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의 울림 - 삼일운동 100주년에 다시 읽는 독립선언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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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목특집 : 3.1운동 100주년 기념 특별기고
 

100년의 울림
- 삼일운동 100주년에 다시 읽는 독립선언서들 -

삼일운동 100주년에 우리 조상들의 독립선언서들을 다시 찾아 읽자니 자못 감격스럽기도 하고, 과거에는 보이지 않던 행간의 의미들이 언뜻언뜻 눈에 띄기도 한다.
역산해 보면, 대개 우리의 할아버지나 증조부, 고조부 연배의 조상들이 1919년 국내외 여러 곳에서 일본 제국주의 세력을 물리치고 우리 민족의 독립을 달성할 것을 선언했다. 그것은 나라가 일본에 병합된 지 꼭 10년째 되는 해의 일로서, 목숨을 걸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나라, 즉 주권을 돌려달라는 말이 평화적으로 오간 적이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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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독립선언서

그런 절실함이 묻어나는 1919년의 독립선언문들 가운데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일본의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발표한 이른바 <2‧8독립선언서>다. 그해 발표된 여러 건의 독립선언서들 가운데 시기적으로 가장 앞섰고, 발표 장소도 식민세력의 심장부인 도쿄여서 주목 받은 선언서다.

“우리는 정당한 방법으로 우리 겨레의 자유를 추구할 것이나 만일 성공치 못하면 우리 민족은 생존의 권리를 위하여 온갖 자유행동을 취하여 최후의 일인까지 자유를 위해 뜨거운 피를 흘릴지니 어찌 동양평화의 불행이 아니겠는가. 우리 민족에겐 한 명의 병사도 없으니 병력으로 일본에게 저항할 실력이 없다. 그러나 일본이 우리 겨레의 정당한 요구에 불응한다면 우리 민족은 일본에 대하여 영원한 혈전을 선언하리라.”

이 선언의 요지는 바로 이 대목에 집약되어 있다. 우리는 우리 민족의 자유, 즉 독립을 위해 모든 정당한 방법을 동원해 노력할 터인데, 그러한 요구에 일본이 응하지 않으면 ‘영원한 혈전(血戰)’, 즉 목숨을 건 싸움을 전개하겠다는 내용이다.

이 대목을 음미해 보자면, 우선 ‘~하라. 그러나 이에 불응하면 ~하겠다’는 논리구조다. 우선 말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한다는 것은 전형적인 근대의 산물이다. 그 전에야 말보다 주먹이 앞서서 권리 주장은 곧 전투 또는 전쟁이 될 개연성이 높았다. 그러나 ‘이성의 시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일단은 말로 주장하는 것이다. 게다가 이 선언의 주체는 식민세력의 수도에 유학하고 있는 대학생들 아닌가? ‘우선은 피차간에 통할 수 있는 논리로 독립을 주장하지만, 이에 따르지 않으면 싸워서 독립을 얻겠다’는 취지다.

그렇다고 이 선언을 작성한 사람이나 선언의 현장에서 듣는 사람들 중에 일본이 이에 응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마도 없었을 것이다. 사실 선언은 그런 것이었다. 선언하는 사람들은 아주 절실하지만 그 선언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은 전혀 다른 입장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지 않았으면 이 세상의 역사는 선언만으로 수천, 수만 번 바뀌었을 것이다.

늘 문제는 ‘선언 이후’에 있는 것이다. 선언의 주역들이 그 선언을 실현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그것은 개인별로 대단히 달랐다. ‘2‧8독립선언’에 참여한 사람들의 그 뒤 다종다양한 행로는 우리 각자가 한번 찾아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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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독립선언서

두 번째로 음미할 대상은 이른바 <기미독립선언서>다. 국내에서 종교계의 대표자들이 채택해 발표한 것으로 그 해에 나온 선언서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다. 한때 중고교 교과서에 원문이 실리기도 했다.

한때 이 선언서를 외워보려고 노력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국한문 혼용체의 문장이 워낙 복잡해서 아무리 노력해도 첫 문장 외에는 머릿속에 남는 것이 없어 낙담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나중에 연구자들에게 들어보니 이 선언서의 핵심은 바로 그 첫 문장에 있고, 나머지는 그리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듣고 마음이 가벼워졌던 적이 있다.

사실 이 선언은 ‘양심’과 ‘도의’와 ‘인도’를 선언의 토대로 거론하는 논리적 구조다. 그래서 지금도 읽고 나면 뭔가 거창한 것 같으면서도 실체가 손에 잡히지 않아 허탈한 마음이 없지 않다. 그렇지만 첫 문장은 조금 다르다.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맛이 있다.

“오등은 자에 아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현대어로 번역하면 이렇게 된다. “우리는 이로써 우리 조선이 독립국이며 조선인이 이 나라의 주인임을 선언한다.” 사실 이 문장을 읽을 때 누구나 의문을 가질 수 있다. 독립선언이니 “우리 조선이 독립국”임을 선언하는 것은 이해하겠는데, 왜 거기에 덧붙여 “조선인이 자주민”임까지 선언했을까 하는 점이다. 바로 이같은 의문은 이 선언의 핵심을 찌르는 것이다.

당시의 조선인이 정말 자주민(自主民)이었을까? 정말 ‘스스로 이 나라의 주인이자 자기 권리의 주인인 인민’이었을까? 냉정하게 말하자면, 일본에 강점된 조선의 백성이 무슨 자주민이었겠는가? 한 발짝 더 나아가, 강점되기 전에도 이른바 4000여 년에 이른다는 한민족의 역사에서 백성이 자기 역사의 주인이었던 적이 과연 있었을까?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이 글은 ‘선언서’라는 사실이다. 아직은 이 글의 내용이 현실이 아니지만 기어코 이루어내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담아 쓴 글이다. 그렇게 이루어내고자 하는 목표들 가운데 하나가 “우리 조선이 독립국”이 되는 일이고, 다른 하나가 “조선인이 자주민”이 되는 일이었다.

어제는 임금의 신민이었지만 이제 스스로 운명의 주인이 되겠다는 것이며, 바로 그런 바탕 위에서 이 나라의 독립도 선언한다는 것이 바로 이 <기미독립선언서>의 취지인 것이다. 그렇게 보면 이 첫 문장이 아주 달라 보인다.

달리 말하자면, <기미독립선언서>는 첫 문장에서부터 ‘반제 반봉건’의 의지를 아주 확실히 했다. 일본제국주의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독립도 찾고, 수천 년 계속되어온 전근대적 지배의 틀도 깨뜨려 민주적 토대를 마련하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 이 선언서에서 이런 취지를 찾아 읽어내면 마음이 뜨거워진다. 이것은 삼일운동이 한민족 역사에 나타난 최초의 시민혁명임을 증명하는 아주 확실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런 자주민 의식이 언제부터 어떻게 싹이 텄는지를 알아야 하는데 그것은 아직 학계에서도 분명하게 정리되지 않았다. 길게 보면 1801년 공노비 해방 때까지 연대를 끌어올리는 주장도 있고, 1876년 개항 이후 서구 사상이 들어오며 <법의 정신> 등을 개화파 지식인들이 읽었다는 기록도 있지만, 이 점은 좀 더 연구가 이뤄져야 할 것 같다. 짧게 보면 1910년 일제의 강점 이후, 어차피 군주제는 종말을 고했으니 공화제적 사고를 바탕으로 새로운 나라를 건설해야 하지 않느냐는 사고가 본격화된 것은 사실이다. 특히 1919년 1월 21일 태황제 고종이 서거한 이후 ‘다시 돌아가서 모실 임금(황제)’가 없다는 인식이 조선인들 사이에 강하게 자리 잡은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자주민의 나라’로서의 ‘독립국’이라는 관념이 성립되었고, 이를 토대로 그해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민주공화제’가 임시헌장 상의 국체로 채택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새로 수립된 ‘자주민의 나라’의 이름이 바로 ‘대한민국’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국호는 식민지 시절과 광복 후의 온갖 우여곡절을 겪는 중에도 변함없이 그대로 유지되어 왔다. ‘민주공화제’라는 국체 역시 광복 이후 10차례나 되는 개헌의 역사 속에서 권력구조 등 다른 조항은 수없이 바뀌었지만 전혀 흔들림 없이 제1조의 위상을 유지하고 있다. 그 모든 것의 출발점이 바로 <기미독립선언서>의 첫 문장, “오등은 자에 아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한다”라는 역사적인 선언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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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독립선언서

세 번째이자 마지막 선언서는 만주 지역의 독립투사들이 중심이 되어 발표한 <대한독립선언서>다. 이 선언은 말미에 선언일을 ‘단기 4252년 2월’이라고만 기재하고 있어, 이를 서기 1919년 2월 1일로 보자면 음력으로는 ‘기미(己未)년 1월 1일’이 된다. 그래서 선언서 문안은 당연히 그 전해인 1918년, 즉 ‘무오(戊午)년’에 작성되었다고 보고 ‘기미독립선언서’와 구별하기 위해 ‘무오독립선언서’라고 불러 왔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 선언의 발표 시점을 오히려 3월 중순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그렇게 보면 3가지 선언 가운데 가장 늦은 시점이 되어 ‘독립선언서들 가운데 발표 시점이 가장 앞섰다’는 주장은 빛을 잃게 된다. 그러나 그 문장의 섬세함과 필치의 웅혼함은 다른 선언서들을 압도하는 면모가 있다. 특히 <기미독립선언서>와는 대조적으로 이 <이 대한독립선언서>는 마지막 문장이 읽는 이의 마음에 큰 파장을 일으킨다.

“육탄혈전(肉彈血戰)으로 독립을 완성할지어다.”

무슨 논리로 독립의 당위성을 설파하든 독립은 말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선언자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너의 한 몸 다 바쳐 독립을 이루라’는 취지의 말로 선언을 마무리한 것이다. 이 선언서는 당연히 일제 식민당국도 들으라고 내놓은 것이지만 동시에 식민의 압제에 신음하는 우리 민족에게도 떨쳐 일어나 독립투쟁의 전선에 함께 나서자고 권유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니 그 마무리는 민족 구성원의 마음을 움직여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 <대한독립선언서>는 탁월했다.

이 선언이 갖는 의미는 한 가지가 더 있다. 한민족의 역사와 국권의 연속성에 대한 논리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에 해당하는 대목을 현대문으로 풀면 이렇게 된다.

“우리 대한(大韓)은 오랜 옛날부터 우리 대한의 한(韓)이요 이민족의 한(韓)이 아니라. 반면 년 역사의 내치 외교는 한왕한제(韓王韓帝)의 고유권한이요, 사방 백만 리의 높은 산 아름다운 물은 한남한녀(韓男韓女)의 공유재산이요. (…) 우리나라의 털끝만한 권한이라도 이민족에게 넘겨줄 뜻이 없고, 한 뼘의 우리 땅이라도 이민족이 점유할 권한이 없으며, 한 사람의 우리 백성이라도 이민족이 간섭할 권한이 없으니 우리나라는 완전한 한인(韓人)의 한(韓)이라.”

지금 들어도 우리 민족사의 자주성에 대한 웅변이 귀에 쟁쟁하다. 그런데 이와 거의 같은 주장이 이미 1917년 7월 만주 지역에서 발표된 <대동단결의 선언>에서 발견된다. 그 대목을 다시 현대문으로 여기 옮긴다.

“융희 황제[순종]가 삼보(三寶. 토지와 국민과 주권)를 포기한 8월 29일은 바로 우리 동지들이 삼보를 계승한 8월 29일이니 그 사이에 한 순간도 멈춰 쉼이 없었다. 우리 동지는 완전한 상속자다. 저 황제권 소멸의 시기가 바로 민권 발생의 때요, 구한국 최후의 하루는 곧 신한국 최초의 하루임은 무슨 까닭인가?
우리 한국은 태고 이래로 한국인의 한국이요, 비한국인의 한국이 아니다. 한국인 사이에 주권을 주고받는 것은 역사상 불문법의 국헌이요, 비한국인에게 주권을 양여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무효이며, 한국 민족성의 절대 불허하는 바이다. 이 때문에 경술(庚戌 1910)년 융희 황제의 주권 포기는 바로 우리 국민 동지에 대한 묵시적인 선양이니 우리 동지는 당연히 삼보를 계승하여 통치할 특권이 있다. 또한 대통을 상속할 의무가 있도다.”

어떤가? 너무도 정연한 논리 아닌가? 황제가 병합조약의 문서에 도장을 찍었다고 나라의 주권이 넘어가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 순간 국민이 주권을 계승했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이 나라의 주권은 한 시도 단절 없이 이어져 오고 있다는 주장이 성립된다. 바로 이런 ‘주권계승자 인식’이 <기미독립선언문>에서는 ‘자주민’이라는 표현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이 1917년 <대동단결의 선언>과 1919년 <대한독립선언서>는 모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뒤 외무총장 등을 지낸 조소앙 선생이 기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임금이 아니라 국민을 주체로 세우는 ‘민주공화제’ 인식이다. 그것이 누구 한 사람의 논리였겠는가? 나라 잃고 10년 가까이 이국땅을 떠돌며 노심초사하던 지식인들의 총의가 모아져서 형성된 것일 터이다. 국제법적으로는 ‘일본국민’으로 치부될 수밖에 없던 조선인 독립투사들이 나라 되찾는 일에 자신을 온전히 바칠 것을 결의하면서 그렇게 되찾은 나라는 결코 과거와 같은 임금의 나라가 아니라 임금으로부터 주권을 계승한 국민의 나라라는 논리를 당당하게 개진한 것이다.

그렇게 주권을 계승한 국민이 지금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민주공화제의 오늘과 내일도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100년 전 조상들이 설파한 한민족 역사의 연속성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민족통일’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100주년에 다시 읽는 독립선언서의 울림이 결코 간단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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