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째별78

길뜬별 | 7번 국도 완주 순례길 2

길뜬별 : 7번 국도 완주 순례길 2

 

 

<아홉 마리 용을 타고 날아가고 싶어>

2024년 1월 24일 수요일 도보순례 둘째 날

양포항에서 구룡포항까지 16.2km

 

새벽 다섯 시에 눈이 떠졌다. 전기패널이 꺼져있었다. 침대가 아닌 바닥에 요를 깔고 얇은 이불을 덮고 잤다. 외풍이 세서 앉아있으면 어깨와 등이 시리다. 여섯 시 오십 분에 다시 잤다가 아침에 일어나 양치와 세수하고 스트레칭. 아침 식사로 따뜻한 물에 소형 포장된 에이스 한 봉과 플랑 과자. 홍삼액, 홍삼단, 비타민 C를 먹는다. 텀블러에 정수기 온수를 받아 전날 황분희 부위원장님이 주신 생강 원액을 섞는다. 전날 마셔보니 맹물보다 목 넘김이 훨씬 좋았다. 

 

9:40 출발. 

시작부터 오른쪽 아킬레스건이 아프다. 전날부터 그랬다. 참고 걷는다. 

 

10시 신창2리 창바우마을이란 곳에 다다랐는데 바다가 매우 예뻤다. 처음 보는 동해처럼. 풀빌라로 가려진 바다만 보다가 수평선이 보이게 쫙 펼쳐진 바다를 본 게 얼마 만인가. 알려지지 않았으면 좋겠는, 그런 깨끗한 곳이었다. 풍경이 좋아서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돌로 쌓아놓은 둑에 앉아 바다와 파도를 보았다. 

 

신창1리 지나 죽하를 지나 영암3리를 지나 대진리에 들어섰다. 도로 옆으론 덤프트럭이 쌩쌩 지나는데 식당을 찾아 바득바득 걸었다. 아침 식사도 과자로 때웠으니 배가 고팠다. 하지만 인터넷 정보를 보고 찾아간 칼국숫집은 영업을 안 했다. 두 시간 만에 갑자기 허기와 피로가 몰려왔다. 비실비실 모포2리와 1리를 지나 구룡포읍으로 고개를 넘어 올랐다. 

 

정오가 조금 지나 구룡포휴게소에 소머리국밥을 시켰다. 시뻘겋게 언 얼굴로 뜨거운 국물에 밥을 조금씩 말아 먹는 나를 보더니 여주인이 말을 건넨다.

“필요한 거 있으면 더 드릴게요.”

여자 혼자 걸어 다니는 건 이목을 끈다. 

“커피 드시고 몸 녹이고 가세요.”

고맙다. 어제오늘 좋은 식당을 만난다. 

“차도 안 다녀요. 너무 추워서.”

 

밥을 다 먹고 ‘이주만이 살길이다’ 노란 조끼를 입자 주인이 말한다.

“아~ 그 옷이 보호가 되겠네요. 여자 혼자 다니면 아무래도 위험하잖아요.”

‘그렇구나. 이 옷을 입고 다니는 게 쉽지 않은데, 이 옷이 오히려 나를 보호해 주는구나.’ 

 

성동리, 구평리 지나 장길리 정자에서 잠시 쉬며 물을 마셨다. 강으로 통하는 하천도 얼어붙은 겨울 오후에 초록 푸른 노란색이 섞인 바다는 새하얀 포말을 얹고 출렁인다.

 

하정리에서 내내 고민하던 지점이 나왔다. 포항과 구룡포로 나뉘는 갈래 길이었다. 7번 국도 순례라면 굳이 해파랑길로 빙빙 돌아갈 필요가 없다. 게다가 자전거길은 꼬불꼬불 돌아 길이가 더 늘어난다. 포항으로 가는 직선 도로로 간다면 여정을 이틀은 줄일 수 있다. 

 

구룡포 길을 택했다. 살모사 바위를 지나 병포리를 통해 간 구룡포는 번화했다. 전통시장도 규모가 컸고 오가는 사람도 차도 많고 도로도 넓었다. 거리로 따지면 이날 삼정 해수욕장까지 가도 됐다. 그런데 이날 구룡포항에 머물 작정이었다. 인터넷으로 봐 둔 숙소가 있기 때문이었다. 오후 세 시밖에 안 됐는데 도착 지점이 가까워져 오니 기운이 빠지고 다리도 아프고 손도 아팠다. 스틱의 플라스틱 손잡이가 땅 짚는 충격을 퉁퉁 고스란히 손으로 전달해 엄지와 검지 사이 혈관이 부어올랐다. 

 

택시 타는 곳을 지났다. 그런데 몇 발자국 가다 다시 돌아갔다. 할머니 한 분이 그 추운 날에 땅바닥에서 귤을 팔고 계셨다.

“할머니, 그 귤 얼마예요?”

“만 원에 이거 다 드릴게.”

몇 개만 사려고 했었다. 무게가 나가는 건 짐이고 혼자 귤을 몇 개나 먹을 수 있겠나. 그런데 할머니가 상자에 깔린 귤을 검은 비닐에 다 담으신다. 다 팔고 집에 가시겠다고. 얼핏 봐도 스무 개 남짓이다. 말리지 못하고 만 원짜리 한 장을 건넸다. 스틱 들고 꽤 무거운 비닐봉투까지 드니 기운이 부쳤다.

 

항구 맨 끝에 있는 호텔에는 예약하지 않았어도 자리가 있었다. 프런트의 남자에게 귤을 드려도 되느냐고 묻고는 다섯 개를 드렸다. 배정받은 이 층 방문을 열자마자 “와-” 탄성이 나왔다. 전면 통창으로 테트라포드와 바다가 보였고 완벽한 미니멀리즘 생활이 가능할 듯 깔끔했다. 

 

이틀째 내의는 물론 목폴라까지 땀으로 흠뻑 젖었다. 샤워하고 속옷, 양말, 버프, 두꺼운 내의와 목폴라까지 싹 세탁했다. 머리를 말리고 침대 시트 위에 누웠더니 서쪽 창끝에서 얼마 남지 않은 햇빛이 강렬하게 비추었다. 고된 도보 후의 쾌적함을 이루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밥은 먹어야 해서 외출했다. 아직 해가 남아있어 구룡포 일본인 가옥거리에 가보았다. 

구룡포는 세 번째다. 2012년 겨울 ebs <한국기행> 7번 국도 때 답사하러, 2020년 여름 나아리에서 도보 순례하러 삼척으로 가던 길에 밥 먹으러, 그리고 이번. 그런데 근대가옥거리에 있는 계단을 올라가 본 기억이 없다. 그래서 양옆으로 돌기둥이 서 있는 그 계단을 올라갔다. 왼쪽 61, 오른쪽 59개의 그 돌기둥은 1944년에 세워졌는데 구룡포항을 조성하는 데 기여한 일본인의 이름이 새겨졌었다고 한다. 다음 해 패전으로 일본인이 떠나자 주민들을 이름에 시멘트를 바르고 돌기둥을 거꾸로 돌려세웠단다. 그런데 그 위에 충혼각을 세우면서 후원자의 이름을 다시 돌려세운 돌기둥에 새겼다고 한다. 계단을 올라갔다. 구룡포라 아홉 마리 용이 있었다. 龍용의 승천-새빛 구룡포. 마침 용과 용 사이로 해가 지고 있었다. 

 

계단을 내려와 근대가옥거리로 들어갔다. 모리국수 전문점 할머니 본가가 있었다. 모리국수가 뭔지 먹어보고 싶었는데 2인분만 된다고 한다. 1인분 시킬 수 있는 메뉴는 두 가지뿐. 그 중 홍게라면을 주문했다. 도보순례에 라면이라니 부실했지만, 홍게를 믿어보기로 했다. 잠시 후 할머니가 홍게라면을 가져오셨다. 그러더니 홍게를 가져가 먹기 편하게 싹 발라오셨다. 이번 순례에선 친절한 식당 주인만 만나서 좋았다. 

“혼자 여행 오셨어요?”

“네.” 

여행이든 순례든 만 천 원짜리 라면을 다 먹어보다니. 하지만 항구에서 홍게 한 마리 먹어보는 것도 좋았다. 라면이 홍게를 만나 호강하네. 

식후에 골목을 다시 걸어 나오는데 동백서점이 보여서 들어가 보려고 했더니 출입문은 까멜리아에 있었다. 카페와 문구 선물 가게가 연결돼 있는데 온통 동백투성이다. 나는 그 드라마를 안 봐서 무슨 내용인지 몰랐다. 나중에 호텔에 돌아와 찾아본 드라마 최종회를 보고서야 구룡포가 왜 동백꽃투성이인지 알 수 있었다. 

 

양포항에서 구룡포항까지 꽁꽁 언 길을 16.2km를 걸어와 잠이 푹 들었다. 

또 꿈을 꾸었다. 

 

*

새벽이면 

아홉 마리의 순금빛 용이

인간의 마을과 바다를 껴안고 날아오르는 것을 보았다

 

곽재구 시 <와온 바다> 마지막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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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창2리 그 소나무

 

 

<고독은 아무나 하나>

2024년 1월 25일 목요일 도보순례 셋째 날

구룡포에서 흥환간이까지 24km

 

새벽에 오른 엄지발가락이 쑤셔서 깼다. 엄마가 밤에 손톱 깎으면 고양이가 먹고 똑같은 사람이 돼서 온다고 깎지 말라고 하셨는데, 발톱이 빠질까 봐 전날 밤에 짧게 깎은 것이 염증이 되려나 보다. 황급히 마데카솔을 발랐다. 다시 자고 일어났더니 다행히도 통증이 없어졌다. 걱정도 사라졌다. 몸뚱이밖에 믿을 게 없는 도보순례에서는 몸의 감각에 아주 예민해진다. 

 

해가 뜰 때쯤의 하늘은 연노랑 위에 연푸름 빛으로 변한다. 맞은편 건물이 주황색으로 빛 반사하는 것으로 동쪽 어딘가에 해가 떴음을 안다. 비로소 갈매기가 난다. 영하 7℃. 이틀째 갈매기도 웅크리고 앉아있던 혹한. 

 

전날 사다 놓은 황태국밥에 뜨거운 물을 부었다. 전자레인지 없어도 오래 두니 먹을 만했다. 밥을 먹으며 바다의 테트라포드를 바라보는데 까만 새 한 마리가 바닷물이 차올라도 가만히 있다. 의연한 까만 새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나흘 만에 아침 샤워를 했다. 그만큼 실내가 따뜻하다. 잘 마른 내의를 입고 비치된 드립백 원두커피를 숭늉처럼 연하게 마신다. 뜨거운 물로 컵과 텀블러를 소독하고, 텀블러에 물을 끓여 넣고 홍삼단을 섞었다. 

 

9시 반쯤 호텔을 떠났다. 

15분 후 구룡포 해수욕장을 지나, 10시쯤 구룡포 주상절리를 지났다. 

10시 4분 삼정리 해수욕장, 20분 후 석병1리.

11시 10분, 호미곶이 7km 남았다. 하지만 오늘의 목적지는 호미곶에서 11.5km를 더 가는 흥환보건진료소다. 최장거리 코스다. 

11시 반, 다무포 하얀마을 고래마을은 마을 전체를 하얗게 칠해서 파란 바다와 잘 어울리는 예쁜 동네였다. 가는 길에 포항역으로 가는 9000번 버스가 계속 지나갔다. 그게 그렇게 마음이 놓였다. 언제든지 돌아갈 수 있으니까. 돌아갈 수 있지만 앞으로 나아가는 거니까. 

 

강사1리에서 2리를 지나 도로로 나왔다. 

정류장에서 잠시 쉬는데 어떤 할아버지 한 분이 오셔서 물으신다. 

"어디 이주 말하는 거예요?"

"월성 핵발전소 주변에 사시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요."

아~ 오늘의 임무 성공. 한 분이라도 궁금해하시면 그걸로 됐다.

 

12시가 지나 도로 옆에 밭이 있고 그 앞바다 쪽으로 소나무들이 서 있다. 

‘아~ 이곳에는 제발 풀빌라가 생기지 말기를…….’ 

곧이어 ‘호미곶 해국자생지’라는 푯말이 나왔다. 해국 덕분에 해송도 땅도 지켜졌던 것이다. 거기서 다시 해안도로로 내려갔다. 시커먼 바위 위로 하얀 파도가 넘실대는 거친 겨울 바다가 펼쳐졌다. 이제까지의 바다와는 다른 느낌으로 야성이 깨어나는 듯했다. 

 

12시 반이 넘어가고 대보1리였다. 

그 추운 바닷가에서 황토색 개 한 마리가 짖었다. 인사하고 지나가는데도 계속 짖는다. 가다 말고 멈췄다. 가까이 가보려 했더니 더 짖는다. 꼬리를 아래로 착 감은 게 겁을 먹은 듯 보였다. 배도 고프고 목도 마를 것 같았다. 배낭에 먹을 건 과자와 귤뿐. 당분 많은 과자는 개에게 좋지 않지만 개 간식을 갖고 다니진 않으니까. 마지막 과자와 귤 한 개를 먹기 좋게 까서 던져 주었다. 역시 먹었다. 굶주리고 있던 게 틀림없다. 목줄이 그물에 얽힌 듯했다. 하지만 내가 풀어 줄 순 없었다. 얼굴이 참 잘생긴 개였다. 내가 넓은 정원에서 살면 데려다 키우고 싶다는 생각이 설핏 들었다. 하지만 그 개 주인이 있기를. 버린 게 아니길. 그래서 데려가기를 간절히 바랐다. 

 

서둘러 걸었다. 12시 50분, ‘한반도에서 해가 가장 먼저 뜨는 호미곶’ 해돋이 광장에는 빨간 파카가 앉아있었다. 영상이었다. 울산 북콘서트가 끝난 날 밤에 전화해서 하루 함께 걷겠다고 했다. 괜찮다고, 이틀 지나서 연락 왔을 땐 이제 구룡포라 너무 멀어서 못 온다고 했는데도 사흘째 기어이 왔다. 오겠다는 사람에게 혼자 걸을 거니 오지 말라고 할 순 없었다. 만나서 물어보았다. 

“안 와도 되는데 왜 왔어요?”

“제가 북콘서트에 갔으면 안 왔죠. 근데 그날 못 가서 미안해서 왔지요.”

 

작은 백 하나 크로스로 두르고 온 영상은 자연스럽게 내 배낭을 가져다 멨다. 

오후 1시 반, 그날 묵기로 한 펜션 주인이 알려준 월녀의 해물포차에 들렀다. 음식이 나오기 전에 영상은 부탁한 파스와 요즘 품귀 현상이라는 테라플루를 두 통이나 포장 제하고 주었다. 매일 밤 테라플루를 먹고 잔다는 내게 감기 바이러스엔 약이 없다고, 테라플루를 먹으면 페닐라민말레산염이 다른 감기약에 비해 10배가 더 많은 20mg이기 때문에 잠들기엔 좋다고 한다. 영상은 약사다. 나는 약을 받고 귤을 주었다. 그날 갈 펜션 주인도 추천한 해물 뚝배기엔 전복이 두어 개 있었다. 영상이 나눠준 칼국수까지 먹으니 든든했다. 

 

오후 2시 5분 출발. 

호미곶은 면민이 작사한 ‘호미곶 내 고향’이란 면가도 있었다. ‘한흑구 문학관’이 있는 구만리를 지나 해변 길이 아닌 도로를 따라가다 저만치 굴이 있는데 잘못 온 것 같았다. 영상이 지도 앱을 보더니 맞다고 한다. 짧은 터널이었다. 길치인 내가 혼자였으면 무서워서 당황했을 길이었다. 

 

오르막과 내리막을 반복했다. 걷다가 영상은 이렇게 좋은 길을 걸을 수 있어서 감사하다고 했다. 그 느낌은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도 느낄 수 없다고 했다. 맞다. 천천히 따박따박 걸어가야 보이는 풍경이 따로 있다. 그 기쁨을 아는 사람만이 걷는다. 일단 그 맛을 알면 또 걸을 수밖에 없다. 

 

오후 3시, 몽돌 소리 자글자글한 해변에 잠시 앉아 소리를 감상했다. 걸을 때도 쉴 때도 영상은 뚝 떨어져 있다. 바람직한 거리다. 

 

오후 3시 반쯤 대동배1리 마을에 들어서는데 군복 같은 옷을 단체로 입은 분들이 기다란 망원 렌즈로 새를 찍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제주도 성산 일출봉 근처에서 보았던 철새 흰뺨검둥오리였다. 

 

오후 4시쯤 虎尾(호미) 사랑숲에서 잠시 쉬었다. 

동해면 발산1리 모감주나무와 병아리꽃 군락을 지나갔지만 헐벗은 겨울이라 눈에 띄는 건 없었다. 장군바위를 지나 말목장성 비에는 오후 햇빛이 진하게 드리워 있었다. 발산교회 부근에서 길을 약간 헤맸다. 그러나 곧 지름길을 찾았다. 

 

오후 5시 4분, 그 동네는 숙박 시설이 많지 않아 미리 전화 예약해 둔 숙소에 도착. 그런데 근처 식당이 거의 없어 저녁 식사가 곤란했다. 

 

영상과 함께 5시 20분 마을버스를 타고 도구해수욕장 근처로 나갔다.

20분 후에 ‘영일 가마솥 곰탕’집에서 설렁탕을 먹었다. 영상의 차는 그 근처에 있었다. 영상은 그곳에 주차하고 9000번 버스를 타고 호미곶으로 온 것이었다. 

숙소로 돌아가려고 영상의 차에 올랐다가 다음 날 아침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편의점에 들렀다. 떡국과 초코바와 단백질 바는 나를 위해, 초콜릿 과자 세트는 영상의 아이들을 위해 골랐다. 계산대에 물건을 올려놓고 계산하려는데 카드 쥔 손이 쑥 들어왔다. 깜짝 놀랐다. 영상이 어느새 차에서 내려 내 뒤에 있던 거였다.

“세 끼는 사야죠.”

그렇게 약국 휴가 내고 온 영상은 함께 걷고 점심, 저녁, 아침밥까지 사주었다. 

 

돌아오는 하늘에 보름달이 휘영청 떠 있었다. 모든 게 가득가득할 것만 같은 환한 밝기였다. 아~ 그래서 낮에 해안도로가 만조로 금세 막혔나 보다. 그래서 도로 옆으로 걸어야 했던 것이고. 음력 그믐달 보름 달빛 아래 숙소로 돌아가는 길이 꼬불꼬불 협로였다. 게다가 인도도 없었다. 다음날 7km 정도 되는 그 위험한 찻길을 걸을 자신이 없었다.

 

오후 6시 반쯤 영상은 숙소 앞에 나를 내려주고 갔다. 영상이 가는 것을 지켜보는 잠시에도 칼바람이 불었다. 바다 건너편엔 수평선처럼 포항 공단의 불빛이 가득했다. 호미곶에서부터 여기까지는 육지에 막혀 수평선이 없다. 호랑이 꼬리 호미라서. 

 

혼자 고독하게 걸으려던 이번 도보순례 계획은 영상의 깜짝 출현으로 어긋났다. 하지만 해파랑길 지도상 두 코스를 수월하게 하루에 걸었고 밥도 잘 먹었다. 그리고 더한 수확이 있었다. 올 8월 25일 나아리 월성원전인접지역이주대책위원회 10주년 때 깜짝 기획이었다.

 

홀로 고독한 순례자가 되려던 나는 구룡포에서 호미곶까지 혼자 12km, 호미곶에서 흥환1리까지 둘이 12km, 도합 24km를 걸었다. 그리고 테라플루를 먹지 않고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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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미곶에서 이주를 외치다 photo by 영상

 

 

<전설 따라 호미반도해안순례길>

2024년 1월 26일 금요일 도보순례 넷째 날

흥환간이~청림+형산강~영일대18.2km

 

새벽 4시. 목이 아파 깼다. 너무 덥고 건조했다. 보일러를 끄고 시끄럽게 돌아가는 빈 냉장고 전원도 꺼버렸다. 비로소 고요하다. 다시 잠들었다가 일어났더니 왼쪽 창에 햇빛이 강하게 비친다. 8시가 훌쩍 넘었다. 부지런히 씻고 옷을 입는데 이번엔 회색 지퍼 슈트 다음에 검정 후드 티를 입어보았다. 조삼모사 옷 입기로 하는 기분전환이었다. 전자레인지를 사용하지 않고 뜨거운 물을 부어 오래 둔 떡국은 수입산 쌀이라 맛이 없었다. 

 

9시 20분에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펜션 주인의 핸드드립으로 AA 브랜딩 커피를 마신 후, 출발할 때 길을 물었더니 주인이 나무다리를 건너가는 해안도로를 알려주셨다. 거기다 더해 포스코 포항제철소를 걷지 말고 도구해수욕장 입구에서 버스를 타고 형산강을 건너가서 내리라고 하셨다. 거길 다 걷는 사람들 있는데, 좋은 자연을 걷지 왜 매연 마시고 걷느냐고. 

 

일단 찻길보다 나을 듯해 나무다리로 들어섰다. 영하 3도℃. 기온은 좀 내려갔지만 바람이 불었다. 

9:47 하선대 선바우길로 들어섰다. 

9:58 해안을 돌아 다리가 나 있는데 꽤 길었다. 다리 밑으론 거친 파도가 들락거렸다. 스틱의 캡을 뺐다. 파도가 다리 위로 덮칠까 봐 심호흡한 후 숨을 멈추고 달리기 시작했다. 

1.2km쯤 오니 0.5km 앞에 하선대 선바우길.

마산리를 지나며 10:21 먹바우(검둥바위)가 있었다. 바위 두 개가 연결되어 있는데 연오랑 세오녀를 싣고 간 배가 아닌가 하는 설명이 있었다. 잠시 연오랑 세오녀 이야기를 축약하자면, 둘은 부부였고 어느 날 해초를 따고 있던 연오를 바위가 데리고 일본으로 갔는데 일본 사람들이 연오를 왕으로 삼았단다. 남편을 기다리던 세오는 남편의 신발을 발견하고 그 바위에 올랐다. 그랬더니 그 바위가 역시 세오를 일본으로 데려갔다. 마침내 연오와 세오는 만나 다시 부부가 되었다. 그러나 이때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빛을 잃었단다. 일관이 연오와 세오가 일본으로 갔기 때문이라고 해서 왕은 사신을 보내 고국으로 돌아오라고 했다. 그러나 연오는 자신이 일본에 온 게 하늘의 뜻이라며 세오가 짠 비단을 대신 주어 제사를 지내라고 하였다. 그렇게 하였더니 해와 달이 제 빛을 찾았다고 한다. 

 

10:29 드디어 하선대 도착.

작은 바위에 선녀가 내려와서 놀았다는 하선대. ‘옛날 동해의 용왕이 매년 칠석날 선녀들을 이곳에 초청하여 춤과 노래를 즐기곤 하였는데 용왕은 그 선녀 중에서 얼굴이 빼어나고 마음씨 착한 한 선녀에게 마음이 끌리어 왕비로 삼고 싶었으나 옥황상제가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용왕은 황제의 환심을 사기 위해 바라를 고요하게 하고 태풍을 없애는 등 인간을 위하는 일을 하자 황제가 감복하여 선녀와의 혼인을 허락하게 되었다고 하며 용왕과 선녀는 자주 이곳에 내려와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는 전설이 있다.’

 

하선대 1km에는 각종 이야기를 담은 바위가 계속된다. 소원바위, 아기발바위, 여왕바위, 안중근의사 손바닥바위, 폭포 바위, 어디에나 흔한 남근바위. 

 

그렇게 하선대를 지나 연오랑세오녀 공원에 막 다다랐는데 스틱이 이상했다. 들어서 보니 스파이크(쇠촉)이 달아나 버렸다. 그동안 캡을 씌운 채 다녀서 충격이 손에 그대로 전달됐었는데 캡을 빼자마자 스파이크 한쪽이 날아가 버린 것이다. 

 

연오랑세오녀 테마공원에서 의자에 앉아 물을 마시며 쉬었다. 햇살이 따뜻해서 좀 전의 긴장감을 풀 수 있었다. 5.3km를 쉬지 않고 달리다시피 걸어왔다. 그런데 그 심장이 조여오는 긴장감을 다시 감당하며 해안도로로 내려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차라리 찻길 가로 가려고 산책로를 찾았다 길을 잘못 들어 되돌아오다가 호텔로 가는 길을 발견했다. 그런데 그 길도 결국은 해안도로로 통하는 길이었다. 

 

임곡리를 지나 도구해수욕장으로 가는 길에 솔숲이 있었다. 동화 속 기울어진 나라처럼 소나무들이 전부 육지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해풍에 기울어진 모양이었다. 

 

12시 반쯤 도구해수욕장에 다다랐다. 거기서 점심 식사할 계획이었다. 펜션 주인은 그곳에서 버스를 타고 가라고 하셨다. 그런데 나는 멈추지 못하고 끝이 보이지 않는 데크로 계속 걸어 나아갔다. 전날 호미곶에서 아주 멀리 보이던 공단이 점점 가까워졌다. 한 시간 넘게 걸어 드디어 끝이 없을 듯하던 데크가 끝이 났다. 그곳은 청림바닷가였다. 길 따라 쭉 나가보니 해군항공역사관 앞이었다. 도구해수욕장 입구에서 4km쯤 더 온 곳이었다. 편의점에서 초코바를 한 개 사서 먹고는 펜션 주인의 말대로 버스 209번을 타고 다리를 건너 형산로터리까지 갔다. 

 

버스를 타고서야 알아차렸다. 

‘내가 왜 이렇게 남의 말을 잘 듣지?’

팔랑귀라서일까? 아직도 어른 말씀을 잘 듣는 모범생 습성이 남아서일까? 난 그 길을 걷지 않을 생각이 없었다. 몇 달 전 지도 보고 계획표를 짤 때도 그 길을 다 걸어서 그날은 송도 해수욕장에서 쉬는 게 일정이었다. 그런데 다이어리를 배낭에 넣어 보내서 잊어버렸을까? 아침에 들은 남의 말 때문에 몇 달간의 내 계획을, 더 나아가서는 4년 동안의 7번 국도 완주라는 내 계획을 고작 5km 남짓 때문에 달성 못 하다니…… 영 찜찜했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맨 처음 2020년 2월 울진~삼척 7번 국도 도보 순례 때도 장호항에서 궁촌항까지 5.4km를 레일바이크 타고 갔었다. 나아리에서 문무대왕릉·봉길대왕암 해변까지도 버스로 15.8km 돌아서 갔다. 만약 승용차로 터널을 건넜다면 6.2km 거리다. 이번엔 해군 항공역사관부터 형산강 로터리까지 5km를 209번 버스로 통과한 것뿐이다. 하지만 망설이던 그 길을 되돌아가지 않고 직진하게 된 건 로터리에서 길 건너 형산강 낀 강변 길에 올라서자마자 본‘영일만 북파랑길 시점’표지 때문이었다. 

 

2020년 겨울이 다가오는 가을, 외로움과 상심에 푹 젖은 내가 막막하기만 한 심정으로 하루 걷고 올라가고 또 하루 걷고 올라갔던 그 길이 월포에서 화진 그리고 월포에서 칠포 ‘깊고 우아한 북파랑길’이었다. 그 길의 시작점에 섰으니 새로운 기분이 피어올랐다. 

 

5.8km만 가면 영일대해수욕장이 있다는 강변길은 안정감이 있었다. 자전거길과 도보길이 나뉘어 있고 군데군데 의자도 있었다. 아무 때나 쉴 수 있었으나 나는 쉬지 않고 걸었다. 형산강을 바라보는 의자 중 하나에는 노부부로 보이는 두 분이 나란히 앉아 오후 햇살을 쪼이고 계셨다. 눈물겹게 바라는 미래의 모습이었다. 

 

포항운하관을 지나 쭉쭉 나아갔다. 포항제철과 영일대 사이의 송도해수욕장이었다. 오후 세 시가 가까이 오고 있었다. 길거리 의자에 앉아 단백질바를 먹었다. 점심 끼니를 챙기지 못하는 날이 왔구나. 생각하면서 영일대 쪽으로 계속 걸었다. 

가면서 포항에 오면 꼭 연락하라는 사람에게 전화했더니, 신세 질 생각 없다고 해도 숙소를 예약해 주었다. 숙소에 짐을 풀고 씻고는 근처 대형 중국음식점에서 백짬뽕밥을 먹었다. 

식사 후 영일대해수욕장 모래에서 밤이 내려오는 걸 지켜보았다. 오른쪽으로 포항제철소의 불빛이 왼쪽으로는 스페이스 워크의 불빛이 화려했다. 얼마만의 도시 풍경인지, 이렇게 전기를 쓰니 핵발전소가 계속 가동되지……. 

 

6시 반쯤 카페에 들어가 생강차를 시켰다. 

7시 20분에 예약해 준 사람을 잠시 만나고 숙소로 돌아왔다.

8시쯤 발을 씻는데 드디어 왼쪽 둘째 발톱이 빠져서 떨어져 나갔다.

10시 반쯤 취침하려는데 침구의 락스 성분 때문에 피부가 가려웠다. 겨우 잠들었다가 새벽 2시에 다시 깼다. 

 

고독하게 순례하려 했는데 타의 반 자의 반 이 사람 저 사람 만나고 마는 순례, 오롯이 나에게만 집중하려고 했던 신경이 흐트러진다. 누가 뭐래도 제 갈 길 갈 듯한 나는 스치는 사람의 영향을 많이 받으며 흥환간이해수욕장에서 영일대해수욕장까지 좌충우돌 18.2km를 걸었다. 

 

 

DSC01956-호미반도해안둘레길_resize.jpg

호미반도해안둘레길

 

 

<밝고 가벼운 북파랑길>

2024년 1월 27일 토요일 도보순례 다섯째 날 

영일대 해수욕장~칠포항 16.5km

 

아침 일찍 일어나서 채비했다. 영일대해수욕장 모래에 서서 일출을 기다렸다. 

7:33 붉은 기를 머금은 하늘을 뚫고 바다에서 해가 올라왔다. 날이 맑아 일출 과정을 다 볼 수 있었다. 2020년 2월 울진에서도 보았고 7월 등명해변 지나서도 보았던 일출을 당당히 혼자 보았다. 비장함은 없었다. 결연함도 없었다. 그저 어제 떴던 해가 오늘 뜬 것이고 별일 없으면 내일도 뜰 것이다. 하지만 혼자 시작하는 아침에 해를 기다려 일출을 찍은 아침은 닷새의 도보 순례 날 중 최초였다. 뿌듯했다. 

 

7:47 호텔에서 제공되는 조식으로 우유와 콘푸레이크와 토스트를 먹고 연한 아메리카노와 오렌지 주스도 마셨다. 도보 순례하는 날엔 많이 먹어두어야 한다. 다 먹고 마시고 나서는 남은 식빵 두 장에 버터와 잼을 발라 딱 붙였다. 그리고 종이 접시를 양쪽으로 덮은 다음 손수건으로 쌌다. 점심 식사 완성. 독일 본 호텔의 성대한 조식은 아니지만 소박하게 두 끼를 해결할 수 있다니 흡족했다. 텀블러에 물을 끓여 넣고 오설록 달빛 걷기 한 봉을 우렸다. 가져온 커피믹스 5봉, 블랙커피 2봉이 그대로다. 챙겨온 게 미안해서 발효차라도 덜어내었다. 옷은 줄일 수 없어 매일 상의 다섯 벌, 하의 네 벌. 양말 두 켤레. 정말 많이도 껴입는다. 거기에다 버프 두 겹에 모자.

 

8:37 들어올 때처럼 깔끔한 방을 만들어 놓고 체크 아웃. 영하 1℃에서 0℃. 날씨도 풀렸겠다 긴장할 것 없다. 단단히 복장을 챙기고 배낭을 메고 등산화를 신고 장갑을 끼고 스틱을 쥐었다. 자~ 출발. 

 

600m 앞에 다리를 통해 바다로 나간 영일대가 있다. 바다 위로 나아가 보았다. 2층까지 올라가 한 바퀴 돌았다. 한 시간 전에 해를 이미 맞았으니 영일대는 가볍게 둘러보고 직진. 

 

9:18 두무치마을 지나는데 조깅하는 사람들이 있다. 건강한 도시다. 

 

9:42 환호마을 한 시간 만에 둑에 앉아 물을 마셨다. 거기서 계속 바닷길로 가야 하는 건지 지도 앱을 켜보았다. 국토종주 자전거길이 마을 쪽으로 나 있다. 거기서부터는 계속 큰 찻길을 낀 인도를 걸었다. 우회전, 좌회전, 우회전 4km 정도 하니 죽천 해수욕장이 나왔다. 한 시간이 지났다. 마을 입구 정자에 앉아 물을 마셨다. 마을 입구에 이렇게 쉴 곳을 만들어 놓은 동네는 주민들에게도 순례자에게도 고맙다. 

 

죽천 방파제 가까이 가니 부산에서 보았던 까만 오리들이 바다에 떠있었다. 햇빛 받아 따뜻해 보였다. 마을을 지나면서 막다른 곳으로 보이는 곳에 안내판이 있었다. 공사장 뒷길 같은 그 길로 한참을 나갔더니 영일만대로에서 영일만 항로였다. 가끔 덤프트럭이 지날 뿐 사람도 없는 산업단지를 2km 정도 걸어가면서 이런 길을 걸을 거면 포항제철소 길도 못 걸을 게 없었다는 게 또 생각났다. 이미 지난 일이었다. 

 

길고 지루한 길이 끝나자 용한 서퍼 비치가 나왔다. 바람 막을 곳을 피해 해변에 있는 파라솔에 앉아서 물을 마시는데 바다에 까만 점들이 움직인다. 유심히 보니 까만 슈트를 입은 사람들이 파도를 타고 있었다. 바람 때문에 멀리 가지는 못하고 있었다.

거기서부터는 거친 겨울바다가 다시 시작되었다. 용한리간이해수욕장에서 2km 지점부터는 해변에 나무 데크 길이 이어졌다. 시작점인 정자에서 물을 한 모금 마셨다. 

 

12시 칠포해수욕장까지 1.5km 남았다. 데크 길을 가다 보니 스틱 한 쪽은 어느새 끝부분이 사라졌다. 대구교육해양수련원에서 잠시 길을 잃었다. 칠포해수욕장으로 가는 길엔 태양과 바람으로 가동하는 신재생에너지 가로등이 있었다. 무척 반가웠다. 

 

12:50 드디어 칠포해수욕장에 당도했다. 나무를 심어 놓고 바람막이를 했는지 썰렁했다. 해변에서 뭔가를 채취하는 사람 말고는 쉴 곳도 없이 황량했다. 거기서 사진을 찍었다. 끝인 줄 알았다. 그런데 저만치 계단이 보였다. 그제야 내가 순례한 곳이 칠포항까지였음을 기억했다. 그해 초겨울 어두워지는 시간에 나는 800m 더 가면 있다는 칠포해수욕장까지 가는 걸 포기하고 칠포항 해변에서 돌아갔었다. 

 

모래 위를 걸어 나무 데크와 계단을 올라갔다. 절경이 펼쳐졌다. 거리도 꽤 있었다. 3년 2개월 전 그때 내쳐가지 않길 잘했을 만큼. 그렇게 작은 산등성이를 넘었다 싶었을 때. 눈앞에 그날의 풍경이 반대편에서 펼쳐졌다. 그 작은 해변이 내가 걷다가 지쳐 돌아갔던 곳이었다. 마침내 다시 찾아온 그곳. 그곳은 칠포 캠핑장이었다. 그때 보았는지 기억도 가물가물한 바위 위에 소나무가 있었다. 이번 도보순례 신창에서부터 봐 온 여러 바위 위 소나무 중 제일 멋졌다. 

 

13:13 바위 아래 스틱을 꽂고 배낭을 내려놓고 스틱에 조끼를 걸쳤다. 이것으로 7번 국도 혹은 해파랑길을 완주했다. 

기뻤다. 매우 기뻤다. 

그 길을 따라 칠포 1리 정류장에 가서 다시 앉았다. 4년 전과는 전혀 다른 밝고 가벼운 기분이었다. 

 

2020년 11월의 나는 외로움이 고독이 되기 전 상심과 슬픔으로 칠포해수욕장까지 가지 못하고 칠포 1리 정류장에 주저앉아 있었다. 거기서 모르는 사람이 포항역까지 태워다 주셨다. 

 

2024년 1월의 칠포 1리 정류장은 따뜻하고 아늑했다. 비록 시간대와 날씨는 달랐지만, 그때도 혼자였고 지금도 혼자인데 내 마음은 매우 달랐다. 길 건너 새마을 슈퍼에서 드디어 따뜻한 캔커피를 샀다. 이날을 위해 나흘 동안 철저히 마시지 않았던 캔커피. 혹시라도 고함량 카페인으로 몸에 탈이 날까 봐, 그래서 완주하지 못할까 봐 못 마셨던 캔커피를. 

 

시골 물가는 참 소박하다. 도시 편의점에서 2200원 하는 게 시골 구멍가게에서 1500원. 계산하는데 가게 주인아저씨가 “어, 이 카메라 되게 오래된 건데.”하신다. 지갑을 꺼내느라 내려놓은 내 고물 카메라. 중고로 두 번째 수선을 거듭해서 쓰고 있는 내 소중한 분신. 

 

내 카메라는 혼자 다니는 내가 언제 어디에서 무슨 일을 당했을 때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증거물이다. 언제부턴가 나는 족적을 남기듯이 사진을 찍었다. 그게 만일의 경우, 나를 찾을 사람들에게 내가 남겨줄 수 있는 단서니까. 보안이 철저한 아이폰 회사는 소유자가 사고사해도 유족에게 휴대폰 비밀번호를 알려주지 않는다. 그래서 그 안의 사진은 본인만이 볼 수 있다. 촬영은 순간을 기억하고자 하는 본능적인 행위이기도 하지만, 혼자 다니던 내게 생존과 안전을 위해 저절로 따라붙은 습관이었다. 

 

캔커피를 사서 다시 정류장으로 왔다. 배낭에서 손수건으로 싸놓은 토스트를 꺼냈다. 짐에 밀려 납작해진 토스트는 버터와 잼으로 딱 달라붙어 있었다. 미지근하고 달달한 커피 한 모금과 함께 한입씩 베어먹는 토스트는 고소하고 달콤하니 정말 맛있었다. 토스트를 먹으며 둘러 본 정류장 내부엔 지난번에 있었던 포항 지진 관련 공고문은 사라졌다. 

다 마신 캔을 버리려고 다시 가게로 가는 짧은 길이었다. 컹컹 강아지 짖는 소리는 들리는데 강아지는 안 보이고 허리 굽은 할머니가 말씀하셨다. 

 

“좋은 일 하시네요.”

“네? 고맙습니다.”

그런데 순간 궁금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럼요. 좋은 일 하는 거죠.”

 

할머니는 내 배낭에 매달린 ‘핵발전소 없이 안전하게 살자’를 읽으신 건가? 지나가는 할머니의 속이 보이는 배낭에서는 강아지가 컹컹 짖고 있었다. 순간 하선대 전설이 떠올랐다. ‘좋은 일을 하면 내게도……?’ 

뜻밖의 칭찬으로 마무리하며 7번 국도 순례길 다섯째 날 영일대해수욕장에서 칠포항까지 16.5km를 걸었다. 이렇게 부산에서 고성까지 도보 순례를 완주했다. 그런데 보통 때 같으면 여기저기 벗들에게 완주 소식을 알렸을 텐데 나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그 기쁨을 오롯이 혼자만 간직했다. 그리고 여기에서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DSC02203-이주만이-살길이다_resize.jpg

이주만이 살길이다·월성원전인접지역이주대책위원회

 

 

<걷는 인생은 아름다워>

7번 국도 완주 순례길 에필로그 

2024년 1월 27일 토요일 도보순례 다섯째 날 16.5+5km

 

나는 날아오르듯이 걸어 올라갔다. 마치 팽팽한 고무줄에서 쏘아 올린 조약돌처럼 튕겨 나가듯 걸었다. 7번 국도 도보순례의 내 최종 목적지는 칠포해수욕장도 칠포항도 아니었다. 

 

1:45 일단 해오름 전망대를 향해 올라갔다. 차도 옆길을 따라가는데 어떤 할아버지 뒤에 허리 고부라진 할머니가 할아버지 옷자락을 쥐고 따라가셨다. 평생 할아버지만 보고 살아오셨을 인생이 한눈에 보인다. 살아보지 못한 인생이 부럽다고 해서 앞으로 그렇게 살 수 있을까.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코너 돌아 사라질 때까지 뒤돌아보다가 다시 걸었다. 해안으로 가는 길이 있는지도 모르고 씩씩하게 오르막길을 올라갔다. 그런데 잠시 후 이상해서 뒤를 돌아보는 순간 ‘펑’소리가 나며 1톤 트럭이 내 바로 뒤 갓길에 급정거했다. 타이어가 펑크 난 것이었다. 그 차가 속도를 못 이기고 돌진했다면 나는 어찌 되었을까? 살아있음이 감사했다. 

 

13:53 잠시 후 해오름 전망대가 보였다. 

 

‘해오름 전망대를 지나는데 지난여름 자전거 도로에서 야영하던 장면이 떠올랐다. 비록 발목과 무릎이 시큰거리고 발톱이 빠져도 걸을 때 나는 행복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하게 살다 가기에도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아닌가.’

 

2020년 11월 20일 도보 순례 글이다. 그때 나는 그곳에서 사진 찍고 있는 젊은이 한 쌍이 부러워 그곳을 쳐다만 보고 지나쳤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무도 없는 전망대로 내려갔다. 맨 끝 구멍이 숭숭 뚫린 곳까진 못 갔지만, 나무 데크 끝까지 가서 정면 바다와 좌우 바닷가를 보았다. 알콩달콩 사진 찍을 사람이 없어도 혼자 거뜬히 상쾌했다. 

 

‘해오름은 포항-울산 고속도로 완전 개통을 계기로 포항·울산·경주가 함께하는 동맹의 이름이라고 한다. …… 세 도시 모두 …… <산업의 해오름> 지역이라는 점과 대한민국 경제 재도약의 해오름이 되겠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칠포리는 수군 만호진이 있던 곳이며, 고종 8년(1870) 동래로 옮겨가기 이전까지 군사 요새로서, 7개 포대가 있는 성이라 하여 7포성이라 불렀다 한다.’ 

 

거기서부터는 차도 가까이지만 산속 오솔길이 나 있었다. 아주 예쁘고 정감 있는 길이었다. 

14:10 오도 1리에 도착하니 예전에 길을 헤맸던 기억이 난다. 거기서 화살표를 따라 해안 길로 갔는데 철창으로 막혀있었다. 다시 돌아 나와 찻길로 갔다. 거침없이 걸어가는 내 몸은 세컨드 윈드(second wind)를 맞아 탄력이 있었다. 

 

14:42 쉬지 않고 오도 2리를 지났다. 내가 찾는 이름이 나타났다. 그런데 크기가 엄청나게 커져 있었다. 마침 지나가는 할머니께 여쭤보았다. 

 

“저 교회가 저렇게 커졌어요?”

“원래 컸었는데.”

“전엔 작았는데요.”

“95년에 지었는데?”

 

순간 시골 교회에도 재건축 바람이 불었나 성급하게 실망했던 내가 부끄러웠다. 

 

15:10 찻길로 나가 청진 2리 정류장에 앉았다. 이 근처 어디였다. 인터넷 지도를 켜서 비슷한 이름이 있는지 찾아보았다. 있었다. 1km만 더 가면 있었다. 찻길 가로 달렸다. 

 

15:20 청진 1리. 마을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왼쪽 골목으로 들어갔다. 

아~ 있었다. 그때 그 교회가 그 모습 그대로 있었다. 이름은 그새 바뀌었지만. 

 

‘그런데 발길이 닿는 모든 길에는 뜻이 있는 법, 조급한 내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건축물이 하나 나타났다. 아주 작고 단아하고 아름다운 교회였다. 운주사 칠성바위의 축소판 같은 돌다리를 밟고 미닫이문을 여니 네 길이가 같은 십자가가 정면 벽에 걸려 있었다. 채 열 사람이나 앉을까 싶은 의자들 양옆으로 벌써 크리스마스트리가 장식된 벽과 그 위 창이 있었다. 자연스레 기도를 했다. 언제 어디서나 내 기도는 단 하나였다. 기도를 하고 나오는데 헌금함이 있었다. 나는 늘 감동을 주는 종교시설에선 아끼지 않고 헌금을 했다. 그런데 지갑을 열어보니 세상에나 십 원짜리 동전 두 개뿐. 타 지역에 갈 땐 신용카드사용이 안 되는 곳이 많으니 늘 가격대별로 지폐를 준비해 다니던 나였다. 챙겨줄 사람 하나 없는 곳에 혼자 덜렁 와 있으면서 나는 무방비 상태였다.’

 

2020년 11월 20일에 왔던 그 교회. 반대 방향에서 걸어왔지만, 마침내 찾아온 그 교회. 다시 돌다리를 밟고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두 개의 문이 지난번처럼 다 열렸다. 

 

‘그래, 이렇게 문이 열려있어서 아무나 기도할 수 있게 하는 게 교회지.’ 

 

입구 왼쪽엔 작은 키보드가 있는데 그 위에 찬송가가 펼쳐져 있었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내 노래 같았다.

육각형 실내에 양쪽으로 네 개씩 있는 작은 나무 의자 사이로 나가 강대상 앞에 배낭과 스틱과 장갑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오른쪽 둘째 줄 의자에 앉아 기도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구하지도 않고 오직 감사만 나왔다. 천장을 보고도 감사, 벽을 보고도 감사했다. 그리고 지갑을 꺼냈다. 성경 속 ‘과부의 두 렙돈’처럼 가지고 있던 현금 전부를 드렸던 4년 전과 다르게 빳빳한 지폐를 꺼내 감사 헌금 봉투에 담았다. 그리고 연필로 썼다. 

‘7번 국도, 해파랑길, 북파랑길, 호미반도해안둘레길 완주, 지난번의 1000배 원, 일곱째별’

 

영일대해수욕장~칠포항 16.5km(완주)+칠포항~청진 1리 작은 교회 5km=21.5km

 

이 5km는 버스로 건넌 포항제철소 구간 거리와 같다. 그러므로 거리상 나는 경주~포항 구간-해파랑 12, 13, 14, 15, 16, 17, 18. 총 일곱 구간을 닷새에 완주했다. 지도상 7번 국도 구간을 걷는다면 호미 반도는 걷지 않아도 되었다. 

 

이렇게 2020년 2월에 시작한 나의 7번 국도 도보 순례는 4년 만에 끝났다. 

 

교회 나무 의자 위에 노란색 ‘이주만이 살길이다’조끼를 올려놓았다. 

 

2021년 6월, 내가 최초로 혼자 14일 동안 해남에서 하동 거쳐 구례까지 18번 국도 240km 도보 순례를 하고 돌아왔을 때 탈핵 벗들이 남원에 모였다. 그때 매주 월요일 8~9시 월성원전인접지역이주대책위원회 상여시위와 연대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울산에 부탁해 다음 날 조끼를 받았을 때는 앞에‘월성핵발전소 2, 3, 4호기 조기폐쇄!’라고 쓰여 있었다. 나는 월성원전 인접지역 주민의 이주를 위해서 순례하는데 왜 ‘월성핵발전소 2, 3, 4호기 조기폐쇄!’가 구호가 되어야 하는지 의아했다. 탈핵공동행동에서는 2, 3, 4호기가 조기폐쇄 되어야 나아리 주민에게도 좋은 거라고 했다. 여하튼 그 조끼를 입고 다음 해인 2022년 5월까지 매주 월요일마다 1년 동안 빠지지 않고 전국 어디에 있든지 아침 8~9시에 걸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탈핵’이라는 대의명분 앞에서 ‘나아리 월성원전인접지역이주대책위원회’라는 작은 공동체는 늘 뒷전에 밀렸다. 이제야 나는 그들을 위한 ‘이주만이 살길이다’조끼를 입고 걸었다. 마침내 내면의 소리 Inner Voice에 따라. 조끼는 바뀌었어도 내 배낭의 몸자보는 여전히 ‘핵발전소 없이 안전하게 살자’이다. Cause 대의명분을 지키며. 

 

그 몸자보를 처음 받은 탈핵희망국토도보순례가 2019년 여름 해산했다. 

 

2020년 2월, 혼자라도 걷겠다고 맨 처음 7번 국도에 나섰을 때 도반이 생겼다. 그때 우리는 배낭을 바꾸어 멨었다. 내 큰 배낭은 그가. 그의 작은 배낭은 내가. 그렇게 울진부터 삼척까지 나흘을 걸었다. 

 

2020년 7월, 다시 큰 배낭을 각자 둘이 메고 삼척부터 걸을 때 순긋해변으로 온 벗들이 고생 그만하라며 삼척에 세워둔 차를 가져오라고 했었다. 그때부터 걸어갔다가 버스를 타고 돌아와서 짐을 둔 차를 가지고 가거나, 차를 먼저 갖다 놓고 버스 타고 와서 걷거나 했다. 그렇게 8일간 삼척에서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걸었다. 

 

2020년 11월, 포항에 강의 차 왔다가 월포에서 각각 화진과 칠포까지 혼자 걸을 때는 오롯이 내 가방을 내가 멨다. 

 

2021년 2~3월, 울진 망향정에서 벗들과 함께 시작한 도보 순례 때는 차가 있었고 내 가벼운 배낭마저도 닷새 내내 도반이 멨다. 그렇게 닷새간 포항 화진해수욕장까지 걸었다. 

 

2024년 1월, 마지막 7번 국도 구간인 경주 문무대왕면 봉길리부터 포항 칠포와 이후 청진까지 혼자 걸었다. 그런데 이번 도보 순례 첫날에 알았다. 이제 외롭지 않음을. 혼자가 정말 좋음을. 마침내 나는 혼자 일어섰다. 이것이 진정한 독립이다. 

 

‘홀로 있을 수 있는 능력을 성취한 개인은 창조성이 풍부한 삶을 추구할 수 있고, 자유롭고 고요하게 자신의 삶을 사색할 수 있으며, 평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다. 또한 그는 타자와 함께 있을 수 있고, 함께 나누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길목인 2022년 12월 여는 글 ‘홀로 있을 수 있는 능력’(이은경) 중  

 

나는 홀로 있을 수 있는 능력을 성취했다. 그러므로 나는 창조성이 풍부한 삶을 추구할 수 있고, 자유롭고 고요하게 자신의 삶을 사색할 수 있으며, 평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다. 또한 나는 타자와 함께 있을 수 있고, 함께 나누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탈핵희망국토도보순례 7번 국도

2019년 6월 22일부터 25일까지 고리핵발전소에서 월성핵발전소까지 75.2km

 

나만의 7번 국도 탈핵도보순례

2020년 2월 12일부터 15일까지 울진에서 삼척까지 79.6km

7월 1일부터 8일까지 삼척에서 고성까지 187.5km

11월 13일 월포에서 화진까지 10.5km와 20일 월포에서 칠포까지 8km 

2021년 2월 28일부터 3월 4일 울진에서 화진까지 102.6km

2022년 1월 9일부터 10일까지 부산 오륙도에서 고리 핵발전소까지 54km 

2024년 1월 23일부터 27일까지 5일 경주 문무대왕릉부터 칠포항까지 96.1km+5km=101.1km

 

이렇게 부산에서 고성까지 618.4km를 걷는 데 총 30일이 걸렸다. 그중 단체가 아닌 개인으로 2020년 2월부터 2024년 1월까지 25일 간 543.3km를 도보 순례했다. 

 

첫 도보 순례 포함 세 번이나 함께 370여km를 완주해 준 도반이 있었기에 순례길이 든든했고 군데군데 함께해 준 벗들이 있었기에 순례길이 따뜻했다.

 

감사하다. 그저 감사하다. 

걷기 시작하면서 인생이 참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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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만이 살길이다·월성원전인접지역이주대책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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