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우리 아이들의 꿈은 항공 마일리지를 많이 모아서 해외여행 갈 때 비즈니스 석을 타보는 것이다. 중학생과 초등학생인 아이들에게 사교육을 안 시키는 대신 어려서부터 출장 갈 때 함께 가거나 틈틈이 비용을 아껴 해외여행을 자주 하다 보니 자연스레 넓고 편안한 자리가 부러웠던 것 같다.
2006년 7월 출석 했던 교회에서 의사선생님과 자원 봉사자를 모집해 캄보디아로 단기 의료봉사를 다녀왔고 그 때 보았던 파란하늘에 매료되어 국내에서의 사업을 접고 2007년 12월, 캄보디아 프놈펜에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다. 첫 해외사업이고 가족 모두가 함께 이주하는 것 이라 고민도 많이 하고 나름 조사도 철저히 한다고 했는데, 모든 준비는 어설펐고 예측은 철저히 빗나가 캄보디아에서의 1여년의 시간은 시련과 고통의 연속 이었다.
청운의 꿈을 품고 의욕이 가득 찼던 시작과 달리 2008년 4월 외환위기, 7월 어머니를 여의고 3개월 후 아버지마저 어머니를 따라 하늘나라로 가셨고 아내와는 생활고와 생각의 차이로 자주 다투었다. 하루아침에 경제적으로 빈털터리가 되어 아이 학비는 물론 방세도 못내 결국 세간을 모구 처분해 빚을 정리하고 남은 돈으로비행기 삯을 마련해 옷가방 2개 끌고 2009년 1월 가족들과 초라하게 인천공항 으로 돌아왔다. 일 년 내내 여름뿐인 캄보디아에 살다보니 옷은 전부 여름 옷 차림이라 1월의 강추위에 아이들이 아빠의 사업 실패에 대한 짐을 지는듯하여 나를 더욱 힘들게 했다.
이렇듯 캄보디아의 파란하늘은 나에게 꿈과 희망을 주기도 하고 고통과 시련은 물론 사랑하는 부모님을 모두 여의는 아픔을 주었다. 한국으로 돌아와 처가와 동생네를 전전하던 때 용산참사가 일어났고 그들의 고통이 남의 고통이 아닌 나의 고통처럼 느껴져 카메라 하나 메고 용산 남일당을 서성이다 향린교회와 인연도 시작되었다.
결국 파란하늘은 나에게 새로운 세상에 대한 눈을 열어 주었고 지금은 경제적으로도 회복되고 아내와의 관계는 더욱 단단해져 그 날의 고통들을 추억하며 서로를 위로하곤 한다.
최근에 캄보디아의 법인 청산을 위해 자주 프놈펜으로 출장을 가고 10월에는 가족과 함께 여행 겸 해서 다녀왔다. 호텔 수영장에서 오랜만에 바라 본 캄보디아 프놈펜의 하늘은 언제나처럼 새파랗고 내가 하고자 꿈꾸던 하늘 아래는 고층빌딩들이 즐비하고 온통 공사장이 되어 하루에 하나씩 새로이 생겨나고 있다.
우리는 저 마다의 방법으로 행복을 꿈꾸며 살아간다. 10년 전 나는 내 힘으로 캄보디아에 고층빌딩을 세우겠다는 꿈으로 행복해 했고 우리 길목인들은 다른 이의 아픔을 함께 나누는 삶 속에서 행복을 느낀다.
이 곳 캄보디아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소유의 삶을 살아가며 행복해 한다. 도심이 아닌 시골로 갈수록 경제적으로는 가난 하지만 얼굴엔 미소 가득하고, 도심에는 고층빌딩이 수없이 펼쳐지지만 얼굴에는 욕심과 근심이 가득하다. 버려야 채워지는 것을 그들은 이미 알고 있고 자연이 주는 행복에 만족할 줄 아는 것 같다.
그런데 나는 또 고층빌딩을 꿈꾸며 지난 시련을 극복 하고자 캄보디아 행을 꿈꾼다.
나는 왜 파란하늘이 주는 행복에 만족하지 못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