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슐츠씨
– 오래된 편견을 넘어선 사람들
박상현 저, 어크로스, 2024
이 책을 나의 첫 책으로 꼭 소개하고 싶었다. 오래된 편견을 넘어선 사람들이라는 부제가 붙은 <친애하는 슐츠씨>의 저자 박상현은 구독 기반 매체인 <오터레터>를 통해 문화나 정치 등 다양한 분야의 이슈를 때론 흥미롭게 때론 의미 있게 소개하고 있는 스토리텔러다. <오터레터>에 담긴 내용들 중 일부를 추려서 한 권으로 묶은 것이 이 책으로, 차별과 편견과 다양성에 대한 이야기들을 풀어나가면서 이를 없애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이 있었다고, 일견 힘없어 보이는 그들이 결국 세상을 바꾸었다고, 차분하지만 매우 강력하게 말하는 글들이 담겨 있다.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아주 오래된 습관'으로 흡연의 예를 든다. 담배 피는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던 시절, 사무실에도 집 거실에도 늘 놓여 있던 재떨이와 그 속에서 뭉게뭉게 피어오르던 담배연기의 기억은 내게도 있다. 몸에 해로운 흡연 습관을 가급적 길게 유지하게 하는 것은 담배 회사들의 지상 목표였고 따라서 흡연이 해롭지 않다는 이미지를 은연중에 각인시킴으로써 개인이 습관적으로 흡연을 지속하게 한 긴 세월이 있었다. 결국 이를 폭로한 용기 있는 사람들의 증언과 물증으로 미국 46개 주의 법무장관들이 대형 담배 회사를 대상으로 벌인 소송에 승리하게 되었고 그 결과 흡연은 세상에서 서서히 사라져 가게 되었다. 이처럼 인류의 오래된 습관들, 즉 무지에서 비롯된 차별과 배제라는 주제에 대해 이 책은 말하고 있다.
각 에피소드들이 주는 울림은 크다. 집안 환경이 어려운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을 갔을 때 왜 적잖은 비율의 아이들이 학업을 그만두는지 ('세상의 모든 멜라니들'), 센트럴파크에서 새를 관찰하던 흑인 중년 남성이 선의로 도와주려던 백인 여성에게 왜 허위 신고를 당해야 했는지 ('센트럴파크의 탐조인'), 여자의 옷에는 왜 수많은 세월 동안 주머니가 없어야 했는지 ('여자 옷과 주머니'), 심지어 어떤 글자 폰트는 왜 특정 문화나 국가, 인종 집단을 대표하게 되었는지 ('완튼 폰트'), 간성 (intersex)이라는 관점에서 여성과 남성의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캐스터 세메냐의 정체'), 인종 특유의 억양이나 이름을 가질 경우 왜 차별을 받게 되는지 ('코드 스위치'), 여성성에 대해 사람들이 가지는 편견은 어떤 것이 있는지 ('완벽하지 않은 피해자'), 그리고 단지 남성이 아니라는 이유로 겪어야 했던 여성들의 배제는 어떻게 일어났는지 ('메리 포드의 결격 사유') 등을 실제로 일어났던 일을 위주로 깊이 있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접근해 간다. 결국 빈곤과 인종과 성별 등에 대한 습관적이며 일상적인 인식은 아무 불편함 없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차별과 배제의 길로 이끌어지는데, 어쩌면 이래서 더 무서운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러한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은 역시 사람이다. 이 책에 쓰인 구절처럼, "사회의 변화는 한 사람의 힘으로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특별한 한 사람이 없으면 일어나기 힘들었을 변화도 있다." 남자들의 전유물이었던 (그러나 여성이 뛰면 안 된다는 규정은 없었던) 보스턴 마라톤을 최초로 공식 완주한 여성인 캐서린 스위처. 그녀의 곁에는 스위처의 의지를 지지해준 (남성인) 브릭스 코치와 남자친구가 있었다. 인기 만화가 슐츠에게 인종 편견을 극복하기 위해서 <피너츠> 만화에 흑인 아이를 등장시킬 것을 요청한 해리엇 글릭먼. 그녀의 제안이 받아들여진 데에는 이 제안을 편견 없이 진지하게 받아들여 자신의 만화에 프랭클린 암스트롱이라는 흑인 아이를 등장시킨 (백인인) 찰스 슐츠가 있었다. 장애인도 똑같은 권리를 가진 시민임을 부르짖으며 싸운 주디 휴먼. 그 긴 싸움 끝에 미국 정부는 1990년에 미국장애인법을 통과, 발효시킨다. 치열하게 살아간 주디 휴먼의 75년 인생이 평생을 바쳐 이뤄내고 우리에게 남겨준 선물을 생각하며 "우리는, 나는 다음 세대에게 어떤 선물을 남길 수 있을까."라고 이야기하는 저자의 말이 문득 가슴에 사무치게 다가온다. 그리고 마지막 에피소드의 주인공인 데이비드 케이 박사. 부시 정부의 이라크 전쟁이, 수천 명의 군인과 10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죽어야 했던 그 전쟁이 잘못된 혹은 허위 정보에 기반하여 일어났음을 솔직하게 밝힌 그의 자세는 비록 쓸쓸히 생을 마감하긴 했으나 전문가의 용기란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의 상황을 충분히 존중하고 존중받으며 살 수 있는 세상이 가능하겠냐, 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디에나 그런 편견은 있을 수밖에 없고 거기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의 지난 시간들을 돌이켜보면 지금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 예전엔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 당연하지 않았던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바꾸기 위해 긴 시간 노력한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 덕분에 지금이 있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변화는 그렇게 일어나는 것이고 세상은 갈지자처럼 두서없이 나아갈지라도 결국엔 긍정적으로 변화해 간다는 것 또한.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우리 모두 함께 용기를 얻을 수 있기를 바란다. 길은 원래부터 있었던 게 아니라 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길이 되는 것이라고 한 루쉰의 말처럼, 모든 차별과 편견과 배제가 없어지는 그날을 위해 작은 것에서부터 함께 할 수 있기를, 이를 위해 서로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줄 수 있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