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부터 나아리까지 자전거 순례
월성원전인접지역주민이주대책위원회 10주년
2024년 8월 25일 일요일 고성 통일전망대~화진포 9km
월성원전인접지역주민이주대책위원회 10주년인 2024년 8월 25일.
고성 통일전망대 인증센터에는 배롱나무 분홍 꽃이 활짝 피어있었다.
오후 네 시 반, 빨간 부스 앞에서 '이주만이 살길이다' 노란 조끼를 입고 초록 자전거 뷔나를 타고 출발했다. 오랜만에 자전거에 올라 잠시 어색한가 했는데 곧이어 바람을 가르며 바다 곁을 달렸다.
오후 다섯 시에 화진포까지 그리 어렵지 않게 도착했다. 맨발로 바닷물에 몸을 담갔다. 완만한 화진포 모래 위에 바다가 육지와 닿으며 담겨 있었다.
오후 7시가 넘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고성 통일전망대 앞
8월 26일 월요일 고성군 거진읍~화진포~고성 / 고성~북천철교~고성 41km(50km)
이른 아침에 거진에서 백암도를 거쳐 화진포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전날도 이날도 배롱나무꽃이 피어있었다. 그리고 간성 북천철교까지 갔다가 다시 거진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비가 흩뿌렸다. 비바람에 무언가 날아갔다. 아쉬움인지 미련인지 모르겠다.
거진해수욕장
8월 29일 목요일 간성 터미널~봉포해변 24km(74km)
친구가 사진전 갤러리에 오는 바람에 서울 동서울터미널에서 오후 3시 버스를 탔다.
간성 터미널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5시 50분. 시외버스에서 내려보니 전에 걸어왔던 곳이었다. 3km 위에 있는 북천철교는 포기. 있는 힘껏 봉포해변까지 달려야만 했다. 그런데 시작 지점에는 자전거 전용도로가 없었다. 대형차들이 씽씽 달리는 대로변을 '이주만이 살길이다'노란 조끼를 입고 짐가방을 초록 뷔나 앞에 달고 달렸다. 위태로웠다.
잠시 후 가진항에 다다르자 머물고 싶을 만큼 고즈넉하면서 깔끔한 바다가 펼쳐졌다. 국토종주 동해안 자전거길로 공현진, 화진포 가기 전에 야영했던 곳을 지나 송지호 지나 길이 사라져 잠깐 헤매다가 삼포 지나 자작도를 지나니 문암리 유적지를 지나 백도해변이 나왔다. 얼굴이 사라지고 있는 미륵불이 서 있던 곳에 그대로 있었다. 자식을 얻으려는 이나 풍어를 기다리는 이들의 바람대로.
아야진에 당도했을 때는 어둠이 내리고 조명이 켜졌다.
공사 중인 길가를 위험하게 가는데 건너편 청간정은 깜깜해서 찾아갈 수 없었고 간신히 봉포항쪽으로 길을 들어섰다. 인증센터는 마을 끝자락에 있어 도장을 찍고 예약해 둔 숙소로 되돌아왔다. 긴장과 땀에 젖은 옷을 벗고 씻은 후 근처 문 연 식당을 찾아 나섰을 때는 밤 8시가 넘었다. 단품인 뼈 해장국을 먹고 조반 거리를 사서 숙소에 들어와 내일을 기약했다.
8월 30일 금요일 봉포해변~정동진 94km(168km)
아침 7시 반에 미역국밥과 요거트와 견과류를 먹고 9시에 숙소에서 나왔다.
조금 내려가니 바다정원이 보였다. 그 옆 불에 탔던 소나무는 진물 흐르던 흉터가 사라졌고, 바다 쪽으론 아기 소나무들이 가득 심겨 있었다. 날이 어두침침해서 바다도 흐렸다. 4년 전 그 바다에서 몸을 담갔었다. 실내 수영장에서 물안경 쓰고 오리발을 꼈을 때나 곧잘 하던 수영은 바다에서 맥을 못 추었었다.
10:14 고성군을 떠나 속초시로 들어갔다. 반대편 오르막을 차와 도보로 나눠 걸어가던 4년 전이 떠올랐다.
10:30 영금정에 다다랐다. 전에는 가보지 못했던 곳이었는데 새로 지은 곳과 원래의 정자에 다 올라가 보았다. 파도가 석벽에 부딪치면 신비한 음곡이 거문고 소리처럼 들려서 영금정(靈琴亭)이라 한다는데, 가히 널찍한 암반이 동해안에선 보기 드문 지형이었다. 영금정에 오르자 어떤 남자분이 내 조끼를 보고 사진을 찍겠다고 하셨다. 관심 가져주심이 고마웠다.
아바이 마을로 들어서는 길에 처음으로 넘어졌다. 철로 된 다리를 넘어서다 얕은 턱에서 바퀴가 올라타지 못하고 쓰러지자 기운 없는 나도 덩달아 쓰려졌다. 가뜩이나 아픈 왼팔이 비명도 지르지 못할 정도로 아팠다. 11시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아바이 마을의 유명 식당은 만석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리에 올라가 가로질렀다.
속초해변을 지나 대포항을 지나니 설악산 해맞이공원이 나왔다. 물치항을 지나는데 그때 시소처럼 움직이던 의자가 그대로 있었다. 하지만 앉아보지 않았다. 몽돌소리 길에선 쉬고 싶었지만 갈 길이 멀어서 내쳐 달렸다.
양양 후포항으로 들어가 낙산해수욕장을 지나 다리를 건너기 전에 모닝커피를 마시던 편의점이 보였다. 긴 다리를 건너 가평리와 수산리를 지나는데 더웠다. 동호해변 인증센터가 나왔다.
12:50 동호해변에서 쉬고 싶었다. 빨강 초록 그네 둘이 그대로 있었다. 야영했던 곳을 찾으니 못 보던 카페가 생겼다. 손양면 이장협의회 하계수련회 옆 한 달 전에 개업한 카페에 들어가 아이스 카페라테와 베이글 당근 라페를 시켰다. 2층으로 가 앉아있으니 통창 앞으론 파란 바다가 보이는데 사방이 고요했다. 식사와 충전 후 비어 가는 물병에 찬물을 가득 담아 길을 나섰다. 무더웠다. 카페는 친절했으나 기다리고 있던 바깥은 무더웠다.
하조대를 지나니 현북면 기사문리 만세고개가 나왔다. 그곳에서 만나기로 했었다. 38선 휴게소. 그곳에서 캔커피를 사서 마신 기억이 난다. 어쩜 4년 전인데 기억이 이렇게 선명할 수가 있을까. 나는 박제되었던 기억을 확인해 보러 이곳에 다시 온 것일까?
길고 높은 램프를 지나 내려가니 조개굽는마을 동산리가 나왔다. 그 앞에서 찍힌 벗이 환상처럼 떠올랐다. 나는 일곱째별의 탈핵 순례 사진전을 하고 있는 갤러리 입구 모니터에서 한 달 넘게 쉬지 않고 상영되고 있는 720개 정류장을 기억하고 있던 거였다. 그래서 지나온 모든 마을이 생생하게 눈에 익었다.
남애항에 독수리 5남매가 묵었던 민박 겸 가게 앞에서 자전거를 멈췄다. 주인 할머니가 그대로 계셨다. 너무나 반가워 캔커피, 포카리스웨트, 생수. 마실 수 있는 걸 다 사서 마셨다. 카드 사용이 안 되어 현금으로 잔돈을 돌려드려도 4000원어치밖에 팔아 드리지 못했다. 대량으로 판매하는 편의점보다 하나둘 파는 구멍가게가 훨씬 싼 건 주인이 세상 이치에 어두워서일까, 현대 산업화가 영악해서일까. 할머니는 연신 반복하셨다.
"혼자 다녀? 무섭지도 않아? 왜 혼자 다녀."
그런 말씀은 이제 하도 많이 들어 아무렇지도 않다.
"그러게요. 같이 다닐 친구가 없네요."
오래 긴 길을 걷고 달려도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게 하는 건 기암절벽도 망망대해도 아닌, 전에 뵈었던 할머니 한 분. 바로 사람이었다.
'그래도 저는 갑니다. 다시 뵐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때까지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남애리에서 함께 걸었던 지경리, 모두 앉아 쉬고 노래 불렀던 지경리에서 점심 식사했던 주문진항. 벗들과 함께했던 추억은 지명이 나타날 때마다 새록새록 피어올랐다.
이름난 들어도 예쁜 순긋해변을 지나 5시 14분, 경포해수욕장에 도착했다. 발이 땀이 젖어 발가락에 물집이 잡히기 직전이었다. 의자에 앉아 발을 말리고 바셀린을 발랐다.
송정을 지나니 내륙으로 길이 났다. 산을 넘고 커다란 발전소를 지나 안인항에는 머물만한 곳이 없었다.
오후 7시가 넘어 어둠이 내리는데 그때 그곳에 다다랐다. 다리 위 자전거 쉼터. 보도블록 사이사이 잡초가 지저분하게 자란 쉼터에는 닳고 벗겨진 의자가 그대로 있었다. 4년 전 정동진을 지나 걸어서 예정했던 숙소 자리를 지나 엉뚱한 그곳에서 일출을 맞았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안인진에서 아침을 맞았었다. 그러나 어둠이 점점 진하게 내려오고 나는 서둘러 페달을 밟아야 했다.
깜깜한 등명락가사 주차장에서 톰의 차가 뒤에서 와서 섰다. 전날 연락한 톰은 삼척 우체국 앞 6시 피케팅 후 나를 만나기 위해 안인항으로 가셨다가 내가 정동진까지 가겠다는 바람에 다시 내려오셨다. 나는 만나자마자 인사도 없이 정동진까지 자전거를 타고 가겠다고 했다. 4.3km 남았는데 차를 타고 갈 수 없었다.
4년 전 깔깔 웃던 정동진은 어둠 속에서 휑했다. 톰은 식당을 잡고도 공원 공사 중이라 찾기 힘든 인증센터까지 갔다 오는 나 때문에 한참을 기다리셔야 했다.
사람을 만난다는 건, 그것도 아는 사람을 만난다는 건 참 좋다. 안심이 되고 즐겁다. 톰과 나는 언젠가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만난 게 마지막이었을 텐데 몇 달 전에 만난 사람처럼 스스럼없이 편했다. 톰은 누구에게나 그렇게 대하시지만 내게 그렇게 편한 사람은 많지 않다. 우리는 탈핵 벗이라는 공통점으로 힘들 때 짠하고 나타나는 수퍼맨처럼 서로에게 힘과 위로가 된다. 단백질 보충과 함께 깨끗한 숙소를 마련해 주시고 톰은 가셨다.
고성군 그 소나무와 그 바다
8월 31일 토요일 정동진~노곡항 84km(252km)
정동진 바다부채길에서 이른 아침에 일어났다. 전날 밤에 한 빨래는 마르지 않았지만, 날씨는 맑았다.
기찻길을 지나 8시 40분, 강릉초당두부로 아침 식사하고 강릉 커피를 사서 출발했다. 출발하자마자 가파른 오르막길이었다. 하지만 오르막길이 있으면 내리막길이 있는 법.
헌화로 지나 산을 넘어 심곡항 해안도로를 구불구불 지나다 예나 지금이나 무슨 용도인지 알 수 없는 합궁골을 지나치니 금진 해수욕장이 나왔다.
10:14 한국여성수련원을 지날 무렵 숲 그늘이 시원했다. 옥계에서 긴 다리를 지나는데 건너편에서 땡볕에 지쳐 주저앉았던 기억이 났다. 그때 도반은 발에 생긴 물집을 살펴보고 있었다.
10:40 동해시로 들어와 10분 후 망상해수욕장 그네에 앉았다. 나는 잠시 양말을 벗어 땀에 젖은 발을 말리고, 뷔나는 바다로 돌진하려는 듯 데크 위에 있었다.
어달해변 복잡한 동네에서 접이식 자전거 아저씨를 따라갔다. 덕분에 마을 사람이 아는 지름길로 잠시 갈 수 있었다. 그러나 동네 사람인 아저씨는 한섬 해변에서 갈 길로 가시고 나는 아저씨가 알려주신 대로 자전거 도로 역주행 방향으로 삼척까지 갔다. 타다 보니 동해안 길은 상행 방향으로 설계된 길이었다. 인증센터로 그렇고 주행 방향도 그렇다.
추암해변에서 겨울 날짜 카페에서 흑임자 커피와 소금빵으로 점심 식사했다. 이 작은 해변을 찾아와 한가로이 쉬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는 카메라와 휴대폰을 충전하는 동안 몸과 마음을 짧은 쉼으로 충전했다.
추암해변에서 가파른 오르막을 올라가 인증센터를 지나면 바로 삼척시. 삼척에서 가파른 오르막을 엉금엉금 올라 목마른 한재에서 맹방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기대어 맹방을 바라보던 소나무는 하나 전 산이었던 모양인데 지나쳐 버렸다. 4년 전 촬영했던 그 지점은 아니었지만, 내려다본 화력발전소는 예상보다 훨씬 길고 넓고 파괴적이었다.
한재 도로 맞은편 산 울타리에는 '삼척 핵발전소 반대 투쟁위원회, 동해 삼척 기후위기 비상행동'에서 걸어놓은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삼척주민 다 죽이는 울진핵발전소 수명연장 결사반대!!!'
한재에서 본 맹방해변
맹방해변
근덕면 맹방해변으로 들어가 발전소를 지나니 해변에 여러 사람 무리가 있었다. 가만히 지켜보니 그 가운데 톰이 계셨다. 어제 만났던 그 톰이었다. 톰은 인천에서 온 열 명가량 되는 사람들에게 맹방해변 화력발전소의 폐해를 설명하고 계셨다.
운명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약속 없이 낯선 장소에서 조우하는. 그러려면 관심사가 같아야 한다. 같거나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어야 한다. 결국 운명은 생각과 행동 양식이 만들어내는 인연이다. 내가 발전소 주변을 찾아다닌다면 그곳에서 비슷한 생각을 하고 활동하는 사람을 만날 것이고, 아름다운 정원을 찾아다니거나 문학관을 찾아다닌다면 그 역시 비슷한 관심사의 사람을 만날 것이다.
2018년 6월 여름, 맨 처음 탈핵희망국토도보순례에 다친 다리로 참가한 내게 마찬가지로 다친 발가락으로 핵발전의 원리를 설명하던 그때처럼 톰은 화력발전소의 건설 과정을 청산유수로 강의하고 계셨다. 하늘이 그에게 명석한 두뇌를 주신 건 이렇게 쉬는 날 어디에서 누가 찾아와도 맹방 해변에 나와 강의하라고였을까? 강의가 끝나고 무리는 몇 대의 자동차로 내가 지나온 한재로 향했다.
나는 다시 남쪽으로 향했다. 맹방해변이 끝나는 지점에서 가다가 다리를 건너야 원전백지화기념탑이 나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자전거길은 강 이쪽으로 있었다. 오후 4시가 넘어있었고 다리를 건너갔다 올 시간이 없었다. 강가의 조각배도 보이지 않았다. 궁촌항을 향해 달렸다. 내륙으로 길이 나있었다. 그런데 비가 내렸다. 자전거를 세우고 가방에 레인 커버를 씌웠다.
맹방해변에 모인 사람들
레일바이크 대신 산 넘는 길
레일바이크 정류장이 있는 궁촌항부터 초곡, 용화, 장호까지는 산을 계속 오르내렸다. 예전에는 레일바이크를 탔기 때문에 그 길이 그렇게 험한지 몰랐다.
갈남, 신남을 지나 임원항에서 쉬려고 했다. 4년 전에 쉬었던 그 민박을 찾아갈 계획이었다. 그런데 1km 전방에 동해안 자전거길 강원도 구간 마지막 임원항 인증센터가 있었다. 도장을 찍고 와서 쉬려고 했는데 엄청난 오르막이었다. 자전거를 타지도 못한 채 끌고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올라오고 보니 다시 내려갈 엄두가 나질 않았다. 내려가면 다음 날 그 오르막을 다시 올라와야 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미 저녁 일곱 시. 해는 빠르게 지고 있었다.
노곡항
8km만 가면 호산항이었다. 그러나 날은 저물고 도로는 험했다. 아무 시설 없는 비화항 이정표를 지나 민박 표지판이 있는 노곡항으로 600m 내려갔다. 이미 깜깜해졌다. 여행객에게 숙소를 물어보니 동네 할머니는 알려주었고, 경로당에 누워계신 할머니께 여쭤보니 돌아가면 민박집이 있다고 하셨다.
그런데 1층 상가는 이미 불이 꺼졌고 문도 닫혔다. 다시 할머니 댁에라도 신세 지려고 돌아와 문이 닫혔다고 하니 들어가 보라고 하셨다. 건물 안쪽으로 들어가 소리 나는 1층 문을 두드리니 사람이 나왔다. 투숙객 같았다. 그분이 주인에게 전화를 해주니 잠시 후 주인이 나오셨다. 생존을 위한 간절함이 안도감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주인 여자분은 제일 안쪽 방을 보여주시고 저녁을 못 먹었다고 하자 1층 상점을 열어주셨다. 라면과 햇반과 생수와 비타민 드링크제와 맥주 캔 하나와 과자 한 봉지를 샀다. 주인이 김치를 한 접시 주셨다.
노실길 105의 203호는 넓고 깨끗했다. 욕실 타일도 새것이고 샤워기 필터도 있었다. 샤워하고 빨래한 후 라면을 끓이면서 햇반도 넣어서 같이 끓였다. 탁자에 밥과 함께 퉁퉁 불은 라면과 김치와 물을 놓고 먹었다. 라면을 좋아하진 않지만, 대진항 경로당이 떠올랐다. 그때도 날은 저물고 숙소는 없어서 마을 경로당에 묵었었다. 라면을 샀는데 가게 주인이 흰 쌀밥을 주셨었다. 막막하고 험한 순례길에는 늘 도움 주시는 분들이 계셨다. 파도 소리 들리는 노곡항 민박에서 밤이 깊었다.
9월 1일 일요일 노곡항~나곡 북면성당~울진 은어다리~울진터미널 36km(288km)
노곡항 유일한 민박에서 눈을 떴다. 빨래가 바싹 말라 있었다. 산뜻했다. 전날 산 2리터짜리 생수 남은 걸 물통과 전날 펜션에서 가져와 마시고 남은 생수 두 병에 나눠 담았다.
주인 여성분은 마당에서 그물을 꿰매고 계셨다. 주업이 어업, 문어 잡이라고 하셨다. 문어는 작은 틈만 있어도 몸을 구부려 빠져나가기 때문에 그물을 촘촘하게 준비해야 한다고 하셨다. 감사 인사를 하고 600m 오르막을 올라왔다.
큰길 건너에 백인 외국인 남녀 두 명이 오르트립 가방을 대여섯 개씩 매달고 저단으로 오르막을 오르고 있었다. 그 힘이 놀라워 응원 인사를 했다. 길을 건너가니 그들이 섰다.
짧은 영어로 대화를 하니 그들은 스위스 사람으로 자전거 세계 일주 중이었다. 여성의 짐받이에 커다란 비닐봉투 안 쓰레기가 눈에 들어왔다. 많고 무거운 짐 가방을 자전거 앞뒤로 달았으면서도, 쓰레기를 버리지 않고 주워 담아서 갖고 다니는 중이었다. 그 나라의 시민의식이 돋보이는 장면이었다.
그들의 이름은 나딘NADINE과 니콜라NICOLAS. 일곱째별이라는 내 한국 이름은 한국어를 모르는 그들에겐 너무 어려운 단어였다. 나는 그들에게 핵발전소 근처에 사는 사람들의 이주를 위해 자전거 순례 중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한국에 핵발전소가 24개라는 사실에 놀랐다. (사실 2024년 7월 28일 기준 26기가 운전 중이었다.) 스위스에는 핵발전소가 다섯 개뿐이라며 태양광 등 대안 에너지를 쓰면 된다고 했다. 그들은 내 조끼를 사진 찍고 싶어 했고 나는 허락했다.
호산항에는 터미널이 있었다. 토마토 주스를 사 마시고 월천으로 갔다. 가곡천 너머 가스 공단이 보였다. 바닷가를 돌았다.
4년 전 울진핵발전소를 뒤에 두고 배낭 두 개를 찍었던 도화동산으로 가려면 오른쪽, 자전거 도로로 가려면 왼쪽이었다. 안전한 자전거 도로를 택했다.
고포마을 산을 넘으니 마침내 나곡항이 나타났다. 고포마을로 동해안 자전거길 강원도 구간을 완주했다.
4년 전 일출을 기다려 울진핵발전소를 촬영했던 민박집이 있었다. 그곳을 찾아보았다. 핵발전소를 먼저 본 후 그 집을 찾았다. 주인을 불러보니 할아버지가 계셨다. 4년 전에 잘 묵고 가서 다시 찾아왔다고 인사를 했다. 그분께 동네에 성당이 있느냐고 여쭤보았다. 있다고 하셨다.
오전 11시가 넘어 북면성당을 찾았다. 하얀 아기 천사들로 둘러싸인, 노출 콘크리트 건축의 성당이었다. 조끼와 헬멧을 벗고 조심스레 들어간 성전에서 미사는 중반을 넘어있었다. 미사를 마치고 신부님이 새로 오신 분들을 일일이 인사시키셨다. 맨 마지막이 나였다.
"어떻게 오셨어요?"
"고성부터 자전거 순례 중입니다."
미사가 끝나고 못 한 봉헌을 한 후 성당을 둘러보았다. 건축 설계자가 궁금했다. 신부님께 여쭤보니 단국대학교 건축과 김정신 교수였다. 신부님 말씀이 그 성당을 지을 때 원전에서 경비를 보태주었다고 한다. 핵발전소 관계자들이 많이 다니는 성당이었다. 그런 곳에 탈핵 자전거 순례라니, '이주만이 살길이다'조끼를 보았다면 기함했을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하지만 교인분들은 친절했고 목마른 내게 유기농 주스도 주셨다. 인사를 마치고 자전거로 돌아온 나는 다시 노란 조끼를 입었다.
그곳은 부곡터미널 근처였다. 대부분의 식당이 주일이라 문을 닫아 식사할 곳이 없었다. 하는 수없이 편의점에 들어갔다. 그런데 그곳에서 노곡항 길에서 보았던 나딘과 니콜라를 다시 만났다. 채식주의자 비건인 그들은 영문 표기가 없는 음식들에서 동물성이 없는 걸 찾고 있었다. 나는 된장찌개를 골라주었다. 그리고 나도 그걸로 선택했다. 전자레인지 역시 영문이 없어서 그들이 어떤 버튼을 눌러야 할지 알려주었다. 그들이 불편할까 봐 다른 테이블에서 따로 식사했다. 마침 그 편의점에 로드바이크 타는 여자분이 말을 걸어왔다.
"보급품은 고급으로."
그 말에 따라 곤약 젤리를 사서 먹어보니 괜찮았다. 체력이 급격히 떨어질 때는 씹을 기력도 없다. 지리산에서 그랬었다. 그럴 땐 씹지 않고 삼킬 수 있는 젤리류가 적합하다. 몇 개를 더 사서 스위스 친구들에게 선물했다. 곧 다시 만나자는 인사를 하고 내가 먼저 길을 떠났다.
신한울 1, 2호기 건설소를 지났다. 비 맞고 걷던 4년 전 보았던 민트색 송전탑도 고목1리 표지판도 그대로 있었다. 길은 내륙으로 돌아갔다. 핵발전소가 있는 곳은 해안도로를 이을 수 없으므로. 울진에는 한울핵발전소 1호기부터 6호기와 신울진 신한울핵발전소 1, 2호기까지 통 여덟 기의 핵발전소가 있다. 전체 가동될 때는 전국 최다 핵발전소 보유군이다.
지루한 오르막의 연속이었다. 화장실에 가고 싶을 때쯤 관광객들이 드나드는 국립해양과학관이 나타났다.
후정 지나기 전부터 자전거 체인에서 삑삑 소리가 났다. 하지만 내겐 챙겨온 오일이 없었다. 죽변항 오토바이 가게에서 체인에 기름칠 좀 해 달라고 했다. 어디서부터 왔냐고 묻길래 혼자 고성에서부터 타고 왔다고 했다. 값을 치르려 했더니 다음에 다시 들르라고 한다.
바닷가에선 맞바람이 불었다.
봉평 지나 14:56 동해안 자전거길 경북 구간 시작 지점인 울진 은어다리 인증센터에 도착. 곧바로 울진종합버스터미널로 향했다.
15:08 터미널 도착. 시간이 늘어진 건지 뷔나가 빠른 건지. 때론 분 단위가 길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이번 자전거 순례는 3박 4일로 여기까지. 땀 냄새 푹푹 풍기며 우등고속버스에 올랐는데 다행히 옆자리가 비어 있었다.
15:25 버스가 출발했다. 그러고 보니 유럽에서부터 러시아로 와서 배 타고 동해에 도착해서 우리나라 동해안을 지나 일본으로 갈 나딘과 니콜라는 다시 만나지 못했다.
울진핵발전소
2024년 9월 8일 일요일 울진종합버스터미널~민박 5.2km(293.2km)
새벽에 울진으로 갈 계획이었지만 고민 끝에 갤러리에 들렀다. 가족의 친구가 온다고 했다. 검은 고양이 원두를 선물 받고 사진집을 증정했다. 갤러리 옆 매운탕 집에서 점심식사도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14:15 동서울 터미널에서 울진 행 버스를 탔다.
16:40 구정휴게소에서 쉰 후 다시 버스가 출발하니 동해가 보였다. 또 비가 왔다.
울진 가는 길에 근덕, 궁촌, 초곡 지나 톨게이트로 나가니 정겨운 7번 국도였다. 용화, 장호, 울진, 임원, 노곡, 호산, 나곡에서 경북으로 진입했다. 나곡해수욕장, 3리, 1리, 한수원아파트, 부구터미널. 울진 핵발전소 주변이라 송전탑이 가득한 산은 민둥산이 많았다. 2년 전 산불 때문일 것이다. 길에는 아직 배롱나무 꽃이 피어있었다. 비가 그치고 죽변항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은어다리를 지났다.
18:20 네 시간 걸려 울진종합버스터미널에서 내렸다.
2020년 2월 처음으로 탈핵도보순례를 하겠다고 왔던 곳이 울진종합버스터미널이었다. 울진은 동해안 경북 구간의 시작점이다. 그새 새로 생긴 편의점으로 가서 컵밥을 먹었다. 날이 빠르게 어두워지고 있었다. 금방 깜깜해진 상태에서 다리를 건너 좌회전했다. 그 길엔 차량 통행도 없이 암흑이 가로막고 있었다. 무서움을 꾹 참고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해변에 나 있는 길만 따라가면 민박집이 나올 것이다.
19:20 항아리가 담장 대신 쌓여있는 민박집에 도착했다. 전에 묵었던 침대 방은 길가가 아니라 맨 안쪽이었다. 기억은 때론 불분명하다. 침대 하나로 가득 찬 방에는 텅 빈 냉장고와 보지 않을 TV와 욕실. 혼자인데도 어색한 밤이다. 내일은 일찍 일어나야 한다.
9월 9일 월요일 울진 민박집~강구버스터미널 85.2km(378.4km)
아침 일찍 일어났다. 주인 여자분이 이른 아침부터 항아리 밑 정원을 손질하고 계셨다. 내 조끼를 보시곤 순례 이유를 물으셨고 자연스럽게 설명할 수 있었다.
아침 7시에 출발했다. 자전거 도로가 비교적 잘 나 있어, 47분 만에 망향정 휴게소에 도착했다. 아침밥을 먹어둬야겠기에 미역 들깨국을 먹었다.
8:28 다시 출발해서 조금 가자 3년 전 넷이 돌아가면 대게 흉내를 내던 곳이 나타났다.
고개를 세 번 넘었다.
9:30 기성항 바닷가 의자에 앉아보았다. 햇살이 밝고 바다는 조용했다.
10:30 월송정 인증센터에 도착했다. 친구들과 함께 걸을 때 비가 왔었다. 그래서 진짜 월송정에 가보지 않았었다. 이번엔 혼자 들어가 보았다. 만 그루가량의 소나무가 있다는 그곳 깊은 지점에 바다가 보이는 정자가 있었다. 관동팔경 중 하나인 월송정 위로 올라가면 양 옆으로 소나무 숲이 있고 가운데 파란 바다가 있다. 달이 떠있을 때 와보면 어떨까 싶었다.
11:08 편의점도 없는 길을 한참 가다 우수편의점에 들어갔다. 말이 편의점이지 동네 구멍가게였다. 게다가 물건도 몇 개 없었다. 오는 동안 가게가 하나도 없었다고 하자, 장사가 안돼 다 문을 닫았다고 하셨다. 내가 즐겨 마시던 캔커피는 유통기한이 24.06.22. 대구에서 물건이 와서 그렇단다. 그래도 사 마셨다. 한라봉 음료도 마시고 생수 500ml도 샀다. 역시 카드 사용은 안 됐고 현금 결제만 가능했다. 할머니는 여느 분처럼 말씀하셨다.
"아이고, 여자 혼자 이렇게 다녀. 무섭지 않나?… 그런데도 피부는 하얗네."
"할머니도 하얘요."
연세를 여쭤보니 고령이셨는데 나이보다 젊어 보이셨다. 할머니는 내 집이니 월세 걱정 없어 장사하지 남의 집 같으면 못 한다고 하셨다. 그래도 소소하게 가끔 손님이 와도 생활하시는 데 걱정이 없이 고와 보이셨다.
가게에서 나오니 문자가 와 있었다. 친구 부친 부고였다. 구순이 넘으셨고 매우 편찮으신 상태로 요양병원에 계셔서 친구네는 마음의 준비 중이었다. 나는 당일 종착지에서 자고, 다음날 한 코스 더 갈 계획이었다. 여기까지 내려오는 데 시간과 돈이 지나치게 많이 드는 건 두 번째 문제였다. 앞으로 가능한 날짜가 거의 남지 않았다.
11:54 다리에 날개 달린 듯 페달을 밟아 영덕군에 진입했다.
12:00 칠보산 휴게소에 도착했다. 4년 전 9,000원 하던 한식 뷔페는 12,000원 했다. 물가 상승률이 심각했다. 평소에 먹고 싶던 호박죽에 된장국과 밥, 메밀국수와 샐러드를 먹을 수 있었다. 두 칸 앞 테이블 노중년 여성들이 내 조끼를 보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눈길을 끌었다는 점만으로도 성공이다.
12:50 출발, 잠시 후인 13:13 고래불 해변이 나왔다. 3년 전 겨울과 봄 사이, 멍 때리는 곳에 앉아 활짝 웃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나 이번엔 반대 끝 해변에 잠시 서보았을 뿐 그곳에서 쉬진 않았다. 유달리 목이 마르고 카페인이 당겼다. 나타나는 슈퍼에서 스위트 아메리카노 캔을 마셨다.
오후 두 시 전에 대진1리를 지나니 그곳에 나타났다. 내가 운전하고 도반이 뛰고 그다음엔 내가 걷고 도반이 운전해서 당일 거리를 늘여갔던 그 해변. 노란 건물. 놀랍도록 또렷한 기억은 스크린에서 상영되는 영화처럼 생생했고 그날의 색채와 공기마저 떠올랐다. 이어 사진리 다음에 축산리에 도착했다.
14:22 축산항 농협하나로마트에서 더위사냥을 사서 마트 안에 서서 먹었다. 어지간히 더웠다. 유리문 밖 맞은편에는 노천 주차장이 있었다. 3년 전 그곳에 주차하고 도보순례를 시작했었다. 한참을 가다 내가 차 문을 잠그지 않은 걸 기억하고는 도반이 되돌아와 잠그고 갔던 곳이었다. 내 그런 황당한 실수가 있을 때마다 도반은 한 번도 정색하거나 싫은 소리를 한 적이 없다. 그저 묵묵히 대신 처리해 주고 유머로 내 미안함을 웃음으로 바꾸어 주었다.
다시 페달을 밟았다. 지독한 오르막의 연속이었다.
15:33 마침내 동해안 자전거길 경북 지점의 마지막인 영덕 해맞이공원이 나왔다. 오르막 끝 지점에서 매실 주스 한 병을 마시고 황분희 부위원장님께 전화를 했다.
"고성부터 '이주만이 살길이다' 조끼 입고 자전거 타고 있어요. 지금 영덕에 도착했어요. 21일에 나아리까지 갈게요."
"무리하지 말고 조심해."
16:40 강구항에 도착했다. 전에 잤던 민박집 앞에 텅 비었던 공터에 근사한 공원이 조성돼 있었다.
16:55 강구항 영덕 대게거리가 나왔다. 다리를 건너 방향을 좌로 트니 강구버스터미널이 나타났다.
17:00 여섯 시간 내내 머리 터지도록 고민했지만, 나는 재고 따질 겨를 없이 본능적으로 포항 가는 버스를 탔다.
18시 포항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했는데 거기선 동서울 가는 버스가 끊긴 후였다. 자전거를 접어 택시를 타서 포항 고속버스터미널로 가는 도중에 퇴근 시간으로 길이 막혀 서울행 버스를 놓쳤다. 하는 수없이 포항역으로 목적지를 바꿨다.
18:59 포항에서 서울역 가는 기차에 올랐다.
21:30 서울역 도착. 지하철로 갈아타는 데 엘리베이터가 없어 자전거를 들고 계단을 내려가야 했다. 한 시간 후 서울 동쪽 끝에 있는 장례식장에 헬멧 쓰고 노란 조끼 입은 내가 초록 자전거를 끌고 나타났다. 친구와 자매들과 친구들이 있었다. 검은 옷도 못 입고 쫄쫄이 자전거 옷을 입은 내가 문상을 하자, 친구 언니들 말소리가 들렸다.
"OO야, 네가 뭘 하든 응원해."
그것으로 충분했다. 강구에서 포항까지 자전거 순례 도중 지나치는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 알리는 '이주만이 살길이다. 월성원전이주대책위'도 중요하지만, 내가 아는 단 몇 사람만이라도 이 사실을 안다면 그걸로 된 것이다.
새벽까지 장례식장에 친구와 함께 있었다. 내일 일은 난 모른다. 남은 열하루 중 언제 다시 강구에서 나아리까지 115km 자전거 순례를 이을 수 있을지 정말 모른다. 한마디로 나는 즉흥적이고 대책이 없다. 그러나 이번 순례를 통해 변화한 자신을 알아챌 수 있었다.
8월 26일 북천철교에서 봉포해변까지 26km만 더 갔더라면, 9월 8일 갤러리에서 사람맞이 말고 새벽차로 내려와 월송정까지 33km 더 탔더라면, 9월 9일 친구 부친상 장례식장에 다음 날 가고 포항까지 50km만 더 타고 갔더라면, 21일 나아리까지 가는 데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번번이 사람이 우선이었다. 순례가 일이라면 나는 일보다 더 중요한 사람, 대의명분이 아닌 인연을 더 소중하게 여겼다. 이제 개강했고 내게 더는 시간의 여유가 없다. 그러나 나는 달라진 내 모습에서 변화를 느꼈다. 이제 앞으로 내가 하는 순례는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성격을 띨 것이다.
영덕 해맞이공원
9월 15일 일요일 강구시장~강구버스터미널 1.6km(380km)
아침에 대전역으로 갔다. 추석 연휴 첫날이었다. 많은 사람이 트렁크를 갖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이렇게 유동인구가 많을 때 자전거를 갖고 기차를 타다니 민폐 끼치는 듯해 미안했다.
10:40 KTX를 타고 동대구역으로 갔다.
13:10 동대구역에서 강구행 시외버스를 탔다.
14:30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전날 급한 마음에 일기예보를 보지 않고 예매를 했었다.
15:20 차가 너무 막히자 시외버스는 터미널까지 가지 못한 채 강구시장에서 내려주었다.
빗줄기가 굵었고 사람들은 우산을 쓰고 다녔다. 가방에 레인 커버를 씌우고 어떻게든 가보려고 했는데 자전거 앞바퀴에 머드가드가 닿았다.
분명히 학교에서 대전역까지 잘 타고 왔는데 갑자기 이상했다. 억지로 가보려고 하다가 왔다 갔다 헤매기만 했다. 일요일이라 자전거점포는 문을 닫았고 바퀴는 아무리 해도 잘 굴러가지 않았다. (나중에 자전거점에 가서 물어보았더니 접이식을 옆으로 뉘어 놓으면 머드가드가 휘게 되어 있었다.)
하는 수 없이 강구 버스터미널을 찾아왔다. 6일 전에 허겁지겁 포항행 버스를 탔던 곳이다. 포항행 티켓을 발권했다가 지난번에 고생한 기억이 나서 동대구행으로 바꾸었다. 매표소 직원이 눈에 익었다. 아저씨도 내가 기억나는 모양이었다.
"지난번에 여기까지 와서 다시 이어가려고 왔는데 비가 오네요."
"날씨를 잘 보고 다녀야지요."
"그러게요."
"강구에 비가 잘 오지 않는데 이상하네요."
16:58 동대구행 버스를 탔다. 돈 쓰고 시간 쓰고 허탕치고 말았다. 이제 21일까지 나아리에 가는 건 불가능해졌다.
2024년 9월 21일 토요일 자전거 17km+도보 3km=20km(400km)
고성 통일전망대부터 강구까지 380km를 혼자 자전거 타고 왔다. 이제 단 하루 남았다.
전날인 금요일에 출근하며 영상과 통화했다. 이러저러한 변수를 예상하며 자전거와 자동차로 루트를 짜던 중 영상의 마지막 말이 마음을 울렸다.
"최선을 다하면 되죠."
"그래요. 최선을 다하면 되죠."
그날 강의 후 출발하려다 비가 심상치 않게 쏟아져서 못 갔다. 그날 저녁 논의 벼가 쓰러져 있는 걸 보았다. 간밤의 비바람이 엄청나게 불어닥쳐서였다.
그날 밤 내 휴대폰의 문자량은 평소에 비해 매우 많았다. 경주의 주미와 울산의 영상과 주고받은 문자였다. 재난주의보가 내릴 정도로 비가 오니 안전하게 걷는 게 어떻겠냐는 주미와 포항까지 와서 합류하겠다는 영상.
이 약속은 지난 1월 호미곶에서부터 흥환간이까지 영상과 함께 걸으면서 나온 계획이었다. 내가 7번 국도를 도보순례로 완주한 후 나아리 10주년에 맞춰 자전거로 다시 순례하겠다고 하니 영상이 합류하겠다고 했었다. 나는 7번 국도 순례길 10화 – 고독은 아무나 하나를 다시 읽었다. 그리고 영상에게 문자를 보냈다.
'우리 올 초에 약속했으니까 자전거가 위험하면 걸어서라도 갑시다.
나아리 10주년에 뭐라도 합시다.'
단단히 준비하고 사고만 나지 않기를 기도하며 잠을 청했다. 하지만 몇 시간 잘 수 없었다. 새벽 세 시 반에 일어났다. 전날 챙겨놓은 자전거복을 입고 가방을 챙겼다. 영상이 자동차를 가지고 온다고 했으므로 큰 DSLR 카메라도 넣었다.
새벽 다섯 시가 못 되어 현관문을 열었다. 폭우가 쏟아져 내렸다. 길가로 물웅덩이가 생겨 자동차가 지나갈 때마다 파도처럼 물보라가 일었다. 번개와 천둥까지 위협하는 호우주의보 수준이었다. 대전역까지 가는 25km에 한 시간이나 걸렸다.
자전거 뷔나를 주차장에서 기차역까지 옮기는 잠깐 사이에 신발과 양말이 다 젖었다. 플랫폼에서 기차 도착 몇 분 전에 영상에게 문자를 보냈다.
'지금이라도 무리다 싶으면 기차표 취소하고 자전거 두고 경주로 갈까요?'
영상의 답이 오기 전에 6시 4분 기차가 몇 분 연착해서 먼저 왔다. 하는 수 없이 탑승했다. 더는 돌이킬 수 없었다. 역무원이 이렇게 비가 오는데 자전거를 타느냐고 걱정스레 물었다. 나도 덩달아 걱정된다고 했다.
KTX는 무척 빨랐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차창에 부딪히는 빗발이 약해졌다. 기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 겁으로 졸아든 내 마음은 숨도 간신히 쉬고 있었다.
7시 반, 포항역에는 영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영상은 내가 자전거를 타면 자동차에 비상등을 켜고 뒤에서 따라오며 보호하기로 작정하고 자기 자전거를 싣고 오지 않았다. 포항의 비는 대전에 비하면 보슬비였다. 자전거를 차에 싣고 구포휴게소로 향했다. 지난 1월 유일하게 버스로 이동했던 포항 포스코 공단 구간을 이번에도 차로 넘어갔다. 고개도 넘었다.
구포휴게소에는 엄동설한에 방문했던 나를 보고 놀랐던 국밥집 부부가 있었다. 그 집으로 다시 가서 국밥을 먹었다. 밥을 먹다가 영상이 제안했다.
"운전 잘하세요?"
"그럼요."
운전은 30년 동안 했기에 익숙한, 내가 잘하는 몇 가지 중 하나다.
"그럼 반씩 타면 어때요?"
"오~, 좋은 생각인데요?"
생각지도 못한 발상이었다. 순간 4년 전 대진항 부근에서 자동차를 놓고 올 수 없어 도반과 번갈아 걸었던 게 떠올랐다. 그런 방법이 있었다. 그럼, 어떻게 나눌 것인가? 그곳에서 주미가 준비하고 있을 감은사지 삼층석탑까지는 30여 km. 약사인 영상이 이과인데 문과인 내가 말했다.
"8km씩 타면 되겠네요."
그 사이 감은사지 삼층석탑에서는 주미와 김한이 현수막을 들고 도보순례를 시작했다. 우리는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어느 지점에서 만나기로 했다.
식사를 다 하고 나갈 채비를 하자 주인 부부가 지난번엔 강추위에 걸어서, 이번엔 빗속에 자전거로 다니는 내게 이유를 물었다. 노란 조끼에 답이 있었다.
"사람들이 이사 가고 싶어도 못 가고 병에 걸리는데 안타깝잖아요. 다른 동네 살아도 함께하는 거죠."
9:15 출발은 구포휴게소. 내가 먼저 자전거에 올랐다. 빗속을 달리는 내 뒤로 영상의 자동차가 따라왔다. 출발하자마자 오르막이었다. 다행히 짐가방이 차에 있어 자전거 뷔나는 평소보다 가벼웠다. 1단으로 오르막 끝까지 올라갔다. 내리막을 거쳐 다시 오르막.
다음에 신창간이를 지났다. 거리를 일찍이 좁혀왔다면 신창간이에서 자고 행사 당일에 그곳에서 출발하고 싶었다. 하지만 비 오는 날에 자전거로 스쳐 지나가는 해송 피크닉장에선 지난 1월의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약간의 상념에 젖어 달리는 어느 순간 영상의 차가 가로질러 내 앞에 섰다. 나도 따라 섰다. 지난 1월 도보순례 첫날 숙소 양포항이었다.
"7.7km"
9시 45분. 영상이 뷔나의 안장을 올려 타고 내가 영상의 새 자동차 핸들을 잡았다. 뷔나를 탄 영상이 출발하고 내가 그 뒤를 따라갔다. 도로는 1차선. 뒤에 오는 자동차 중 추월하거나 경적을 울리는 차들이 있었다. 그래도 할 수 없었다. 빗발이 굵어졌다. 헬멧이 없는 영상의 챙모자는 흠뻑 젖었고 눈으로 들어오는 비를 손으로 훑어내는 영상을 보며 눈물이 핑 돌았다. 그런데 다음 순간 영상의 모자가 바람에 날려 도로 위에 떨어졌다. 나는 황급히 브레이크를 밟고 섰다. 그 순간이야말로 뒤에서 달려오는 차들로부터 내가 영상을 지켜줘야 하는 시점이었다. 영상은 비에 젖은 모자를 아스팔트에서 주워 다시 머리에 쓰고 자전거에 올라 달렸다.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풍경. 우리는 왜 이런 무모한 짓을 하는가.
경주 자전거길
10시 10분. 중간 목적지는 지난번 쉬었던 감포 무인카페. 해가 반짝 났다. 아까운 시간이었지만 우리는 커피를 마시며 좀 쉬었다.
10시 반쯤 다시 출발. 내가 운전대를 잡고 영상이 탔다. 비 오지 않을 때 내가 타라는 영상의 배려에도 불구하고 종착지에 내가 자전거를 타고 들어가고 싶어서였다. 나정에서 교대하기로 하고 출발했다. 다시 오르막이 시작되었다. 오류에 가까워서였다. 작은 자전거 뷔나를 타고 오르막을 오르는 영상이 힘들어 보였다. 옆으로 가서 창문을 내리고 파이팅을 외치려는 찰나,
"어?!"
영상의 표정이 이상했다.
내려보니 뷔나 뒷바퀴 기어 변속기와 행어가 떨어져 나갔다. (나중에 수리하면서 알고 보니 변속할 때 페달을 세게 밟으면 발생하는 현상이었다.)
10시 50분. 서둘러 근처 자전거점을 검색해 40여 km를 달려 경주 시내 황오동까지 갔다.
11시 40분.
자전거점 주인은 부속이 없어서 못 고친다고 하셨다. 영상은 그곳에서 자전거를 수리해서 택배로 부쳐주고 싶어 했으나, 나는 내 뷔나를 낯선 곳에 맡길 수 없었다. 우리는 망가진 뷔나를 차에 싣고 서둘러 봉길터널로 왔다.
12시 38분.
주미와 김한은 봉길터널 끝 지점에서 시커멓게 변한 현수막을 들고 빗속에서 서 있었다. 나는 주미와 교대해서 현수막을 들고 걸었다. 영상은 차를 어디쯤 갖다 두고 다시 돌아와 김한과 교대했다. 영상의 차가 나타날 즈음, 다시 김한이 들고 영상은 월성원자력홍보관에 차를 두고 왔다. 어찌 보면 원시적인 만큼 정직한 왔다 갔다 도보순례. 지나가는 차 안에 탄 사람만 우리를 볼 뿐, 비가 오고 아무도 없는 거리에서 우리는 무모하게 걷고 있었지만 마음은 신이 났다. 걸음에서 나오는 흥이 있었다. 뷔나는 망가졌지만 내 마음은 멀쩡했다. 우리는 장렬하게 순례를 해내고 말았다. 최선을 다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나 혼자가 아니라 영상과 주미와 김한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13시 10분. 천막 농성장 앞은 한수원에서 심어놓은 식물 화단으로 막혀 있었다. 사람들이 모이지 못하게 하려는 유치한 술책이다.
천막 농성장 앞
13시 18분. 우리는 농성장 맞은편 솔밭에 도착했다.
오후 두 시부터 다섯 시까지 월성핵발전소인접지역주민이주대책위원회 천막농성 10년 대회를 했다. 5주년 때도 이렇게 비가 왔었다. 그 빗속에서도 전국에서 모였다. 청주와 울산과 삼척과 광주 등지에서 온 친구들이 반갑고 고마웠다. 남은 이주대책위 회원은 네 분이었다. 인사말과 공연이 끝나고 마지막으로 상여시위를 했다. 전국에서 모인 이들이 모두 비를 맞으며 이주대책위원회 회원들 뒤를 따라 함께했다. 늘 오늘만 같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주대책위원회원들과 이상홍 경주환경운동연합사무국장
대회가 끝나고 영상이 경주역까지 나와 자전거 뷔나를 태워주었다. 기차 안까지 뷔나를 실어주고 가는 영상의 뒷모습에 '책임감'이라는 세 글자가 뚜렷하게 각인되었다.
사람들은 내가 고성에서부터 나아리까지 혼자 자전거 타고 왔다고 놀라워하지만, 사실 내가 움직일 수 있는 동력은 언젠가 내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누군가는 도와줄 거라는 막연한 믿음이 있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함께 자전거를 타려고 했다가 폭우 때문에 주춤거리던 내게
'내일 경주 계속 비 오네요. 재난문자도 온다고 하는데… 걸을까요?'
제안해 준 주미. 그리고 주미와 함께 현수막을 들고 폭우 속에 험한 길을 걸어온 김한. 그리고 울산에서 포항까지 빗길에 자동차를 몰고 와 나와 뷔나를 지켜주고 함께 순례를 이어준 영상. 이렇게 나의 순례는 이번에도 친구들의 도움으로 끝났다.
나는 원래 그날 행사를 마치고 포항으로 가서 하룻밤 자고, 다음날 못 탄 포항부터 강구까지 이으려고 했었다. 그렇게 고성부터 나아리까지 동해안 길 순례를 완주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뷔나의 변속기와 행어가 박살나면서 더는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다. 이만하면 됐다. 스스로에게 말했다. 나는 최선을 다했다. 그것으로 부끄럽지 않다.
다음 날 황분희 부위원장님에게서 문자가 왔다.
'어제 고생 많았지. 제대로 챙기지도 못하고 그대로 보내서 미안해. 다음에 또 만나자.'
2024년 8월 25일부터 열흘 동안 서울과 고성, 서울과 간성, 서울과 울진, 대전과 동대구 거쳐 강구, 서울과 포항을 오고 갔다. 잘 타는 사람이면 단 며칠에 완주할 수 있는 거리와 코스를 나는 생고생을 하며 한 달 동안 타면서도 완주하지 못했다. 그간의 고단함이 그 문자 하나로 사르르 녹아내렸다. 그곳에 살고 계신 한 분이라도 내 진심을 알아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나는 나의 이런 어리숙하고 비효율적이고 무리한 순례가 기특하다. 언젠가 남은 구간을 완주할 거냐고? 오늘 자전거점에 다녀온 뷔나는 이제 예전의 뷔나가 아니다. 노란 타이어 빌리는 죽변항 오토바이점에서 왕창 뿌려준 오일 때문에 시껌둥이가 되었고, 변속기는 나도 모르는 새 중고로 교체되었다. 정말 이상하게 오늘 집에 있는 큰 스피커도 소리가 나지 않는다. 오래된 것들은 모두 변형하다 고장이 나고 수명을 다한다.
그러니까 노후원전 수명연장 말고 중수로인 월성핵발전소 조기폐쇄하자고.
10년이 되어도 나아진 것 없는 이주대책위원회. 그들을 위해 고성에서부터 나아리까지 자전거로 '이주만이 살길이다'를 함께 외친 400km.
뷔나야 수고했어.
우리 이제 그만 쉬자.
월성원전인접지역주민이주대책위원회와 전국의 친구들 상여시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