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속예배의 비전을 갖고 선교하는 목회자
- 김지목 조합원
김지목 목사님은 현재 향린교회에서 시무하고 계신다. 촛불교회와 기장 총회본부에서 생태공동체운동 일을 하며 일찍이 사회선교에 관심을 갖고 에큐메니칼 활동에 힘써 왔다. 특히 각 개인이 생활에서 생태운동을 통하여 집단 각성한다면 생명운동의 완성이라고 강조한다. 목사님은 또한 풍물놀이에 대한 열정으로 목회와 연결시키려는 실험적인 예배를 시도하기도 했다. 언젠가는 '민속예배'로 선교의 꿈이 제대로 펼쳐지기를 소망하고 있다. 향린교회에서 대담을 하던 날은 온종일 함박눈이 오락가락하였다.
Q : 길목 조합원이 되었어요. 환영합니다.
자연스럽게 길목 사회적 협동조합의 조합원이 되었습니다. 오래전부터 길목의 존재와 활동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만 이제야 가입하게 되었습니다.
길목 조합이 향린 60주년을 맞이하면서 발족되었고, 그 이후 교회와 분리, 독립하여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교회와 연관된 부분이 없지는 않지요. 어떤 일정은 길목과 호흡을 같이 맞춰야 되는 부분도 있어 자연스레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길목에 참여할까 생각해 오다가 바쁜 일정 때문에 놓치곤 했습니다. 이번 향린이 새로 광화문으로 이전하기도 했고 마침 길목에 대하여 리마인드 시켜주시는 분들도 있고 해서 가입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12월 창립 10주년 모임 때 참석하였어요. 낯설기도 하고 아는 얼굴들이 보여서 익숙하기도 했어요. 세미나 등 여러 프로그램에 관심이 가고, 공감편지의 좋은 글들을 이메일로 받아보고 있습니다. '심심상담'과 '도시락 싸들고'의 사업은 현장을 찾아 고난 받는 이들과 함께하여 관심을 갖고 있는데 잘 진행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Q : 현재 향린교회에서 부목사로 목회를 하고 계십니다.
향린의 장점 중의 하나는 교인들이 자유스럽게 소통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사회의 이슈들을 그대로 교회 안에서 발언할 수 있는 곳은 일부인데, 향린의 열린 자세와 환경은 성숙하다고 하겠습니다. 대리당회장의 일을 하면서 교회의 여러 사안을 준비하고 처리해야 하는 데 있어 신경을 써야 합니다. 더 치밀하고 더 전문적으로 처리해야 할 그런 문제들이 있는 거지요. 교회마다 문제없는 곳은 없습니다. 당회를 잘 꾸려나가야 하는 심적인 부담감이 없지 않지만 선을 이루어가는 목회과정이라 봅니다.
Q : 신앙의 성장과정을 통하여 여기까지 왔을 텐데요.
저희 집안은 목사가 많습니다. 저희 아버님이 일단 목사이시고, 이젠 은퇴를 하셨지만요. 일찍 돌아가신 작은 아버지도 목사셨고요, 그분 아드님, 제 사촌도 목사이고요, 제가 삼형제인데요, 다 목사입니다. 고모님 쪽의 사촌도 목사이지요. 그러니까 이리 봐도 목사, 저리 봐도 목사인 가족의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이런 환경이 특별하지도 않게 당연하게 받아들여졌고요, 나도 언젠가는 또 목사가 되어야 하나보다 라고 여겼지요.
Q : 그러다 목사로서 자아정립을 하게 된 것은 언제부터일까요.
아버지처럼 당연히 목사가 되어야 하는구나, 라고 여기며 신학대학에 가게 되었지요. 그러다 사춘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살짝 나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지 뒤돌아보게 된 거지요. 이제까지는 문제의식이나 비판의식 없이 당연하게 살아왔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살았구나, 그냥 흘러오는 대로 살았구나. 만족하고 있는가, 이게 맞나" 이런저런 고민이지요. 대학교 2학년 무렵이었던 거 같습니다. 당연하게만 여겨왔던 나와 내 주변에 대해서 문제의식, 비판의식을 갖고 비틀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역시 잘 지내왔구나 라는 결론을 냈어요. 늦지는 않았다고 생각했습니다.
Q : 집안의 환경이 진로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봐야겠군요.
특히 아버님의 영향이 컸습니다. 아버님은 교단의 선교 일을 열심히 하셨어요. 사회선교에 힘쓰셨습니다. 교단 기장 총회 교회와 사회위원회 위원장도 하셨고요. 늘 사람들을 모으고 조직하고 이슈를 만들곤 하셨습니다. 교단차원에서도 그런 역할을 하셨어요. 의정부 쪽에서 목회를 하셨는데 그쪽은 보수성향이 강한 곳입니다. 최루탄이 터지게 되면 으레 아버님이 관련하는 사건일 정도였습니다. 그 모습을 봐 오면서 신학대학에서 저도 학생운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90년대 중반에 학교에 다녔는데요. 학교에서 풍물놀이패에 들어갔습니다. 전부터 꼭 풍물을 배우고 싶었거든요. 나름 대학에 들어가면 꼭 세 가지는 해야겠다는 계획이 있었어요. 하나는 학생운동이고, 풍물패동아리를 하고 싶었고 농활을 가는 거였습니다.
Q : 그 당시 학생운동의 이슈는 무엇이었나요.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한총련'이라고 불렀지요. 96년도 8월 광복절에 즈음하여 '8.15 범민족 대회 및 범청학련 통일대축전' 남측행사를 연세대에서 개최하다 경찰과 충돌하며 사태가 벌어졌잖아요. 그리고 97년도 김영삼정부 때, 대통령아들과 관련된 대선자금 사건도 있었지요. 그때 동아리연합회장을 했는데 당연직으로 한총련 대의원을 맡게끔 되었습니다. 아버님은 "네가 나서서 해야지 누가 하냐"라는 반응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수배생활을 하는 처지가 되었어요. 거의 10개월 정도 학교에서 친구들의 보호를 받으면서 지내기도 하고 방학되면 다른 곳으로 피신해 있었습니다. 이때 아버님께서 적극 나서서 "한총련 학부모협의회"를 결성했습니다. 수배로 쫓기고, 감옥 가고 이런 학생들을 돕고 보호하고, 자진출두해서 조사를 잘 받을 수 있게 도와주기도 하였습니다. 졸업을 하고 학생운동으로 인하여 딱지가 붙어 취업 등 사회활동을 하는 데 있어 어떤 불이익도 받으면 안 된다는 입장이었고 취지였습니다.
Q : 이제 비로소 목회자가 되었고 목회활동을 펼치게 되었습니다.
대학원 공부를 시작하자마자 군대부터 갔어요. 전역을 하고는 다시 대학원수업을 받으며 교육전도사 생활을 시작했지요. 안양중앙교회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다 졸업하고 들꽃향린교회에 잠깐 있었습니다. 총회교육원 출판부에서 교단 교육교재를 만드는 일도 했고요. 그러다 독일 함부르크에 갔습니다. 2006년이었어요. 독일 월드컵 할 때였는데요, 독일 한인교인들과 같이 축구응원도 하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교인들께 마당극 지도도 하고 풍물도 가르치고요. 독일 한인교회에서 한국전통문화를 접할 수 있게 해주는 그런 목회자를 원했어요. 한 일 년을 재밌게 활동했습니다.
2007년에 한국에 돌아와서 다시 들꽃향린교회에서 부교역자로 일했습니다. 들꽃향린교회에서 처음 설교 준비하는데 너무 부담이 돼서 일주일 내내 끙끙거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설교 후 김경호목사님께서 같이 라면을 먹자고 하시더니 "내가 설교 평가해 줄게", 이러시는 겁니다. 격려해 주시는 거였지요. "설교는 글이 아니야, 글이 아니고 말이야, 원고 읽듯이 하면 안 돼" 근데 아직도 잘 안됩니다. 지금도 못 고치는 것 중에 하나가 교인들에게 이야기하듯 해야 하는데 원고가 없으면 한마디도 잘 못하겠어요.
Q : 목사님께서 펼쳐 보이고 싶은 목회 방향이나 구상이 있겠지요.
고등학교 때 풍물놀이 공연을 접했지요. 굉장히 인상 깊었고 그때 꽂혔습니다. 그 후 이건 내가 해야겠네. 대학 가게 되면 꼭 한 번 접해봐야겠다. 자연히 풍물놀이 동아리 활동을 하게 됐어요. 목회에 뜻을 두며 목사도 해야 되고 풍물도 계속 놓지 않고 싶고, 접점이 없을까를 생각하게 되었어요. 둘 다 할 수 있는 건 '민속예배'였어요. 다분히 실험적인 예배지요. 그러기 위해 많은 활동을 하고 시도해 보았습니다.
향린의 국악예배가 있지만 국악은 음률 악기를 가지고 드리는 예배라면 민속예배는 풍물에 녹아있는 문화, 즉 민초들의 삶의 문화를 예배로 반영시키는 것입니다. 작업이 아주 크지요. 국악이 음악예배로 본다면 이쪽은 문화예배라 볼 수 있습니다. 풍물놀이가 이제 도시화되기도 하고 현대화되면서 결국에는 사물놀이를 예배에 접목시키는 것도 일종의 음악예배가 되더라고요. 실험예배가 되었고 좀 더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이 과제로 박사학위에 들어갔습니다. 결국 이것으로 논문을 썼고 학위를 받았습니다. 내용 중에는 민속예배의 근간이 되는 것들을 나열하고 모델 제시도 합니다. 말하자면 처음 풍물을 치고 들어오며 땅 밟기, 길놀이를 하고 소리를 내면서 정화의식에 들어가지요. 큰 소리로 악을 쫒는다는 거지요. 그런 의미를 담고 이제 징을 치며 예배부름을 합니다. 징 소리가 굉장히 매력적이잖아요 우리의 순수악기라 할 수 있어요. 삼위일체 임재를 기원하고 나서 비나리를 시작하는데 " 은혜 주신 하나님, 사랑 주신 예수님 오늘 이 자리에 모여 민속예배를 드리오니 우리 정성 받으시고 우리 기도 들으소서" 이건 황해도 무굿 양식인데요. 원래는 이런 겁니다. " 서산 낙조 지는 해는 내일 아침에 다시 돋고 월출동녘에 뜨는 달은 오늘 밤에 보련만은 인생이라 하는 것은 청춘 가고 백발 오니 회생할 길이 가이없네"
비나리는 지방마다 곡조가 다른 데 이것을 차용하여 가사를 바꿔 기독교 예배형식으로 재구성합니다. 마당에서 펼쳐지는 것인데 도심에서는 어렵지요. 예배시간도 형편상 1시간 안에 끝내야 하고, 그래서 순서의 짜임새 분배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예배 보는 분들도 자연스레 참여하게 되지요. 설교는 사설처럼 판소리조로 합니다. 국악찬송 멜로디에다 가사를 바꿔서 부르기도 하지요. 시편을 우리 식으로 곡조를 실어, 주고받기식으로 합니다. 예배 보는 교인들이 '진도아리랑 '후렴도 해 주지요. 강강술래도 하고요. 아무튼 레퍼토리가 한 여섯 가지 정도 됩니다. 1~2시간은 뚝딱 가지요.
풍물 선생님하고 저희 몇이 '예굿'이라 하는 팀을 꾸렸어요. '예수와 굿'이라는 의미이지요. 개발을 한 것입니다. 목회를 꿈꾸면서 예배연구소를 차리고 1인연구소지만요 하하.. 교회 초청이 있으면 가서 예배드리고, 이걸 더 확장해야겠다고 펼칠 무렵, 총회본부로 가게 되고 실무자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이 계획은 접어둔 상태가 되었지요. 그때는 잠도 못 자면서 얼마나 재미있을까 하며 신이 나서 준비했는데 이제는 거의 다 잊어 먹을 정도입니다. 이제 어떻게 다시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Q : 에큐메니칼 활동을 언급했는데 어떤 활동들을 해왔습니까?
주로 촛불교회 일을 했습니다. 2009년에 촛불교회가 시작되었는데요. 실무를 봐줄 사람이 필요하다 해서 한 7년 정도 일했어요. 그러다 총회본부에 자리가 나서 총회본부 일을 하게 되었고요. 총회본부의 정의 평화 선교부 업무였습니다. 일이 즐거웠습니다. 총회본부는 상임위원회 결정사항을 잘 집행해야 하는 기구잖아요. 더 전문적으로 집행하기 위해 두 개의 운동체를 만들었는데 하나가 생태공동체운동본부, 다른 하나는 평화공동체운동본부입니다. 우리 교단에서 이 두 운동을 지속적으로 해야 해서 생태공동체운동본부의 사무국장을 맡았었고 지금은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습니다. 이 두 운동은 장기적으로 계속해야 하는 것 들입니다. 향린이 교회도 새로 잘 지었으니까 이 건물을 통하여 생태적인 활동에 더 힘썼으면 좋겠습니다. 생활문화운동을 통하여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인적인 변화가 있었으면 합니다. 결과적으로 사람들의 각성이 운동의 완성이라 할 것입니다. 함석헌 선생께서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나라가 산다'라는 말씀이 있었지요. 집단각성이 핵심입니다. 학생운동이 깃발을 들고 선도하며 알리고 외치면 사람들이 따라오듯이 교회를 통하여 그런 각성운동이 꼭 필요하겠다는 생각입니다.
Q : 목회를 떠나 생활인으로서의 모습은 어떤지요?
지금은 생활이 거의 교회, 집, 교회 이런 상황입니다. 옛날 기억이 있으니까 만약에 저한테 와서 "몇 월 며칠 우리에게 '민속예배' 같이 드려줘요" 이런 의뢰가 들어온다면 다시 섭외하여 팀을 꾸려서 신명나는 예배를 드리고 싶습니다. 향린에서 해 보고 싶지만 도심교회 특성상, 주위 주민들도 그렇고, 실현이 좀 어려울 것도 같습니다. 장구, 꽹과리, 북에 이어 올해는 피리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아버님께서 서예를 오랫동안 해오시며 대한민국 미술대전의 초대작가가 되셨어요. 그래서 저도 아버님께 글씨를 좀 배워야겠다라고 생각해 조금씩 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