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人紋)의 종교- 인간의 무늬인 종교성에 대한 성찰
근본주의 망령
해마다 9월이면 개신교 교단들의 총회가 열린다. 안타깝게도 진취적 정신보다 퇴행적 정책을 도입하는 곳이 되고 있다. 신자유주의로 불리는 지난 한 세대를 지나오는 동안 한국교회가 더욱 보수화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주일 장로교단들의 총회에서 비상식적인 결정들이 연달아 일어났는데, 그 가운데 뜨거운 주제는 성소수자들을 포용하는 목회를 하는 임보라 목사를 이단으로 매도한 것이었다. ‘동성애 반대’라는 슬로건에 갈수록 집착하는 보수교회의 이면에는 길을 잃은 종교가 가진 두려움과 그것을 먹고 사는 근본주의가 도사리고 있다.
생각과는 다르게 이 문제를 해결하기가 쉽지 않다. 근본주의 자체가 쉽게 극복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근본주의 사상은 인간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본능적인 감각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복잡한 세계를 단순한 교리에 담아냄으로써 신봉자들로 하여금 미래의 불안을 해소하게 만드는 기술을 갖고 있다. 현상적인 모습이 조악한 배타성과 획일성을 띠고 있지만, 그것을 뒷받침하는 교리는 무오성(無誤性)의 신념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합리적인 논쟁과 설득을 통해서 변경시킬 수 없는 특징을 갖고 있다.
기독교 근본주의가 태동한 19세기 말은 종교적 세계관이 철학이나 과학과의 대화에서 실패한지 수 세대가 흐르고 있던 때였다. 몰락의 두려움과 확실성에 대한 갈망이 서로 얽힌 복합정서를 타고 근본주의라는 지성의 반동이 일어났다. 근본주의가 반지성주의적 퇴행을 통해 교리적 무오성에 집착한 이유는 ‘확신에 대한 갈망’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지성의 긍지로부터 솟아오른 것이 아니라, 반지성의 자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스스로를 가두게 만든 것은 과학적 지성과의 대결에서 얻은 패배감과 공포 때문이었다. 그런 까닭에 근본주의는 지성의 모험을 배타성이라는 감옥에 가두고, 사상적 열패감을 행위의 공격성을 통해 보상 받으려는 경향을 지닌다.
한국 개신교회 대부분이 이런 도착적인 종교정신에 뿌리를 두고 있다. 게다가 냉전시대와 군부독재시대라는 일상화 된 나치즘의 시기를 지나오는 동안 교회는 저항이나 극복보다는 용인이나 가담을 선택했다. 특히 지난 한 세대 가까이 신자유주의적 약탈이 벌어지는 동안 교회는 체제 안에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순화시킴으로써 기득권 체제에 봉사하는 역할을 했다. 번영의 신학이 지배와 소유의 욕망을 고취하며 사람들을 종교적 문맹에 빠뜨려왔기 때문에, 이제 교회의 가장 큰 적은 외부적인 도전이나 위협이 아니라 내부적인 부패와 무지가 되었다.
문제는 신앙인들이 희망을 잃어갈수록 근본주의가 더욱 큰 마력을 발휘한다는 점이다. 배타성으로 채워진 근본주의적 목소리는 열정으로 해석되고, 그 분리주의적 태도는 거룩한 사명을 향한 것이라고 오인됨으로써, 길을 잃은 사람들에게는 두려움을 떨쳐낼 가장 빠른 길이 바로 근본주의적 가르침에 있다는 환상이 유포된다. 특히 무오성(無誤性)의 신념은 생에 지친 사람들에게 복잡한 노동을 요구하지 않으며 손쉬운 확신에 이르게 한다.
그러나 그 확신은 현실과 계속해서 충돌하며, 그 사이에 생겨나는 부조화는 근본주의적 신념이 신기루에 기초한 환상이라는 점을 말해준다. 어떻게 인간의 정신이 무오(無誤)할 수 있겠는가? 무오성의 관념은 ‘달’과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혼동한 것으로서, 신학자 폴 틸리히의 서술에 따르면, 그 관념은 유한(손가락)을 무한(달)으로 드높이려는 신학적 ‘마성화’(demonization)의 산물일 뿐이다. 마성화는 관계의 실패를 관념의 확실성으로써 보상받으려는 세력들에게 피할 수 없는 유혹이다.
지지난 겨울의 촛불혁명 이후 한반도에는 미래를 향한 꿈들이 분출되고 있다. 이 거듭남의 시대에 한국교회가 과거의 사슬에 묶여 있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어두운 시대에 빛났던 한국교회 일각의 진보적 분투는 근본주의가 육체가 된 교계에서는 힘을 많이 잃었다. 복음의 부름 앞에 떳떳한 신앙공동체가 다시 일어나야 한다. 왜냐하면 편협한 교리에 갇히지 않는 종교 생태계가 조성되기 전까지 우리는 근본주의 망령이 출몰하는 세계를 벗어나기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