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美군정은 약 8천 명의 남한 주민을 대상으로 한국이 장차 어떤 국가 이념을 지향해야 할지에 대해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아직 분단된 남쪽이 어떤 체제를 가질 것인지, 심지어 남쪽과 북쪽이 각자 단독으로 정부를 수립할 것인지조차 정해지지 않은 시점이었기에 미 군정의 조사는 백지상태에서 이뤄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조사결과는 놀라웠다. 자본주의(1,189명, 14%), 사회주의(6,037명, 70%), 공산주의(547명, 7%), 모른다(653명, 8%) - 당시에도 놀라웠는지는 모르지만, 오늘날 우리의 눈으로 보면 놀랍기 그지없다. 만약 당시에 우리 스스로 우리의 체제를 택할 수 있었다면 사회주의를 택했을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길을 가기보다 미국이 가라고 하는 길을 따라 자본주의의 길로 갔다. 우리는 우리가 진정으로 그것을 왜 원했는지 곱씹어볼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
우리나라 역사의 아쉬운 점으로 흔히 친일청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는 점이 꼽힌다. 맞는 말이다. 해방 후 친일파를 청산하기 위해 꾸려진 반민특위는 제대로 된 성과를 내지 못한 채 너무 빨리 해체됐다. 그런데 우리가 잘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다. 우리가 친일 청산을 못했던 것처럼 일본은 전범 청산을 못했다는 것이다. 어떻게 된 일이었을까? 그 배후에는 미국이 있다.
일본에 세워진 미 군정을 일본사람들은 GHQ(General Headquarter)라고 불렀다. GHQ는 일본의 전범을 단죄하고 평화헌법을 만들어 다시는 다른 나라를 침략하지 못하도록 하고자 했다. 뿐만 아니라 전쟁 범죄에 깊이 연루됐던 재벌(財閥, 자이바츠)들을 해체하고 그 생산설비들을 동남아로 옮기고자 했고, 토지개혁을 통해 농민들에게 토지를 공평히 분배하고자 했다. 이렇게 다시 태어난 일본은 전쟁을 할 필요 없는 평화로운 농업형 중립국가가 될 터였다. 그러나 GHQ는 1949년 무렵 이 방향을 급선회한다. 일본사람들은 이 방향전환을 '역(逆)코스'라고 부른다. 평화헌법은 제정됐지만 GHQ는 일본의 재무장을 다시 허용했다. 이를 위해 재벌 생산설비의 동남아 이전 계획은 백지화됐다. 무엇보다 재판을 받고 수감돼 있던 전범들을 대거 석방하여 자민당을 급조했다. 이렇게 결성된 자민당은 지역 토호들과 결합했고 이들에게 정부가 제공하는 이권을 몰아주는 방식으로 표심을 얻어 매우 안정적인 장기집권 기반을 마련했다.
GHQ는 왜 역코스를 밟았던 걸까? 여기서 이 칼럼의 주제인 중국이 등장한다. 1949년 중국에서 예상과 달리 마오쩌둥(毛澤東)의 공산당이 국민당에 승리한 것이다. 본래 미국은 소련이 동아시아를 압박하더라도 장제스(蔣介石)가 중국을 방어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럼 공산화된 소련과 북한이 있더라도 중국과 남한으로 공산주의를 저지하고 일본은 평화로운 민주국가로 남아 있으면 된다는 계산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중국이라는 세계 최대 인구를 지닌 나라가 뜻밖에 공산당의 손에 넘어갔다. 그렇다면 일본을 한가롭게 내버려 둘 수 없다. 마침 GHQ 감독 하에 실시한 일본의 첫 민주선거에서 좌파들이 대거 당선됐다. 앞서 한국의 여론조사에서 사회주의가 우세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패전 후 일본 역시 군국주의에 대한 후회와 그 반대급부로 사회주의적 지향이 강했던 것이다. 이제 GHQ는 한가로운 민주주의를 수행하고 있을 수 없었다. 자칫하면 동아시아 전체가 공산화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전범들을 석방해서라도 미국과 함께할 강력한 산업국가를 만들어야 했다. 그것이 일본이었고, 일본의 방어선이 한국이었다. 이제 일본과 한국은 각각 냉전의 후방기지와 최전선이 되어서 미국의 지원과 통제 속에 체제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경제발전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이렇듯 한국과 일본이 스스로 원한 길이 아닌 미국이 기획한 길로 갔던 것과 달리 중국은 자기가 원하는 길로 갔다. 사회주의의 길이었다. 그런데 사회주의 실천이라는 정답은 주어져 있지 않았기에 중국은 그 길을 스스로 개척해야 했다. 처음엔 소련의 모델을 따라갔었지만 소련 자신이 스탈린 격하 운동과 함께 가던 길을 잃어버리자 중국도 함께 길을 잃었다. 그런데 소련이 당내 권력투쟁이란 비교적 온건한 방식으로 길을 잃었던 것과 달리, 중국은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이라는 극단적 방식으로 길을 잃었다. 결국 마오쩌둥이 죽고 나서야 이 방황이 끝났지만 중국의 경제와 사회는 피폐해져 있었다. 이제 중국이 새로운 길을 모색하려는 순간 때마침 미국의 키신저 전략 – 중국과 연합하여 소련을 견제한다는 – 이 실행됐고 중국은 미국과 화해하며 개혁과 개방의 길로 들어섰다.
오늘날 중국은 미국의 뒤를 바짝 쫓는 경제대국이고 여전히 사회주의의 기치를 올리고 있다. 이 모습을 중국특색 사회주의라고 부르기도 하고 홍색(紅色) 자본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같은 모습을 정반대의 명사와 형용사로 부르지만 실은 두 호칭이 같은 현상을 지칭하고 있음을 눈 밝은 사람은 꿰뚫어 볼 것이다.
우리에게 닥친 실존적인 문제는 현대 중국이라는 이 현상이 특이할 뿐 아니라 거대하고 성공적이고 압도적이라는 데서 발생한다. 그 존재만으로도 이념적 정체성과 실천적 구현에 대한 지적(知的) 과제를 던져주고 있을 뿐 아니라, 경제적 과제와 지정학적 힘겨루기에 대한 실질적 고민거리를 던져주고 있다. 중국이라는 존재를 올바로 인식하고 그에 대응하는 것은 우리가 갔었을지도 모를 그 길을 성찰하며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드는 동시에,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야 할 물질적 조건을 어떻게 재구성할 것인가를 탐구하게 하는 중요한 과제이다.
앞으로 1년간 필자는 중국(중화인민공화국)의 현대사를 경제분야를 중심으로 풀어나가고자 한다. 흔히 한국이 압축적 경제성장을 했다고 하지만 중국은 더 극심한 압축적 현대사를 겪었다. 자주적으로 선택한 사회주의에서 시장경제로 방향을 급선회하면서 수많은 시행착오와 뜻밖의 성공을 겪었다. 그리고 오늘날 인공지능과 통신기술ㆍ전기차 등 첨단산업의 선두에 서기까지 단거리 경주하듯 마라톤을 달려왔다. 동시에 중국 사회는 일본과 한국에서 이미 나타나기 시작한 고령화와 인구감소 및 청년세대의 무기력과 좌절도 함께 겪고 있다. 2012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모옌(莫言)은 한 작품에서 중국사람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50년대 사람들은 순진무구했고, 60년대 사람들은 미쳤었고, 70년대 사람들은 겁을 먹었고, 80년대 사람들은 눈치 보느라 정신없었고, 90년대 사람들은 지극히 사악했다" (2006년 작품 『생사피로(生死疲勞)』 중에서)
모옌의 통찰은 중국 사회의 변천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우리도 중국 현대사를 따라가며 중국이 우리에게 하는 말, 우리에게 의미하는 것을 발견해 보자. 칼럼을 연재할 필자는 대학에서 중어중문학을 전공한 후 대학원에서부터 중국 경제를 연구하며 중국이 걸어온 길에 천착해왔다. 길목의 독자들과 중국에 대해 소통하기 위해 필자는 현대사와 함께 수시로 중국에 얽힌 현안들을 소개하며 독자들을 만나고자 한다. 중국의 현대사와 현안들을 살펴보는 이 길에 길목 독자들의 많은 관심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