지 왼쪽 어깨 아래 조그만 구멍이 나서 오리털이 솔솔 빠지기도 한다. 이젠 그만 입어도 충분히 입은 옷이었다. 

 

도보 시작 지점에 지도를 보며 내내 걱정했던 구간이 있었다. 이틀 전 버스 타고 나아리로 들어갈 때 바다로 이어진 하천을 건너는 다리였다. 어스름한 저녁 무렵이기도 했지만, 그 코너 구간이 유달리 음습했다. 새벽까지도 그 구간 때문에 도보순례를 보류할까 망설였다. 

아래 다섯, 위 다섯 벌 옷을 껴입고, 모자 셋을 겹쳐 쓰고, 배낭 메고 스틱을 쥔 채 힘차게 걸음을 내디뎠다.

기온은 낮았지만, 날은 화창했다. 도로 옆에 붙어 다리까지 왔다. 100m 앞이 지방도 929호선 분기점이었다. 심호흡을 하고 발을 떼는데 놀랍게도 바람이 뒤에서 불었다. 

 

‘됐어. 갈 수 있겠구나.’ 

 

다리 위에 접어드니 왼편 전봇대 사이로 저 멀리 감은사지 삼층석탑 둘이 보였다. 그 탑 주위를 돌던 2020년 7월이 떠올랐다. 생각은 정지해도 마음은 바람이 방향을 바꿀까 봐 몸을 바삐 움직였다. 쌩하고 다리를 벗어나 대본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접어들었다. 밤새 겁내던 큰 고비를 넘겼다. 이제부턴 오른쪽 바닷길을 따라가면 된다. 그런데 왼쪽 찻길과 오른쪽 아래로 내려가는 경사길이 나타났다. ‘어디로 가야 하지?’ 순간 망설였다. 그때 오른쪽에 빨갛고 노란 리본이 보였다. 산티아고 순례길에는 조개 모양이 길잡이가 되지만 해파랑길에서는 빨간 리본이 있다. 오른쪽으로 내려가 보니 커다란 新羅 東海口(신라 동해구) 기념비가 있다. 동해구는 삼국사기 문무왕조에 나와 있는 신라 시대의 지명이라고 한다.

 

대본 3리를 지나 대본 2리에 들어섰는데 왼쪽 발가락이 따가웠다. 정류장 의자에 앉아 양말을 두 켤레 벗어보았다. 발가락에는 박힌 게 없어 양말 발가락 부분을 살펴보니 얇게 접힌 은박지 조각이 나왔다. 

‘이 작은 조각은 발견해서 버리면 발가락이 안 아프지만, 마음의 상처는 원인을 떼어내지도 못하니 얼마나 아픈가.’ 

 

대본 1리 한국원자력연구원을 지나니 감포관광단지가 나왔다. 

10:47 전날 부친 배낭이 집에 도착했다는 문자가 왔다. 빨리도 들어가네. 우체국 만세. 

11시 넘어 나정항 정류장에 들어가 세찬 바람을 피했다. 비로소 의자에 앉아 물 한 모금을 마시고 잠시 쉬는데 문자가 왔다. 니키로부터 날씨가 좀 추운데 수고가 많다고. 마음으로만 함께하니 미안하다고.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된다. 혼자 걸을 작정이었으니까. 잠시 후 엉덩이가 따뜻해졌다. 요즘 정류장엔 별 신기한 기능이 다 있구나. 어쩐지 이름도 따뜻한 나정에서 온기를 받았다. 

 

나정고운모래해변을 지나니 전촌솔밭해변이 나왔다. 장진마을과 거마장마을을 지나니 길가에 폐가가 하나 보였다. 오래된 집을 고쳐 살고 싶다던 기억이 난다. 곧 경주감포우체국이 나왔다. 예전 같으면 우체국을 지나치지 못하고 서성댔을 터이지만 배낭에 관제엽서가 들어있는 큰 수첩은 없다. 초경량이라 허리 벨트도 가슴 벨트도 없어 온 무게를 어깨도 감당해야 하는 배낭. 그 배낭을 메고 온몸으로 매서운 추위를 맞으며 걷는 내게 엽서 따위의 여유를 찾을 시간은 없었다. 그날 내로 숙소를 찾아야 한다. 체력에 맞춰야 하므로 어디에 종착할지 아직 모르는 상태. 바삐 걸음을 옮겼다. 

 

11:50 감포파출소에서 휴대폰으로 지도를 켰다. 

 

12:09 감포공설시장에 다다랐다. 감포쯤에서 점심 할 예상으로 찾아놓은 식당이 있었다. 

(아~ 울산 북 콘서트 때 질문 중 숙식과 간식에 관한 질문이 있어서 이번 순례기에는 그 부분을 자세히 쓰려고 한다.) 

이천식당을 찾아갔다. 인터넷 별점을 보고 갔는데, 가보니 식객 허영만의 백반기행에 출연한 곳이었다. 

 

울산에서 점심 먹을 때 들은 이야기가 있었다. 탈핵 집회를 하면 감포에서 부티 나는 분들이 와서 친 원전 편에서 방해를 한다고. 그래서 그분들과 많이 싸워야 했다고. 

‘이주만이 살길이다’ 노란 조끼를 입고 식당에 들어서면서 약간 겁이 났다. 손님 중 혼자 온 사람은 나뿐. 안내해준 자리에 앉아 옷을 벗고 숨을 돌린다. 만 원짜리 동태찌개 백반 정식을 시켰다. 

텀블러에 정수기 온수를 따르자 초록색 니트 입은 여자가 “우린 물 드세요.”라고 한다. 

“뭘 우리셨는데요?”

“우엉 작두 연근이요”

우엉이랑 연근은 알겠는데 작두는 모른다. (작두콩이었나 보다) 몸에 좋은 거겠지. 생각하면서도 텀블러에 이미 따른 물 때문에 망설이자, 초록색 여자는 정수기 배수구에 따라 버리라고 한다. 시키는 대로 했다. “가실 때도 따라가세요.” 인심 좋은 식당이다. 

밥을 먹기 위해 손을 씻으러 화장실에 갔다. 거울을 보았더니 양 볼이 뻘겋다. 버프를 두 겹이나 했는데도 날카로운 찬바람에 얼굴이 얼었다. 내 몰골을 보니 실상이 느껴졌다. 

식탁으로 와 정식을 받았다. 여덟 가지 정갈한 반찬과 무와 두부가 들어간 칼칼한 동태찌개와 쌀밥. 잘 차려진 백반이었다. 특히 고추장에 조린 반건조 가자미는 정말 맛있었다. 남의 식탁에 안경과 휴대폰를 놓는 옆자리 사람의 무례함도 묵묵히 견딜 수 있었다. 

초록색 여자는 맵시 있게 손님들을 관찰했다. 내게도 필요한 것 있으면 더 드리겠다고 했다. 

찬핵 인구가 많다는 감포라 겁먹었던 나는 이천식당의 따스함에 긴장을 풀었다. 음식을 남기지 않으려고 싹싹 먹었다. 밥을 다 먹고 옷을 주섬주섬 다시 입었다. 초록색 여자가 더 필요한 거 없느냐고 한다. 필요한 거 대신 칭찬을 말했다. 

 

“참 건강하고 씩씩한 좋은 기운을 가지셨어요.”

수초 머뭇거리던 초록은 팔을 벌려 내밀며 말했다.

“가지세요.”

그 이타심에 웃었다. 그리곤 

“여기 도보순례 첫 식당인데 덕분에 앞으로 잘 될 거 같아요.”

“이 추운 데요? 이 동네 추워요. 바닷바람이라.”

“네, 춥네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근데 왜 걸으세요?"

나는 뒤돌아 배낭에 달린 몸자보를 보여주었다. 

 

‘핵발전소 없이 안전하게 살자.’

 

“아아~” 여자가 반응했다. 

계산하고 식당을 나서는데 여자가 다시 당부한다.

“다치지 마세요.~”

“네, 그럼요.”

씩씩하고 건강한 초록이다. 

 

오류2리와 척사 지나 오류해수욕장 야영장에서 잠시 바람을 피해 물 한 모금을 마셨다. 

오르막을 오르는데 일반국도 31번 표지판이 보인다. 그러고 보니 나는 7번 국도가 아닌 31번 국도를 걷고 있었다. 도로 오른 편으로는 분명히 바다가 있는데 바다를 볼 수 없다. 풀빌라 펜션이 그득그득하기 때문이다. 풍경도 독점하는 자본에 불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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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자본이 독점할 바다 풍경

 

 

13:50 모곡마을 지나 한참 전부터 표시가 되어 있는 무인카페에 들어갔다. 따뜻하고 깔끔한 카페에 사람은 없고 자동판매기에서 주문하면 2000원에 연한 아메리카노가 종이컵에 나온다. 사람 상대하기 싫은 사람은 이렇게 카페를 해도 좋겠구나 싶었다. 

바다가 보이는 자리에 앉자마자 전화가 울렸다. 은정이었다. 이날 오후에 함께 걸으려고 했는데 전날 엄마가 입원하셨다고 했다. 

처음부터 이번 도보순례는 혼자 걸을 계획이었다. 그래서 누구와도 함께 걸을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은정은 내가 울산까지 왔고 멀지 않은 곳에서 걸으니 함께해야 한다고 생각했나 보다. 은정이 못 와도 괜찮았다. 하지만 다시금 도보순례가 복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무 일 없어야 걸을 수 있으니. 

카페 안은 훈훈한데 밖은 낮인데도 영하 3도. 25분을 푹 쉬고 다시 장비를 챙기는데 어라, 찢어진 장갑이 확 찢어져 버렸다. 가뜩이나 시린 손이 더 시리겠구먼. 

 

14:15 다시 출발. 하도 추워 경주에서 잘지 포항에서 잘지 망설이던 참이었다. 그런데 인터넷 지도에서 봤던 펜션은 문이 닫혔다. 평일 비수기라 예약하지 않으면 영업하지 않는 곳이 많았다. 

 

14:45 해맞이 고장 포항시에 들어섰다. 기분이 좋았다. 이젠 바다를 좀 볼 수 있으려나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장기면 두원리에 들어서니 주유소 뒤편에 풍력발전기가 보인다. 석유에너지와 풍력, 뭔가 혼합된 듯 더 나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듯 기분이 좋아졌다. 

호미반도해안둘레길 이정표가 나오자 곧 동백꽃 작은 봉오리를 보았다. 이 겨울이 곧 지나갈 것이다. 

 

이어 계원리에 설립 110주년이 되었다는 교회가 우뚝 서 있었다. 문득 기도해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몇 계단을 올라가 유리문을 잡아당겼다. 잠겨있었다. 

‘그러면 그렇지. 어쩌다 가봐도 잠겨있는 교회. 그럼 기도는 어디 가서 하나? 그런 교회에 등록하겠다고 하면 펄쩍 좋아하겠지.’

속으로 구시렁대며 걸었다. 푸른 바다가 겨우 보였다. 굽이굽이 내리막길을 가니 양포항이 나타났다. 

 

15:33 양포리(良浦里) 도착. 오후에도 마을에 아늑하고 따뜻하게 볕이 잘 들어 볕 양(陽)인 줄 알았는데 어질 량(良)이었다. 세 시가 훌쩍 넘었으므로 이곳에서 잠을 자야 한다. 저녁밥도 먹어야 한다. 

멀리 백숙 간판 뒤로 큰 여관건물이 보였다. 삼계탕은 좋아하는 음식이지만 좀 더 가보았다. 마을 끄트머리쯤에 별점이 많은 여관이 웹 지도에 있었다. 가파른 돌산 아래 그 여관은 폐업이었다. 다시 800미터쯤 돌아가려고 돌아서 걷다가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표시가 있는 굴뚝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울산 북콘서트가 끝난 후 한 분이 다가와 말해주었다. 내 브런치 글 금방 읽었는데 최근 살이 갑자기 빠지고 있으니 욕조나 탕 목욕을 하면 좋다고. 이미 다리는 아팠지만 다시 걸어가 보았다. 그곳은 구룡포 수협 장기지점과 함께 있는 ‘어업인 복지회관’인데 목욕탕과 여관을 겸하고 있었다. 

“방 있어요?”

“네.”

“얼마예요?”

“5만 원인데 방 하나 남았어요.”

현금으로 하면 좀 깎아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몇 년의 도보순례로 이 정도 거래는 할 줄 안다. 깎아준 적 없다면서 깎아주기도 한다. 게다가 숙박을 하면 목욕이 공짜란다. 

 

15:54 302호에 입실하자마자 이 동네는 일찍 문 닫는다고 빨리 밥 먹고 목욕하라고 해서 후딱 짐을 챙겨 나갔다.

 

16:10 여관에서 마주 보이는 <태원생아구>집에 들어갔다. 깨끗해서 개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집 같았다. 탕 전문식당이라 1인분으로 시킬 게 별로 없어서 2만 원짜리 아구탕을 시켰다. 내가 좋아하는 노란 호박죽이 애피타이저로 나왔다. 깔끔한 일곱 가지 반찬에 탕은 양이 많았지만 거의 다 먹었다. 다음 날 아침 몫까지. 

 

17:00 얼마 만에 공중목욕탕인지 모른다. 시골에선 집이 추우니 공중목욕탕을 이용하나 보다. 탈의실에 옷과 신발들이 진열돼 있다. 장사도 함께하나 보다. 샤워하고 예전에 알았던 상식으로 고온탕과 저온탕을 일곱 번 들락날락했다. 첫날 근육통을 이렇게 풀어주다니 감사할 따름이다. 

 

18시. 다시 302호

창문으로 보이는 청보랏빛 하늘을 확인하고 빨랫줄에 속옷과 버프를 널었다. 밤이 되자 테라플루 나이트타임 한 봉을 뜨거운 물에 타서 마시고 찢어진 장갑을 꿰맸다. 침대에 덮인 푸르스름한 바탕에 분홍이 섞인 이불이 어디서 많이 보던 무늬와 빛깔이다. 내 수영복이었다. 

 

지금쯤 따뜻한 중앙아메리카에 가 있었겠지. 

 

이 문장이 이번 도보순례 첫 문장으로 내내 생각해 두던 것이었다.

그곳에 가려고 수영복을 세 벌이나 준비해 두었었다. 수영강습 때 입던 선수용 원피스 반바지 수영복, 캄보디아 호텔 수영장에서 마지막으로 입었던 민트색에 자잘한 빨간 꽃무늬가 섞인 쓰리피스 수영복, 둘 다 입은 지 십 년은 된다. 그리고 작년에 선물 받은 형광 주황색 래시가드 상의와 그에 맞춰 산 감청색 핫팬츠. 그것들을 번갈아 입으며 해변에서 수영하고 일광욕하려고 했었다. 

보름간 일교차로 겹쳐 입을 여름옷들을 눈으로 챙겨두었다. 그 많은 옷을 배낭에 다 넣어갈 수 있을까. 보름 일정이 끝나면 근처 다른 나라로 넘어가 걸어볼까. 내 자전거 브랜드와 같은 이름의 호수에 가볼까. 꿈에 부풀어있었다. 그 정도는 멀리 가야 한국에서의 모든 일을 잊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일 년 동안 알뜰살뜰 부어서 곧 만기 될 적금과 다큐멘터리 제작비를 받으면 여비로 충분했다. 인연을 정리하는 데 연봉을 쏟아부어도 아깝지 않았다. 나는 치유 받고 싶었고 새로운 삶을 살고 싶었다. 

 

모르는 이로부터 그 단체 여행 이메일이 왔던 작년 11월 중순.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을 지경으로 절망의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었다. 숙고 끝에 달이 바뀌어 참가하고 싶다는 이메일을 보내자마자 합격이 되었다. 비행기 표를 알아보면서, 계약금을 보내려고 하루하루 기다렸다. 일주일 후에 다시 이메일을 보내고 총 보름을 기다려도 연락이 오질 않았다. 

그 사이 2학기 종강과 계절학기 사이에 가려던 도보순례를 연기했다. 보름 후 연락이 왔을 때는 이미 울산 북콘서트 일정이 잡힌 상태였다. 주요한 건 타이밍이다. 

 

따뜻함을 정말 좋아하고 추위를 극도로 싫어하는 나는 여름인 중앙아메리카 대신 영하 9도의 대한민국 경주 문무대왕릉 봉길해수욕장부터 포항 양포항까지 순례 첫날 21.2km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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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미반도해안둘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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