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人紋)의 종교 7 - 인간의 무늬인 종교성에 대한 성찰
인간현상
서구 근대사상의 특징을 인간 상실에서 찾는다면 과장일까. 이성적 인간에 대한 믿음에서 출발한 근대가 삼백 년에 걸친 사상활동 끝에 인간의 실존적 소외에 대한 고백으로 귀결된 이유를 입증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신에 관한 이성의 불경이 결국 인간 자신에 대한 회의로 이어졌다는 식의 저주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만일 근대가 잃은 것이 인간이라면, 소위 근대를 극복하려는 탈근대의 사명을 인간 회복에 둬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정도의 문제제기는 해보자. 여기서는 그런 문제제기를 가능하도록 해주는 한 사람을 말하고자 한다.
떼이야르 드 샤르댕(1881~1955)이라는 종합적 사유를 추구한 사람이 있다. 그는 가문의 전통을 따라 예수회에 가입하여 철학과 수학을 공부했지만 이집트로 가서 물리학과 화학을 가르쳤고, 30세가 되어 사제서품을 받았지만 삶에서든 생각에서든 과거의 종교교리에 머물지 않았다. 고생물학에 관심을 갖고 화석을 연구하는 지질학 교수가 되어 몽골, 중국, 인도 등지를 다니며 발굴탐사를 계속했다. 그 과정에서 제자들로 구성된 발굴팀이 ‘북경원인’으로 불린 유골을 발견하여 과학자로서의 명망을 얻기도 했다. 동시에 신학적 물의를 일으켰다는 이유로 교회의 박해와 추방을 당했다.
경험과 사상이 무르익은 57세(1938년)에 2년 동안 집필한 책의 제목이 ‘인간현상’(Le Phénomène humaine)이다. 과학과 종교를 동시에 도입하여 인간의 의미를 밝히려는 것이다. 하지만 때가 아직 일렀다. 종교와 과학 양 진영으로부터 공격을 받은 것이다. 진화론과 결합된 종교사상을 담고 있는 ‘인간현상’은 교황청의 서적 검열에 걸려 그가 죽고 나서야 출판되었고, 출판되고 나서도 “형이상학적 속임수”로 가득 차 있다는 비난을 과학계로부터 받았다. 사는 동안 영예를 누리지 못했지만 그의 사상에 담긴 창조적 가치는 머잖아 과학과 종교 진영 모두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특히 신학은 그전까지와는 다른 세계관을 구성할 수 있는 사상적 무기를 얻게 되었다.
‘인간현상’은 정신과 물질, 종교와 과학, 창조와 진화를 함께 용해시킨 책이다. 당시 대부분의 사상은 과학과 종교 간의 대립구도에 머문 채, 유물론에 기초한 신다윈주의적 과학의 진화이론과 목적론에 근거한 정통 기독교신학의 창조론 사이의 간극을 말하는 것에 만족했다. 그러나 떼이야르는 그 대립구도를 깨뜨리고 둘을 함께 수렴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론을 추구했다. 그것은 실재를 구성하는 핵심요소를 죽은 물체보다는 정신적인 요소에서 찾는 새로운 형이상학을 도입하고, 실재에 대한 탐구에서는 사실성만이 아니라 의미까지 동시에 포착하는 종합적 직관이 필요하다는 점을 과학에 주문하는 것이었다.
그는 인간 ‘현상’에 얽힌 우주운동에 대한 설명을 특정한 존재론에서 유추하는 방식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을 따라 출현하고 있는 것들의 어떤 경험법칙”을 찾는 방식으로 설명한다. 그가 전제하고 있는 형이상학에서는 진화를 생명의 영역에 국한시키지 않고, 물질 자체에 “생명을 향한 목적을 지닌 기초적인 정신”이 있다고 본다. 다시 말해서, 지구를 구성한 무기물의 운동에 이미 진화의 시작이 있었고, 이 진화는 새로운 형질의 우연한 출현에 의해서가 아니라 “목적이 있는 정향진화(正向進化)”로서 일정한 방향을 지닌다는 것이다.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가? 그의 주장에 의하면, 무기물(‘이른 생명’)에서 ‘생명’으로, 생명에서 반성적 의식인 ‘생각’으로, 생각에서 보다 큰 ‘다음 생명’인 오메가 포인트를 향해서 우주사건이 펼쳐진다. 이것이 ‘인간현상’의 4부 를 구성하는 골격이다.
그렇다면 왜 진화를 ‘인간’ 현상으로 이름 짓고, 그것을 통해서 우주사건의 특징을 대변하려 했을까? 떼이야르는 정신과 물질이 종합된 ‘우주의 바탕’에 다가갈 수 있는 열쇄가 인간이고, 인간에게서 우주 바탕의 변화가 가장 활발히 일어난다고 본다. 이것은 근대 계몽주의를 독선으로 끌고 간 인간중심주의(anthropocentrism)와는 다르다. 그는 우주가 진화해온 까닭이 ‘인간의 탄생’에 있다고 보고, 인간을 ‘생명 전체가 기울인 노력의 열매’요, 진화의 ‘첨탑’이요, ‘꽃봉오리’라고 표현한다. 이것은 인간을 예찬하기 위한 주장이라기보다는 정체된 현대문명에 대한 비판이자 인류의 분투에 대한 촉구를 동시에 겨냥한 말이다.
‘인간현상’은 우주운동에 관한 ‘필연적 법칙’이나 ‘종교적 낙관’에 의존하지 않는다. 대신 우주의 진화가 이제 “진화 자체가 된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진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달려있다고 말함으로써, 인류로 하여금 ‘다음 생명’인 ‘오메가 포인트’를 향해 나아갈 것을 권고한다. ‘다음 생명’을 다루는 4부의 언어는 과학적 논증보다는 종교적 비전으로, 논리적 연역보다는 직관적 지혜로 채워져 있다. 여기서 떼이야르는 아마도 우주의 진화로 인해 등장한 반성적인 ‘생각’과 그것의 집단현실인 ‘얼누리’(noosphere), 이 우주의 본바탕에서 이미 활동하고 있는 ‘오메가 포인트’를 향한 사랑과 생명의 열정으로 ‘큰 사람’이 등장하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본다. 이 ‘오메가 포인트’가 신학자인 그에게는 ‘그리스도’의 다른 이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아차, 당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현상’이 우주진화의 과정을 말하기 위해 펼치는 사유는 거대하고 장엄하다. 독자들은 과학을 읽으면서 종교를 연상하거나, 그 반대일 수도 있다. 그는 과학과 종교가 “서로를 튼튼하게 할 때 인류의 얼은 최고에 달하고 가장 활기찬 생명력을 띠게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런 확신은 ‘편파적’인 사유를 ‘전문적’인 식견이라고 오해하기 때문에 자꾸만 커지는 사상의 위기를 경험하는 우리 시대에 필요한 것이다. ‘인간현상’은 고생물학적 관찰의 결과나 종교적 신념에 관한 서술이라기보다는 마침내 인류의 참된 비상(飛上)에 대한 호소라고 할 수 있을까? 떼이야르는 “주저하지 않고 (인류가 길러낸 생명과 평화의) 직관을 끝까지 밀고 가는 것”에 진화하는 우주의 미래가 달려있다고 말한다. 그럼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