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물들은 먹고 먹히는 자연의 세계에서 자신을 지키고 돌보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쓴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게 자신의 몸을 이용한 위장술이다. 동물이나 곤충은 살기 위해 때때로 보호색으로 위장술을 부린다. 기본적으로 녹색이나 흑색 그리고 갈색을 바탕색으로 하여 선과 점으로 된 기하학적인 무늬를 만들어서 주변 환경과 어우러지곤 한다. 자연 속 위장술의 대가, 카멜레온은 천적인 새가 앉아 있는 나뭇가지에 천연덕스럽게 매달릴 만큼 위장술에 능하다. 몸이 나뭇가지와 똑같은 색이 되기에, 새들이 알아차리기 쉽지 않다. 새들도 마찬가지인데, 몸의 색이나 알 색을 주변의 색과 잘 어울리는 모습을 하곤 한다. 자벌레와 같은 숲속 애벌레는 몸 색뿐 아니라 모양까지도 주변 자연의 모습과 비슷하게 바꾼다.
때론 주변 색과 대조를 이루는 무늬나 모양으로 상대방을 크고 무섭게 하려고 과대 포장하는 생물들도 있다. 하지만 다른 생물의 공격을 피하려고 흔히들 하는 행동은 숨는 거다. 사람도 위험에 부딪히면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리거나 무리 속으로 몸을 숨기는데, 대부분 긴급할 때 하는 행동이다. 생물들은 평화로울 때도 다른 생물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변화를 준다. 자기 모습을 교묘하게 위장하고 상대방이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오랫동안 꿈적하지 않고 가만히 있곤 한다.
사람들은 어떤가? 태초에 만들어진 사람들은 한없이 나약했고 생존을 위한 기술로 가진 게 별로 없었다. 처음 동산에서 생물들의 이름을 붙이며 그 속성을 알아가며 자신을 보호하거나 필요한 것을 취하면서 생존의 기술도 터득했다. 그런데 산업이 발달하고 기술이 발달하면서, 자연에서 모방한 위장술은 자연을 위협하는 기술로까지 확장되었다. 직면한 위기를 넘어서려는 기술적 행동이 오히려 위기를 부추기는 위장술로 둔갑해 온 것인데, 세계 굴지의 석유 채굴기업이 그 대표적 예이다. 환경오염의 이미지를 벗어내고자 에너지전환에 많은 투자를 선언했지만, 실제로는 오히려 석유 생산을 더 늘렸다. 2010년 멕시코만에서 유출했던 석유를 2014년 정상화했다며 기름 청소작업을 중단했는데, 정말로 그런지 확인되지 않았고 그 후로도 계속되는 문제 제기에도 묵묵부답이다.
또 요즘 기업들이 바다에 버려진 플라스틱 쓰레기를 수거해 업사이클(버려진 것을 재활용해 새 제품을 만드는 것) 티셔츠와 운동화를 만들어 팔며 광고하고 있는 것을 보면, 구매할수록 바다를 살릴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한데, 그도 그냥 넘어가기에는 뭔가 찜찜하다. 일반 의류산업도 마찬가지다. 옷이란 건 어떤 것이든 새로 사 입으면 입을수록 환경을 살릴 수 없고 해치고 죽일 수밖에 없다. 티셔츠 한 장을 생산하는 데만도 2,700ℓ의 물이 오염되고, 청바지 한 장을 만드는 데는 7,000ℓ의 물이 오염된다. 결국은 생명을 선택하고 그를 살리려면, 옷과 플라스틱을 적게 생산함과 동시에, 아껴 쓰고 최소로 소비해야만 한다.
자연이 심히 병들고 기후가 붕괴하는 상황에서, 우리가 이런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그 어느 때보다 위험하고 교묘한 시대를 살고 있어, 선뜻 대답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분명한 건 우리가 지금 당장 세상을 바꿀 순 없어도 다른 세상은 살아낼 수는 있다는 것이다. 생명을 사랑하는 주님의 마음으로 다시 한번 가만히 자연을 들여다본다면 길은 우리에게 나타날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세계 안에는 나 자신의 몸은 물론이고, 그들의 몸을 지키고 돌볼 수 있게 하는 지혜가 가득하다. 다만 경제적, 효율적이라는 미명 아래 생명의 가치를 위하는 척 위장한 채 돈 벌기에만 급급했던 삶을 멀리하고, 다른 삶을 살아내느냐에 달렸다. 부정적 생각으로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면 정말로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지구 가열화 시대다. 이렇게 되기까지 우리는 석유 문명이 주는 편리한 삶에 취해 살아왔다. 지금도 석유 문명이 만들어낸 물신(物神)의 주문에 사로잡혀 살아간다. 에어컨을 켜도 석유요, 생수를 사 먹어도 석유다. 집 안은 물론 집 밖으로 한 발자국만 나가도 석유가 없이는 꼼짝달싹할 수 없다. 아무것도 자신의 손으로는 필요를 채울 줄 모른다. 하기야 밥을 짓는 농사조차 태양이 아닌 석유가 없으면 속수무책인 세상이 되었는데, 더 말해 무엇하랴.
지금까지의 삶을 반성하고 생태적 삶을 살면 세상은 희망적으로 변화할 수 있을까? 되도록 에너지를 적게 쓰고 생활을 간소화하고, 그를 위해 몸을 많이 쓰면 달라질까? 귀찮더라도 되도록 몸을 많이 쓰는 습관을 들이면 조금 불편은 해도 물리적 욕망으로부터 자유를 경험할 수는 있을 것이다. '물숨'이란 영화가 있다. 해녀들은 자기 숨만큼 바다에 머물면서 바다가 주는 만큼, 딱 그만큼만 가져오겠다는 약속을 한다. 유혹을 잘라내지 못하고 약속을 깨면, 사람의 숨이 아닌 물의 숨', 욕망의 숨을 쉬게 될 것이고 죽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해녀들은 자신의 숨의 한계를 잘 아는 듯하면서도, 때때로 한계를 잊고 바다에 더 머물게 되고, 그러다 낭패를 보곤 한다.
지금 우리는 어떤까? 우리가 한계를 알고 마음을 분별하면서 살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이나 공동체로의 변화가 가능하다. 어떻게 가능할까? 마음을 분별해 일상에서 영성적 삶을 사는 데 길이 있다. 첫째, 삶의 속도를 늦춰야 한다. 옛 어른들은 바쁠수록 돌아가라고 했다.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보니, 빠른 경주자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전 9:11)"라고 했고,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니라" 했다. 분주히 일상을 살다 보면 소중하고 아름다운 순간을 그냥 흘려보내게 된다. 우리는 햇살과 바람, 눈과 비 등, 우리가 누리며 감사해야 할 것들을 허투루 대하는 경우가 참 많다. 가장 최근 하나님이 지으신 그 무엇에라도 환히 웃으며 기뻐했던 순간이 있는가? 언제였는가? 매끼 식사하기 전 감사 기도하는 것, 매일 거니는 길에서 만나는 생명 하나하나를 바라보고 미소 짓는 사람이라면, 지구를 위협하기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고 온전히 살아낼 수 있을 것이다.
둘째, 가볍게 살아야 한다. 가볍게 살고자 한다면, 도시에 찾아든 새를 하루 한 번 이상 올려다보라. 하늘 나는 새들처럼, 자신을 창조주께 내어 맡기게 될 수 있다(마 6:25-26). 무엇이든지 사는 것을 줄이고 재사용하고 재활용하게 될 것이다. 사더라도 가능한 대로 쓰레기를 줄이려고 포장이 최소화된 걸 사고, 일회용품은 자제하고 재활용제품을 사게 될 것이다. 필요치 않은 물건은 기증하거나 공유하게 될 것이다. 에너지 절약할 뿐 아니라 직접 생산하고, 옷은 자연 건조할 것이다. 일은 우선순위를 정하여 자원과 시간, 돈을 낭비하지 않게 할 것이고, 음식은 지역에서 제철에 난 것을, 채식 위주로 최소 포장에 덜 가공된 것으로 먹을 것이다. 머무는 공간에는 크고 작은 숲과 밭을 만들어 수확물을 나눌 뿐만 아니라 화학제품을 멀리하고, 자신의 몸과 자연에 해가 덜 되는 제품을 사용할 것이다. 여행이나 출장을 가더라도 탄소가 적게 배출되는 방법을 찾거나 탄소상쇄 프로그램을 통해 그에 따른 책임을 이행하려 애쓸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금껏 욕심껏 움켜쥐고 살아온 삶을 회개하고, '탐욕으로부터 자유로운 삶', '생태적 한계 안에서 사는 삶', '새뿐만 아니라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이 자신의 필요를 온전히 누리며 사는 녹색도시'를 만들어 그곳에서 아름다운 공존을 이루게 될 것이다.
우리 모두가 천천히 가볍게 삶으로써, 모든 생명과 다시 연결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들과의 연결 속에서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지혜 - 배려와 존중, 균형과 돌봄 등의 소중한 삶의 가치를 되찾게 되길 바란다. 사실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땅을 경작하고 돌봐야 하는'(창 2:15)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려면, 반드시 지구와 지구상 생명을 존중할 뿐만 아니라 그들 생명 하나하나와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그때만이 하나님은 '참, 좋기' 때문이다(창 1:31). 우리가 창조세계 돌봄을 해야 하는 우선적 이유가 여기 있다. 주께서 그들을 좋다고 하셨고 지금도 그들을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지구상 생명의 생존이 곧 불가능해질 것이라는 두려움에서가 아니라, 우리가 늘 해야 하는 창조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