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헌 인문(人紋)의 종교 5 - 종말론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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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무늬인 종교성에 대한 성찰

 

종말론 단상

복음서를 읽다보면 한 가지 질문이 괴롭힌다. ‘하나님나라’는 뭘까?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모습은 자신을 믿고 구원을 받으라고 말하는 종교창시자가 아니라, 어떤 부름을 받은 사람 즉, ‘하나님나라’에 대한 희망으로 사람들의 마음에 불을 지른 사람이다. 그가 꿈꾼 하나님나라는 저세상의 나라가 아니라, ‘로마의 평화’라는 이름으로 형성된 무질서에서 고난당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져야 할 하늘의 응답과 연관된 것이었다.

예수가 전한 복음은 ‘하나님나라가 온다(Thy kingdom come!)’는 것이었다. 그것이 어떤 이들에게는 희망이 된 반면, 다른 이들에게는 심판의 메시지가 되었다. 아마 그것이 예수가 죽게 된 이유였을 것이다. 역사가 흘러 교회가 제도화 되면서 ‘하나님나라’를 향한 예수의 꿈은 실천적 추구보다는 성찰의 대상이 되어갔다. ‘하나님나라’에 대한 ‘신앙’이 기독교 종말론 ‘신학’으로 변해 간 것이다.

기독교 종말론은 두 가지 극단적인 사고를 오가면서 조정되었다. 하나는 종말(eschaton)을 ‘역사적 시간’의 종말로 보는 사고이다. 이 생각은 재주 없는 신학자들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오랜 기간 동안 통용되었다. 그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이란 모두 유한한 것으로서 결국 ‘썩어 없어지는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영원하고 무한한 것은 이 세상에 담길 수 없다고 봤다. 이 생각은 단순명료하게 유한과 무한을, 시간과 영원을 갈라놓기 때문에 대중적 이해를 쉽게 이끌어 냈지만, 그 사고에 담긴 이원론적 결함으로 인해 진지한 사람들은 항상 실망했다. 다행스럽게도 의미 있는 조정이 13세기에 일어났다. 신학자 보에티우스는 시간과 영원이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요, 영원(eternity)이란 시간의 ‘깊이’라고 봤다. 그 생각이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또 다른 극단적인 사고는 평면적 휴머니즘이랄까, 단선적 역사주의랄까. 이 사고는 신의 구원사와 세속의 역사를 일치시킨 것으로서, ‘영원’(永遠)을 시간과 동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 낙관주의자들에 의해 신봉되었다. 근대 이성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합리적 이성은 이상과 본질을 역사 속에서 실현시켜낼 것이라고 확신했다. 헤겔이 제창한 이 낙관적 본질주의(essentialism)는 ‘하나님나라’를 꿈꾸는 수많은 휴머니스트들의 사상적 근거가 되었다. 하지만 그들이 꿈꾼 나라는 말 그대로 이 역사 안에서는 실현될 수 없는 유토피아였다. 낙관주의자들은 자신들이 굳게 믿던 역사의 한복판에서 품었던 희망보다 더 큰 슬픔을 안곤 했다.

기독교는 이런 양 극단의 생각을 오가면서 ‘하나님나라’라는 ‘상징’이 의미를 줄 수 있는 길을 찾아왔다.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하나님나라’로 상징되는 기독교 종말론의 관심사항은 ‘세상’의 종말이 아니라 ‘악’의 종말이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종말론은 세상에 대한 포기가 아니라 충실이다. 따라서 종말신앙은 세상에 대한 절망이 아니라 삶의 책임성을 요구한다.

그러나 교리화 된 종말론은 신앙의 관심을 ‘세상’의 종말에 둠으로써 역사에 대한 절망을 부추기고, 해산의 진통을 안고 나아가는 생명의 창조성을 비하한다. 그런 종교교리는 진지한 신앙인들에게 만족스런 답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은 이 세상을 하나님이 ‘값 주시고 사실만큼’ 귀한 곳이라고 전제하기 때문이다. 만일 세상이 의미 없는 곳이었다면 하나님의 아들이 굳이 몸을 입고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찬양은 이 세상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와 양립 불가능하지 않다. 이 점을 깨닫지 못할 때 신앙은 자기모순에 빠지게 된다. 교리적 이해에서는 마치 세상에 대한 ‘절망의 병’을 앓는 것처럼 사고하면서도, 실제 삶에서는 이 세상에서 얻어야 할 것에 대한 탐욕의 질주를 멈추지 않는 거룩한 무리가 양산된다. 놀랍게도 기독교는 소위 정통신학이라는 이름으로 그런 신도들을 길러낸다. 신학의 오류 때문이다.

소위 정통신학은 과학적 이성이 주도하는 근대세계관이 세워진 이후에는 어려움을 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을 초자연이라는 먼 곳에 위치시켰기 때문에 ‘하나님나라’도 그만큼 먼 곳에 존재하는 것으로 여겼던 종교적 상상은 결국 길을 잃게 되었다. 갈릴레이가 종교사상에 미친 진정한 영향은 천체의 운동방식에 대한 이해를 변경시킨 것에 있지 않고, 하나님 ‘나라’가 위치할 우주적 공간을 지성의 영역에서 제거해버린 것에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나라’는 무엇일까? 철학자 화이트헤드는 ‘하나님나라’를 이 세계 안에(in) 있지만 이 세계의 것은(of) 아닌 나라, 악으로부터 ‘분리된’(separate)된 선의 나라가 아니라 ‘선으로써 악을 이겨가는’ 나라라고 말한다. 알쏭달쏭하다. 그래도 진지한 신앙인은 그 나라를 오늘 여기서 꿈꾼다. 그 나라는 저편에 만들어진 황금왕국이 아니다. 역사와 우주의 자궁에서 겨자씨처럼 자라나는 그 나라를 향한 꿈은 이미 우리 삶을 지배하는 종말론적 심판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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