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원 맥주를 탐하는 지식 7 - 조롱당하며 죽어간 거위의 비상

맥덕목사의도원 주를 하는

 

일곱, 조롱당하며 죽어간 거위의 비상

         (얀 후스, 체코 민주화운동 그리고 프라하의 수도원 맥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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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8월, 인도네시아에서는 아시안게임이 열리고 있다. 어머니로부터 늘 ‘애국심 결여증’을 지적받는 나는 이번에도 소위 ‘태극전사’들이 국가의 명예를 위해 싸운다는 걸 개막식이 지난 다음에야 알았다. 그런 내게도 남자축구 베트남대표의 경기는 관심거리였다. 그것은 물론 옆집 아저씨 같은 느낌의 ‘박항서’감독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 하이네켄 등 네덜란드 신드롬을 일으켰던 히딩크의 곁에서 2002남자축구대표팀을 지도했던 그가 축구에 있어 거의 변방에 가까운 베트남 팀을 변화시키는 것은 ‘쿨 러닝’류의 스포츠영화를 보는 즐거움을 선사했다.
 

 

베트남축구대표.jpg

 


그러나 내게 더욱 큰 감동을 다가왔던 것은 축구경기 자체였다. 일단 베트남 대표선수 중 국제무대에서 이름을 들어본 선수가 없다. 그러니 소위 몸값도 낮을 수밖에 없다. 그들의 개인기량은 간혹 실소를 자아내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은 매 경기에 정말 최선을 다한다. 한국대표팀의 간판전술인 ‘침대축구’ 따위는 찾아 볼 수 없다. 그들의 최선은 아시안게임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빛을 발했다. 이미 2승을 거둔 상태였던 베트남은 져도 16강에 진출하는 상황에서 일본을 만났다. 출전목표는 이미 달성한 상태였다. 또 피파(FIFA)랭킹 102위가 55위에 진다해서 그리 문제될 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최정예선수가 나섰고, 또 한 번의 기적을 연출했다. 그 결과로 얻게 된 주전선수들의 부상은 ‘쓸데없는데 힘썼다’는 비난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지만, 그들은 보란 듯이 16강과 8강에서 서남아시아의 강호 바레인과 시리아를 물리쳤고, 이 글을 쓰는 시점에는 4강에서 한국과의 격돌을 앞두고 있다.

아직 경기는 진행되고 있지만, 나에게 있어 그들은 이미 우승자들이다. 객관적 전력상 절대 이길 수 없는 존재들 앞에서, 쫄지 않고 자신의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용기.... 우리는 그 기적을 맥주의 나라 체코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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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초반, 동유럽 최초의 대학교인 프라하의 카를대학 교정, 신학부 강의실에서는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 한 강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신념에 찬 목소리로 강의를 진행하는 이는 얀 후스 교수였다. 그는 1372년 당시 전 유럽 최고의 변두리 중 하나였던 보헤미아의 서민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범상치 않은 천재성을 드러냈던 얀 후스는 1400년에 신부이자 카를대학 교수로 임명되었고, 서른 살이 되던 1402년, 카를대학교의 총장이 되었다. 그야말로 탄탄대로를 타고 성공을 향해 질주하는 듯 했다.
 
하지만 안락한 길을 걷기에 얀 후스는 그야말로 삐딱했다. 미사는 오직 라틴어로만 드려야했던 상황에서 그는 서민대중신자들을 위해 라틴어성서와 찬송가를 체코어로 번역했다. 또 강의시간에 틈만나면 합스부르크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야 함을 역설하는 바람에 독일-오스트리아계 교수들과 학생들의 거센 항의에 직면하기도 했다. 그의 ‘삐딱 기질’은 당대 가톨릭교회를 향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났다. 그는 부를 쌓아올리려는 교회의 실상을 통렬히 비판하는 가운데 면죄부 판매, 고해성사, 권위적 성직제가 반성서적임을 천명했다. 어느덧 동유럽을 대표하는 지식인, 서민들의 사랑을 받는 지도자로 성장해있던 얀 후스의 존재에 심기가 크게 상한 가톨릭은 사제와 총장직을 한 큐에  날려버렸다. 하지만 그와 같은 탄압이 얀 후스를 주눅 들게 할 수 없었다. 해임된 그는 프라하 인근 코지흐라데크에서 강의를 계속했다. 강의실은 벌판이나 길바닥이었고, 학생은 자발적으로 모여든  소작농과 소규모 자영농을 포함한 군중들이었다. 언제나 재야(在野)지식인이었던 그가 정말 들판의 지식인이 된 순간이었다. 민중들은 자신들의 곁에서 사이다강연을 이어가는 얀 후스를 사랑했다. 학교를 떠난 얀 후스의 인지도는 더욱 높아져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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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직으로 잠잠해질 줄 알았던 얀 후스의 곁에 더 많은 사람들이 모인다는 소식에 가톨릭은 긴장하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위클리프 등의 불온한(?) 인사들이 나타나 여기저기에서 골치를 아프게 하고 있었는데, 대중적 인기까지 얻고 있는 반체제인사의 등장은 당대의 교회권력에게 묵과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사실 십자군 원정실패, 아비뇽유수 등의 영향으로 가톨릭 교권은 크게 약화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한때 3명의 교황으로 분열되기까지 했던 교회에게 얀 후스와 같은 존재의 등장은 또 하나의 위협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이 모든 문제를 봉합하기 위해선 전제왕권의 힘이 절실했다. 교회가 정치세력을 향해 내민 구애의 카드는 시민의 편에서 군주제를 비판하는 변혁적 신학자의 제거! 마침내 얀 후스 제거 프로젝트가 가동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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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4년, 지금의 스위스ㅡ독일국경  콘스탄츠에서 공의회가 개최되었다. 그리고 사전에 얀 후스를 포함한 개혁주의자들에게 '너희들의 얘기를 들어줄 테니 공의회로 나와!'라는 내용의 서신이 전달되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신변보장을 약속했지만, 그 말을 믿을 바보는 세상에 없었다. 누가 봐도 돌아올 수 없으리란 것이 뻔한 길....... 하지만 고뇌 끝에 얀 후스는 그 길을 선택한다. 정의로운 세상을 염원하는 마음으로 사지(死地) 예루살렘 행으로 택했던 예수와 같은 결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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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츠에 도착한 즉시, 얀 후스는 체포되었다. 이어서 그간 설파했던 내용을 부정할 것을 종용 당했다. 고개를 가로젓는 얀 후스에게 상상할 수 없는 고문이 가해졌다. 신변보호에 대한 약속을 지켜 줄 것을 청원하는 보헤미아국왕의 편지가 그의 가방 안에 있었으나, 실권 없는 약소국 왕의 호소에 귀 기울여 줄 권력은 없었다. 온 몸이 찢겨져나가는 고통 속에서도, 얀 후스는 끝내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어떤 협박과 고통도 그를 꺾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된 권력은 1415년 7월6일 그를 화형대에 세운 후, 불을 댕겼다.
온몸이 타들어가는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얀 후스를 보며 교권주의자들은 '거위(후스와 동음)한 마리가 잘 구워지고 있네'라고 히히덕거리며 건배했다.

공의회에 참석하기 위해 떠났던 얀 후스가 처절한 고문을 당한 후 불태워졌다는 소식을 들은  보헤미아 국민들과 지지자들은 경악하며 비탄에 잠겼다. 그리곤 외쳤다. '너희들의 말처럼 거위는 불탔다. 그러나 그 거위는 백년 후 부활하여 비상할 것이다!' 그들은 보헤미아를 짓밟고 구시대로 회귀하려는 합스부르크제국과 그에 결탁한 교권세력에 대해 목숨을 건 저항을 이어갔다. 이 투쟁 속에서 얀 후스의 절친, 프라하의 제롬 역시 콘스탄츠로 끌려가 화형을 당했고, 수많은 후스주의자들이 살해되었다. 그러나 얀 후스를 사랑하고 그의 신념을 이어가려는 이들은 흩어지지 않고 모라비아 교단, 헤른후트 형제단을 형성했고, 친합스부르크파 정치세력을 향한 무력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그리고 정확히 백년이 지난 후 얀 후스의 사상이 바탕 된 95개의 대(對)교황 질문 대자보가 비텐베르크 성당정문에 나붙었다. 불탔던 거위의 비상이었다.
(2018. 8.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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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p!
얀 후스의 고향, 보헤미아 지역을 대표하는 맥주는 단연 필스너이다. 아시는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체코는 실로 '한 술'하는 나라다. 국민 일인당 맥주소비 부동의 1위이자, 증류주소비도 늘 10위권에 위치해있다. 또 세계최초의 맥주 박물관을 세웠고, 맥주공장을 국영기업으로 운영하는 나라이기도 하다. 다음 달 “얀 후스, 체코 민주화운동 그리고 프라하의 수도원 맥주2”에서 자세히 다루겠지만, 전국단위의 맥주공장노조가 건설되어있고, 맥주공장에서의 노동경험을 가진 이를 대통령으로 세운 사람들의 국가이다.

이처럼 그 땅의 사람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있기에 체코를 알아감에 있어 맥주는 필수불가결한 매개체이다. 보헤미아 중 플젠은 라거 맥주에 있어 ‘성지 오브 더 성지’다. 뮌헨에서 하면발효효모가 발견되긴 했지만, 아직 이를 제대로 적용하지 못하던 시기, 야콥슨의 ‘칼스버그’와 함께 하면발효맥주의 서장을 연 곳이 이곳 플젠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 처음은 쫌만 더 맛있는 맥주를 저렴하게 맛보고 싶었던 시민들의 열망에서 시작되었다. 
‘드럽게’ 맛없는 맥주를 견딜 수 없다는 플젠주민들의 시정요구는 마침내 주 정부를 움직였고, 잘 나가는 한자동맹 소속 양조사 요제프 그롤이 초빙되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완성된 맥주를 따라 본 사람들은 놀라고 말았다. 이상하게도 밝은 호박 빛 술이 나왔기 때문! 맥주하면 거무튀튀한 에일을 떠올리던 시절, 이 이상한 술은 놀라움을 사기에 충분했다. 원인은 사츠 홉과 플젠의 강물, 그리고 하면발효효모에 있었다. 사츠 홉의 날카로움과 체코산 맥아의 풍미를 담고 있는 신생맥주는 곧 수많은 사람들을 매료시켰고, 수출용 기차를 운용하기 위해  공장내부에 철도역을 지어야 할 만큼 성장하기 시작했다.

이를 계승하는 플젠스키플라즈드로이(필즈너우어크벨/필스너우르켈)공장은 방문자들을 위해 매일 투어를 운영한다. 투어 중 사츠 홉과 맥아를 먹어 볼 수 있으며, 오직 그곳에서만 생산되는 오크통 플젠맥주도 마실 수 있다. 플젠스키...가 다국적 기업에 매각된 후, 오크통은 견학코스에서만 운영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의미가 있어도 자본 앞에서 유지비용 큰 오크통은 속절없이 사라지는 현실, 사츠 홉만큼 씁쓸한 대목이다.

여덟 번째 이야기: 맥주노동자들이 바꾼 세상(얀 후스, 체코 민주화운동 그리고 프라하의 수도원 맥주2)

 

고상균-프로필이미지.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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