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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목연재] 저물녘 하늘을 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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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이 사막을 건너는 법 13

posted Sep 10,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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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오낙영
발행호수 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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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바하르는 물주머니를 손에 들고, 몇 장 남지 않은 난이 담긴 자루를 둘둘 말아 허리춤에 묶고, 희붐한 빛이 황야의 대지를 물들이기 시작하는 새벽녘에 병자의 초막을 나섰다. 누렇게 변해버린 관목이 듬성듬성 박혀 있는 거친 땅을 지날 땐 발을 잘 못 디뎌 돌덩이에 발가락이 찢기기도 했고, 잔가시가 돋아 있는 야생초의 잎에 발목이 쓸리기도 했지만, 마음만은 오아시스의 물길에 뿌리를 내린 대추야자의 무성한 잎처럼 싱그러웠다. 그렇게 반나절을 걷자 풍경이 바뀌어 갔다. 관목들도 더러는 푸른색을 띠기 시작했고, 황무지에는 어설픈 초지가 카나트 공사 현장의 남자들이 걸쳤던 너덜너덜해진 홑겹의 민소매 작업복에 난 구멍처럼 듬성듬성 이어졌다. 굴바하르는 거칠고 억센 풀일망정 염소나 야생동물에겐 훌륭한 먹이가 될 것이니 가까이에 유목하는 목자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녀는 손으로 차양을 하여 눈 위에 올리고 두리번거리며 걸었지만, 눈에 띄는 것은 없었다. 낮은 구릉들이 엇갈리며 이어져 눈을 어지럽혔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 보니 멀리 제법 높은 능선이 이어지다가 주저앉은 곳에 오두막 한 채가 보였다.

오두막은 유목하는 목자들이 머무는 간이 숙소였다. 비탈진 경사면을 파내어 그대로 뒷벽으로 삼고 앞면과 측면엔 돌을 쌓아 벽을 세웠다. 그리고 몇 개의 나뭇가지를 얽어매고는 그 위에 양모로 만든 두꺼운 펠트를 얹어 지붕으로 삼았고, 다시 그 위엔 몇 개의 돌을 얹어 놓았다. 출입구엔 거적으로 된 가리개조차 없었는데, 애초부터 문을 달지 않았던 것인지 아니면 오래되어 삭아 없어진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세간이랄 것이 아무것도 없었으며 심지어 누군가가 머물고 간 흔적조차 없었다. 원래 목자들의 오두막이란 게 주인이 있는 것이 아니어서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곳이지만, 다음 이용자를 위해 일체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굴바하르는 목자들의 오두막에서 밤을 기다렸다. 그녀는 난을 한 장 뜯어 요기를 하고,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묶었던 긴 머리를 손가락으로 빗어 모아 오른쪽 어깨 앞으로 늘어뜨리고, 허벅지까지 봉제선이 터져있는 치마를 옆으로 둘러서 입었다. 그녀는 조금 상기된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설렘 같은 것은 아니고 비장한 결심 뒤에 찾아오는 심리적 동요 같은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아,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죠?

아베스라가 찻잔을 입에 대려다 말고 물었다.

-굴바하르에게 의식의 대전환이 온 거요. 남편의 죽음 이후, 그녀에게 닥친 일련의 몹쓸 사건들을 거치면서, 삶을 대하는 태도와 방식에 대한 새로운 모색이 이뤄진 거라고 봐야겠지요.

아오슈나르의 말투는 건조했지만, 어휘의 틈새를 파고든 물기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일그러진 전환 같아 보이는군요.

아베스라가 다소 아쉬워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아오슈나르의 얼굴은 굳어지며 말은 단호해졌다.

-이 시대의 여자가 홀로 살아남기 위한 고육책일 테지요. 그녀에게 돌을 던질 수는 없어요. 짐승들의 땅에서 홀로 사람으로 살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안타깝지만 환경은 인간에게 절대적입니다. 그걸 거스를 수 있는 사람은······그렇게 타고났거나, 자아가 생성되기 전부터 훈육되었거나 ······.


그 밤, 오두막에 찾아든 것은 늙은 목부였다. 겨우 스무 마리 남짓한 염소를 몰고 해거름 녘을 서둘러 도착한 늙은 목부는 먼저 오두막에 든 사람이 여자라는 것을 알고 몹시 난감해하였다. 그는 오두막 안으로 들지도 못하고 돌을 쌓아 만든 우리 앞에 앉아 하릴없이 시간을 고문하고 있었다.

굴바하르는 그의 코끝에 바짝 다가섰다. 그 늙은 목부가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지만, 눈앞에 서 있는 여인의 치맛자락 사이로 보이는 허연 다리를 보고는 심란해졌다. 그는 몸을 돌려 앉은 채로 말했다.

-와 여기 있노. 젊은 처자 혼자 와 여기 있는가 그 말이라.

굴바하르는 아무 말 없이 노인의 팔을 잡아 일으켜 오두막 안으로 들였다. 어둠이 내리고 있는 때여서 오두막 안은 더 어두웠다. 노인이 벽틈에 놓여 있는 양지(羊脂) 호롱불을 찾아 심지에 부싯돌을 댕겼다. 몇 번을 부딪쳐 겨우 불씨를 받은 후에야 심지가 불꽃을 피웠고 오두막은 갑자기 정적이 깊어졌다. 노인은 호롱불 빛을 받으며 눈앞에 서 있는 젊은 여인의 아련한 모습에 말을 찾지 못했고, 굴바하르는 머릿속을 어지럽게 흐르는 오만가지 상념에 입술이 굳어 있었다.

-저, 저, 젊은 처자가, 와, 호, 혼자 이런 데 있노. 여, 여기가 어덴지 모르나? 여, 여긴 나, 남자들의 집인기라. 그런데 와 처, 처자가 그것도 호, 혼자 여기 와 있나 그 말인기라.

어색한 상태로 굳어 있던 진공의 공간에 균열을 낸 것은 노인이었다. 그러나 노인의 말은 누구의 대답을 듣기 위해 던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공간을 확인하기 위해 내뱉는 영역표시였다.

-아재요, 지를 살려주소. 시방, 지를 살려줄 수 있는 사람은 아재뿐이시더. 참말이니더.

굴바하르는 늙은 목부의 무릎에 두 손을 얹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그녀는 반드시 늙은 목부의 마음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자신을 위해 그린 미래를 위한 징검다리가 필요했다.

그날 밤, 굴바하르는 죽어있는 노인의 남성을 깨우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다.


아오슈나르의 얘기를 듣고 있던 아베스라는 깊은 탄식을 했다.

-참으로 아픈 얘기로군요.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한 걸까요?

-굴바하르는 디딤판이 필요했어요, 자신을 뛰어넘을 디딤판이. 젊은 여자 혼자서는 세상에 나갈 방법이 아예 없는 세상이니까요······.


굴바하르는 늙은 목부의 영혼을 재구성하였다. 꼬박 이틀 밤낮을 들인 지난한 작업의 결과였다. 돌담 우리에 갇힌 염소들이 배고파 울부짖고 미쳐 날뛰는 동안, 노인은 인생의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달뜬 환희송에 몸이 녹아들고 있었다. 몸이 녹아드는 동안 굴바하르가 내던지는 말에 그저 '그라이시더! 그라이시더!'하며 신음처럼 대답하거나, '그리 하꾸마. 내사, 시키는 대로 하꾸마!'하고 소리를 지르며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그렇게 늙은 목부는 굴바하르의 괴뢰가 되었다.

굴바하르와 늙은 목부는 그길로 '신들의 꽃밭'이라 불리는 매음굴로 갔다. 늙은 목부는 그녀가 일러준 대로 '살기 에러버 입 하나 줄일 작정이시더. 소박맞고 돌아온 딸인데 색기는 좀 괘않니더! 얼매나 쳐 줄랑교?' 하며 흥정을 했다. 그러자 몸집이 크고 뚱뚱한 여자와 상대적으로 체구가 작고 깡마른 남자가 나와 아베스라의 입을 벌려 이빨을 살펴보고 치마를 걷어 올려 엉덩이를 쓰다듬더니 손바닥으로 찰싹하고 때렸다. 그것으로 굴바하르는 '신들의 꽃밭'에 심어진 꽃 한 송이가 된 것이었다.


-아베스라여! 우리가 신의 세계를 탐하고 있는 사이, 세상은 마른 수건에 물이 스며들 듯 시나브로 악의 안료에 염색되어 가고 있었소.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은 신의 세계에서 몸을 빼어내 세상의 악과 싸워야 하는 거요.

이야기 중에 굴바하르의 고난 장면에 이르면 아오슈나르는 예외 없이 격정적으로 변했다. 그때마다 두서없이 비약하는 논조를 잘못 따라가다 보면 자칫 헛다리를 짚게 된다.

-아오슈나르 님의 말씀대로면 악은 만연해 있고 전선은 너무 넓습니다. 큰 악은 눈에 띄기 쉬우나, 작은 악은 보이지 않습니다. 큰 악은 모두의 표적이 되니 승패가 분명하나, 작은 악은 애써서 보지 않으면 알아챌 수도 없고, 또한 누구나 저촉하는 바가 있으니 서둘러 나서 싸우려 하지 않지요. 이런 와중에 우리는 누구와 대적해야 합니까?

아베스라는 목울대를 넘어가는 찻물이 잔가시가 돋친 풀잎처럼 느껴졌다. 보이지만 만질 수 없는 어떤 것처럼, 세상의 선악에 대한 인식과 대처는 보글보글 끓고 있는 찻물의 김처럼 허망하다고 느껴질 때가 많다. 그래서 그것을 손아귀에 낚아 움켜쥐려고 마음이라는 심연의 저 바닥까지 내려가 보기 위해 공부하는 게 아니겠는가. 인간의 마음, 온갖 상념과 주의 주장의 원천인 그것을 똑바로 보지 못한다면 다 부질없는 것이 되어버릴지 모른다. 이 절박함을 가지고 백척간두에 서야 한다.

-그대의 말을 듣고 있으면 희망보다는 비관이 먼저 내 숨통을 조일 것 같소.

아오슈나르가 허허로운 웃음을 지어 보이며 주전자를 기울였다.

-그럴 리가요. 앙그라 마이뉴가 제아무리 기승을 부린다 한들 결국은 아후라 마즈다 님에게 봉인되어질 운명인 것을요. 다만 우리가 보고 있는 선악은 인간의 산물이지 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스스로 마음을 굳게 하여 진실하게 산다면 몸이 어디에 처하든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옛날에 어떤 왕이 문무백관과 현자들과 인근의 백성들을 불러놓고, 도성 앞의 강물을 거꾸로 흐르게 할 수 있겠냐고 물었습니다.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죠. 한참 후에 한 창부가 왕 앞에 나와 '나는 내게 오는 이들이 대가를 지불하면 귀천을 가리지 않고 똑같이 사랑해 주었다. 이것이 진실이라는 것을 걸고 말하노니, 내일 아침에 강물이 거꾸로 흐를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과연 다음 날 아침에 강물은 거꾸로 흐르기 시작했고요.

-처신이 아니라 진실함이 문제라는 말씀이구려.

아오슈나르는 신음처럼 말을 내뱉고는 이내 눈을 감았다. 그러나 눈꺼풀 뒤에서는 눈동자가 분주했다.


'신들의 꽃밭'에서 굴바하르는 2년여를 애초에 그곳에서 나고 자란 사람처럼 살았다. 자신의 운명을 탓하지도 않았고 자신을 찾아오는 남자들을 원망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그저 자신의 역할에 충실한 유랑 연희패의 배우같이 살았다. 세상이란 무대의 중앙에 서 있는 사람은 오직 자기 자신뿐이었고 다른 이들은 모두 들러리로 생각했다. 그런 생각은 자신을 지탱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하란 일대의 남성들에게 그녀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자, 그녀는 아무에게나 자신의 몸을 내어주지 않아도 될 만큼의 힘을 가지게 되었다. 사람을 가리게 되자 먼저 그 자신이 변해갔다. 황야의 야생초는 사라지고 잘 가꾸어진 정원의 장미가 되어 갔다. 화려함은 실제 이상의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사람들은 허상이 만들어 내는 그림자를 쫓는 부나비가 되어 왱왱거리며 그녀의 주변으로 날아들었다. 그러나 화려하게 빚어진 인공의 빛과 그것을 찾아 날아든 부나비는 더불어 서로를 무너뜨리고 있었다.

노루즈 축일을 지내고 달포쯤 지난 어느 날 해거름 녘이었다. 화려한 복장에 양쪽 귀 위로 기다란 깃털이 꽂혀있는 두건을 쓴 사람이 말을 타고 나타났다. 그는 일반인들이 출입하는 문이 아닌 주인의 내실을 통해 들어와 주인 남자의 안내를 받으며 굴바하르의 방을 찾았다. 밤은 애매했다. 폭풍으로 달려온 남자는 뭍에 오르자 기세를 잃은 미풍이 되고 만 것이다. 남자는 민망해했고, 이미 교만해져 있던 굴바하르는 남자를 경멸했다. 그게 화근이었다. 굴바하르의 태도에 격분한 남자는 아직 밤이 무르익기도 전에 떠났다. 그러고 나서 보름달이 이지러지기 시작한 때였다. 요란한 치장을 한 여자가 건장한 남자 두 명의 호위를 받으며 '신들의 꽃밭'으로 거칠게 들어섰다. 주인 내외가 호들갑을 떨며 그녀를 맞았으나, 여자는 다짜고짜 데리고 온 남자들을 시켜 굴바하르를 끌어내 초주검이 되도록 폭행을 했다. 그리고는 '창부의 본분을 망각하고 교만을 떤 죗값'이라며 일별을 하고 떠나갔다. 얼마 후, 하란의 지역관리가 찾아와 주인을 윽박지르고 돌아갔고, '신들의 꽃밭' 주위에 관병들이 배치되었다. 꽃밭을 찾던 사람들은 삼엄한 분위기에 질려 발길을 돌렸고, 주인과 꽃들이 굴바하르를 저주했다. 결국, 그녀의 짧은 영화는 끝장이 나고 도회 밖으로 내쳐졌다.


-남자는 전장을 누비며 대단한 전공을 세워 상장군의 지위에 오른 장수였고, 여자는 그의 애첩으로 한때 '신들의 꽃밭'에서 성가를 드높이던 절세미인이오. 그녀는 남편의 상심한 남성을 회복해 보고자 굴바하르의 명성에 기대어 본 것인데, 그만 어긋나고 말았소. 이걸 운명이라고 해야 할지, 그대가 말한 진실한 마음의 상실에서 비롯된 자업자득이라 해야 할지······. 어쨌든 굴바하르는 미쳐 다 펴지도 못한 날개를 접고 다시 고치 속으로 몸을 구겨 넣어야 했던 것이오. 당시 나는 미타니 지역을 두루 순회하는 전도사제였는데, 지치고 무뎌진 심신을 갱신하기 위해 그곳 사원의 전도사제 숙소에서 머물고 있었소. 그러던 중 우연히 도서관에서 우루크에 대한 양피지 두루마기를 보고 마음이 동하여 곧장 행장을 꾸렸소. 사원에서는 고맙게도 먼 길이라고 낙타 한 마리를 내어주었고, 나는 서툰 낙타 몰이꾼이어서 타다 끌기를 거듭하며 하란을 막 벗어나고 있었소이다.

아오슈나르는 잠시 말을 놓고 숨을 깊게 들이마시곤 멈추었다가 가늘고 길게 내쉬기를 여러 번 했다. 아베스라가 주전자를 들어 그의 찻잔을 채웠다.

-낙타가 온순하다는 얘기는 들어 알고 있소만, 처음이셨을 듯한데 다루기가 쉽던가요?

아베스라가 칠 부 능선에서 숨 고르기를 하는 고원의 여행자처럼 잠시 분위기를 허틀어 버릴 심산으로 이야기의 곁가지를 붙들어 세웠다. 아오슈나르가 지나치게 굴바하르의 이야기 속으로 끌려 들어가고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하하! 꼬박 이틀을 사원의 노비에게서 배웠다오. 앉히고 타는 법에서부터 가고 서게 하는 법 등등. 이 녀석이 어리버리한 새 주인의 말을 어찌 잘 듣던지, 내가 그만 감격하지 않았겠소? 그래서 이름을 지어주마고 했더니, 노비 녀석이 '하이고, 됐니더. 그까짓 즘생에게 이름이라니 가당키나 합니껴?' 하면서 펄쩍 뛰더군요.

아오슈나르가 낙타 이야기를 하면서 한결 느긋해진 걸 본 아베스라는 그에게 자흔처럼 드리워진 애증의 미로를 보는 듯해서 가슴이 아려왔다.

-그래서 이름을 지어주기는 한 거죠?

아베스라가 짐짓 유쾌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아하하! 그럼요, 그럼요. 내게 낙타 모는 법을 가르쳐준 사원의 노비에게 하루 이틀 가는 길도 아닌데 이름이라도 있어야 내가 덜 심심할 거 아니냐며, 앞으로 저놈을 바토(vātō 바람이라는 뜻)라 부르겠다 했더니, '마구쉬 님, 그라지 말고 내 이름이나 알고 가이시더!' 그럽디다. 순간 몽둥이로 머리를 가격을 당한 듯, 띵한 게 큰 실수를 했구나 싶더이다. 정작 내게 여러 가지로 도움을 준 사람을 사원의 노비라고 이름도 묻지 않고 가벼이 여기고 있던 나 자신을 본 것이지요. 그의 눈 속에 서 있는 내가 그렇게 저열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무릎을 꿇고 그에게 절을 하며 '큰 가르침을 주신 그대여! 내가 존호를 여쭙습니다!' 했더니, 그는 '사람을 뭘로 보니껴? 천한 놈이라고 가지고 노니껴?' 하면서 화를 내며 가버립디다.

아오슈나르의 떨떠름한 표정을 보자 아베스라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이고, 얼른 쫓아가서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이름을 물었어야 했군요.

-한 발 늦었더랬소. 그가 사원의 동료에게 나를 지칭하며 '씨발놈, 좆같은 놈'하며 한바탕 욕지거리를 퍼붓고는 그 길로 씩씩거리며 밖으로 나가버렸답디다. 하는 수 없이 그 동료에게 그의 이름을 묻고 대신 사과의 말을 전해달라고 부탁하는 수밖에 없었소. 그리고 나는 우르크를 향해 출발했지요. 낙타 등에 앉아 가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피슈카르, 아, 그 노비의 이름이오. 피슈카르가 화를 낼만 하더이다.

-옛날에 한 수행자가 스승을 만나 그동안의 수행 중에 얻은 의문을 풀기 위해 길을 떠났지요. 스승이 계신다는 산정을 향해 올라가다가 바위들이 어지럽게 엉켜있는 곳에서 붉은 여우의 사체를 발견했어요. 여우의 사체가 있는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굴이 있었고, 굴에는 아직 눈도 뜨지 못한 새끼들이 배가 고파 낑낑거리며 있었지요. 수행자는 어쩔 줄을 몰라하다가 죽은 어미를 위해 경을 읊기 시작했지요. 그러고 있는데 어느 사이에 스승이 다가와 혀를 차며 말했습니다. '경을 읊는다고 그것들이 알아들을 것이며, 눈도 뜨지 못한 새끼들 먹을 게 생긴다더냐?'하고 말이죠. 스승은 이미 어린 새끼들을 위해 양젖을 구해 왔던 겁니다.

아베스라의 이야기를 들은 아오슈나르가 탄식했다.

-허, 내 얘기네, 내 얘기야!

-우리가 흔히 범하는 오류지요. 속인들을 위한답시고 하는 먹물들의 행위가 그들에게는 소용없는 일인 경우가 허다하지요. 밥이 필요한 사람에게 윤리와 도덕을 말하는 건, 별을 보며 쑥떡을 먹이는 거나 매한가지니까요. 또 한 가지, 그들에게는 공부하는 사람들이 쓰는 직관과 통찰의 언어가 폭력일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에게는 그것이 깨달음의 통로이고 표현일 수 있으나, 그들에게는 제 허벅지 가렵다고 남의 허벅지를 긁는 것으로만 보일 테니까요.

-허! 비통 지경이구려. 그렇다고 매번 그들이 원하는 기복이나 할 수도 없는 일이잖소.

-앞에서 환경의 중요성을 언급하셨듯이 그들 삶의 조건을 바꿔주지 않으면, 좋은 생각을 하고, 좋은 말을 하며, 바른 행동을 하라는 권면은, 뜨거운 사막 한가운데에 나무 한 그루를 심어놓고 잘 살아라 기도하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겁니다. 아오슈나르 님이 '니루샤'를 통해 여인들에게 덧씌워진 운명의 굴레를 벗어나게 하신 것이야말로, 그들의 토대를 재구축하신 일이겠지요.

아베스라는 잠시 말을 멈추고 겸연쩍게 웃었다.

-아, 이거 참! 시생이 곁가지에 있는 낙타 얘기를 시작했다가, 본류로 돌아가는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제 드디어 굴바하르를 만나게 되는 거지요?

-그렇소! 그녀를 통해 이 아오슈나르의 언어가 굴절되고, 성속이 전도되는 광경을 보게 될 것이오.

아오슈나르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계속)

오낙영 사진.jpg

오낙영(글쓴이, 조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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