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 지음 | 2023 | 산지니
'여장군' 호칭을 가진 유일한 독립운동가. 이 책을 여는 글은 이렇게 시작한다. 매우 인상적이다.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여장군'이라 불린 인물이 있었던가? 김명시(金命時)는 역사책을 즐겨 읽던 내가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이름이다. 여성 독립운동가라면 감옥 속에서도 만세를 불렀던 유관순이 생각난다. 곽낙원과 김마리아도 교과서를 통해 배운 적이 있다. 이들은 모두 엄혹한 일제강점기에 갖은 고초를 견디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분들이다.
모든 독립운동가가 특별하지만, 김명시는 더 특별하다. 김명시의 삶에서 특기할 만한 행적을 간략히 적어보자. 김명시는 1907년에 마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3·1 만세운동으로 희생당했다(사망 시기는 불확실함). 1925년에 배화공립고등여학교를 잠깐 다니다 중퇴했다. 같은 해에 조선공산당, 고려공산청년회에 가입했고, 모스크바에 있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했다. 1927년에 상해 조선공산당 재건에 참여했고, 1928년에 대만공산당 결당대회에 여운형과 함께 참석했다. 1930년에 '하얼빈 일본영사관 습격 사건'을 주도했고, 만주를 순회하며 조선공산당 조직을 점검했다. 1932년에 국내에 들어와 인천의 여러 공장에서 여성 노동자 조직을 시도했다. 같은 해 신의주로 피신하던 중에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신의주형무소에서 고문으로 임신 중이던 태아를 유산했다. 김명시는 7년 간 옥살이를 하고 1939년에 풀려났다. 출소 후 중국으로 가서 1941년까지 중국공산당 팔로군에 합류하여 천진, 제남, 북경 등지에서 활동했다. 1942년부터 1945년까지는 중국 화북지역에서 김무정, 김원봉 등과 함께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을 창립하고, 적지에서 첩보활동과 선전공작을 펼쳤다. 이때 김명시는 장군으로 불렸다.
1945년 8월에 해방이 되자, 김명시는 동료들과 함께 12월에 무장을 해제하고 개인자격으로 귀국했다. 조선의용군에서 같이 활동하던 인사들이 대부분 평양에 체류했으나 김명시는 서울로 들어왔다. 김명시는 조선부녀동맹 결성대회에 참석하여 연설을 했고, 서울 단성사에서 연극 <호접>(1941년 일본군에 맞서 싸운 조선의용군의 호가장 전투를 김사량 작가가 연극으로 만들어 공연함)을 관람한 후 백마를 타고 종로를 행진했다. 그 후 1947년까지 각종 행사에서 연설을 하고 단체의 대표를 맡았다.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소련대표단 환영행사에 참여했고, 안재홍 민정장관과 하지 중장을 방문하여 우익단체의 테러를 항의했다. 1947년 7월에 여운형이 암살되고 김명시는 잠적했다. 김명시는 1949년에 검거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유치장에서 사망했다.
일제강점기에 김명시는 언론에 여러 차례 보도되었다.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인 『매일신보』(1932.8.29.)에는 '공산대학출신(共産大學出身)으로 반제동맹(反帝同盟) 부인부장(婦人部長) 밀사로 들어왔다 피체, 김명시(金命時)의 내력(來歷)'이라는 제목으로 "국내 국외 수만 리를 여자의 몸으로 비거비래(飛去飛來)하면서 이 사건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 실행하던 홍일점 김명시는 어떠한 여자인가?"라는 내용의 기사가 있다. 『조선일보』(1932.12.13.)와 『동아일보』(1933.2.2.)는 김명시가 옥중에서 유산하여 생명이 위독하다는 내용을 보도했다. 『조선일보』(1933.9.26.)와 『동아일보』는 김명시의 재판 장면을 보도했다. 그 후 『조선중앙일보』(1933.11.17.)와 『매일신보』는 공개 금지 상태에서 김명시 등 7명을 분리하여 공판 심리한 사실을 보도했다.
해방 후에는 훨씬 더 많이 보도되었다. 1945년 12월에 김명시가 서울로 내려올 때, 『중앙신문』,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모든 언론이 '김명시 여장군'보도했다. 기사제목은 '일군하(日軍下)에 비밀활약 - 독립동맹의 여장군 김명시 여사담', '조선의 잔다르크, 현대의 부랑인 연안에서 온 김명시 여장군담' 등이었다. 각종 행사장에서 연설을 한 것도 언론에 지속적으로 보도되었다. 시인 노천명은 종합잡지인 『신천지』(1946년 3월호)에 "팔로군에 종군했던 김명시 여장군의 반생기(半生記)"를 실었다.
김명시는 극심한 이념대립으로 테러가 일어나고 경찰의 검거가 이어지면서 쫓기는 몸이 되었다. 김명시는 1949년 10월에 유치장에서 사망했는데, 당시 내무부 장관은 자살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김명시의 독립유공 포상을 위해 헌신적으로 활동한 <열린사회희망연대>(상임고문 김영만) 동지들과 이 책의 저자(이춘)는 당시 내무부 장관이 발표한 '자살'을 믿지 않는다. 일제강점기 동안 일본경찰로 활약하던 이들이 해방 후 김명시가 검거되던 당시에 그대로 한국의 경찰이 되었기 때문이다.
국가보훈처는 2022년에 김명시 장군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김명시가 독립유공자로 인정되기까지의 지난한 과정은 이 책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김명시의 생애를 읽으면서 곳곳에서 비애, 감동, 분노, 허탈을 느낀다. 김명시의 위대한 삶 속에는 역사의 아픔이 절절이 배어 있다. 이념은 유령이 되어 사람들의 마음을 휘젓는다. 이념 대립의 긴장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슬픈 역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