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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목연재] 책이 가슴에 남긴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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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당 - 눈은 멀었지만 잘 볼 수 있는...

posted Jun 04,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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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호수 서옥경
글쓴이 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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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당

- 눈은 멀었지만 잘 볼 수 있는...

 

 

"어쩐지 전에 이미 본 사람 같구먼." 맹인이 주인공 화자에게 자연스럽게 인사하는 첫마디가 뒤통수를 내리친다. 화자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마찬가지입니다."라고 응수한다. 만약에 내가 같은 상황에 부딪힌다면 어떻게 대처했을까. 어쩌면 과하게 친절을 베풀지 않았을까 싶다. 내재한 정상인이라는 저급한 우월의식이 연민을 느끼게 했으리라.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 <대성당>은 주인공 화자 아내의 친구 맹인이 집을 방문하면서 전개되는 일상적인 소소한 이야기다. 하지만, 짧은 글 속에 응축된 메시지는 어느 대서사보다 강한 울림을 준다. 화자 아내는 맹인에게 책을 읽어주는 구인 광고를 통해 맹인을 위해 한때 일을 한 후 두 사람은 좋은 친구가 된다. 그녀는 맹인과 테이프를 교환하면서 계속 관계를 유지하고 가끔 그를 위한 시도 쓴다. 맹인은 화자 아내의 과거와 현재 모든 일을 테이프를 통해 알고 있다. 화자는 앞을 못 보는 사람을 알거나 만나본 적은 한 번도 없다. 아내가 반갑게 스스럼없이 맹인 친구를 맞이하는 모습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자, 왼쪽으로, 로버트, 예, 조심하세요. 의자 있으니까. 네, 그거, 여기 앉으세요. 이거 소파예요. 이 주 전에 산 소파예요."

 

맹인인 주제에 왜 턱수염을 길렀을까. 맹인의 필수품인 검은 안경을 왜 로버트는 쓰지 않았을까. 그리고 지팡이도 들지 않았다. 맹인은 내뿜는 연기를 볼 수 없을 텐데 로버트는 어떻게 담배를 피울까. 화자는 정상인이 만들어 둔 선을 침범하는 로버트가 영 마뜩잖다. 더군다나 죽은 맹인 아내 삶의 행로를 자신의 방식으로 상상하며 그녀를 안타깝게 여긴다. 화자는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 아내의 아름다운 얼굴과 안색을 전혀 인지할 수 없다는 선입견을 품고 있다. 팔 년 동안 찰떡같이 붙어 다닌 맹인 부부라고 하지만 분명 그들의 결혼생활도 불행했으리라 짐작한다. 맹인의 눈동자를 쳐다보며 화자는 몸을 오싹거린다. 저녁 식탁에서 맹인이 자기 접시에 담긴 음식이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알고 나이프와 고기를 다루는 모습에 넋을 잃는다. 정상인과 다름없이 행동하는 맹인은 화자에게 그저 외계인처럼 보일 뿐이다.

 

아내가 잠든 사이 어색함을 피하고자 켜둔 TV에서 교회와 중세에 관한 프로그램이 나온다. 맹인은 화자에게 대성당을 설명해 보라고 말한다. 화자는 자신이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는 대성당을 설명하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 이를 눈치챈 맹인이 두꺼운 종이를 가져와 그려보라고 한다. 화자 손 위에 맹인 손을 얹고 두 사람은 천천히 지붕과 첨탑 등을 펜을 꾹꾹 눌러가며 함께 그려나간다. 이어서 맹인 말대로 화자가 눈을 감고 손을 움직이는 동안 맹인 손가락들이 화자의 손가락들을 타고 있었다. 완성한 다음에도 화자는 눈을 뜨지 않고 처음 경험하는 경이로운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 "나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우리 집 안에 있었다. 그건 분명했다. 하지만 내가 어디 안에 있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눈을 가진 자라고 맹인보다 더 잘 볼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범람하는 이미지 홍수 속에서 너무 많은 것을 보는 현대인들은 오히려 본다는 것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사는지도 모른다. <대성당>에서 어쩌면 로버트가 맹인이 아니라 세상 보는 법을 몰랐던 주인공 화자가 맹인이 아닐까. 환한 빛 속에서 보지 못한 더 넓은 세계를 보기 위해 내면에 귀를 기울이고 조용히 눈을 한 번 감아본다. "자네 인생에 이런 일을 하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겠지. 그렇지 않나, 이 사람아? 그러기에 삶이란 희한한 걸세." 맹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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