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헌 인문(人紋)의 종교 13 - 두 이야기의 합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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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무늬인 종교성에 대한 성찰 13 : 두 이야기의 합류

삼일운동 백주년을 맞아 기품 있는 옛 정신을 잇고자 하는 열망이 크다. 특히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가운데 절반을 차지한 개신교 진영은 과거의 정신적 지도력을 회복하고자 하는 고심이 깊다. 개신교 현실에 비춰보건대 거의 불가능한 과제처럼 보인다. 몸은 커졌어도 종교로서의 품격이 거의 무너졌기 때문이다.

삼일운동 이후 개신교는 탈역사적 타개주의 신앙과 자본친화적 성공주의 신앙을 오가며 종교로서의 길을 잃었다. 일제 식민통치 기간 동안 교회는 탈역사적 내세신앙에 심취했다. ‘내세의 구원’을 바라던 종교적 믿음이 간혹 목숨을 건 저항동력이 되기도 했지만, 대체로는 현실 문제를 호도하는 기능을 했다. 관념적 내세신앙에 치우치던 교회가 욕망에 착안한 번영종교로 탈바꿈해 간 것은 한국사회가 자본주의 체제를 확립해간 과정과 일치한다. ‘현세의 번영’에 대한 교회의 집착은 자본의 욕망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았고, 그 결과로서 대형교회들이 생겨났다. 내세신앙이든 번영신앙이든 그 정신구조는 일방적 편파성을 갖고 있다. 전자는 세계 너머의 환상에 골몰하고, 후자는 현세의 늪에 빠져 있다.

건강한 종교에는 두 이야기 즉, 세계 너머의 이야기와 이 세계 속의 이야기가 조화롭게 합류한다. 세계 너머의 이야기는 세계를 변혁하는 지혜와 동력이 되며, 이 세계를 변혁하는 삶의 이야기를 통해서 세계 너머의 이야기는 정당성을 획득한다. 이런 조화가 깨질 때 종교는 길을 잃는다.

작년에 탄생 백주년을 맞은 기독교 신학자 가운데 서남동이 있다. 그는 1979년에 ‘민중의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글을 보완하여 완성한 논문의 제목을 새로 달았다. ‘두 이야기의 합류’이다. 여기서 그는 한국 기독교의 역사 참여적 삶에서 기독교의 민중사와 한국의 민중사가 서로 ‘합류’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합류에 관한 사상은 단지 두 역사의 만남만이 아니라 하늘과 땅의 만남, ‘신과 혁명의 통일’에 대한 사상으로까지 확대된다.

그렇다면 ‘두 이야기의 합류’라는 개념에는 보다 깊은 사색이 묻혀있다 하겠다. 사상가로서 서남동이 일관되게 추구했던 물음은 ‘역사적 실재란 무엇인가’였다. 철학은 실재(實在)의 본성과 의미에 대해 묻고 답하기 위해서 법칙과 자유, 일(一)과 다(多), 전체와 부분, 가능태와 현실태, 작용인(efficient cause)과 목적인(final cause), 필연과 우연, 영속과 사멸 등의 관계에 관심한다. 건전한 철학은 대부분 이 대립항들을 조화롭게 설명하여 실재의 전모를 드러내고자 한다.

서남동의 ‘두 이야기의 합류’라는 개념은 일단 존재의 역동성에 관한 증언이지만, 더 나아가면 특정한 세계관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목표는 한 이야기에 집착하는 사유의 극단을 피하려는 것이다. 이를테면 법칙이나 작용인에 착안한 근대 과학이 기계론적 환원주의에 귀착하고, 세계의 우연성과 사멸성을 강조한 종교가 관념적 타계주의에 경도된 착오를 피하기 위해서는 ‘두 이야기의 합류’가 고려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철학의 근본물음이자 그 해결책에 관한 문제의식과 결부되어 있다.

기독교 신학 역시 그러하다. 신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가? 신의 화육(incarnation)으로 고백되는 그리스도의 본성은 무엇인가? 하나님나라는 역사에 어떻게 깃드는가? 이런 물음에 대해서 기독교 신학은 ‘두 이야기의 합류’로써 대답해왔다. 기독교의 신은 역사로부터 분리된 천상의 존재가 아니라, 역사 속으로 화육함으로써 자신을 드러내는 존재였다. 따라서 신과 세계의 본성을 설명하는 신학은 ‘두 이야기’의 합류 즉, 초월과 내재, 영원과 시간, 성(聖)과 속(俗), 역사와 하나님 나라 등의 두 이야기를 서로 엮어서 사상의 균형을 지켰다. ‘한 이야기’에 집착한 신학은 시기적 유행으로 타고 잠시 흥행하다가 결국 도태되었다.

서남동은 두 이야기를 함께 수렴할 수 있는 신학을 추구했다. 그것은 전통적인 종교사상에 만연한 ‘이원론을 극복’하고, 현실 종교가 잃어버린 ‘미래의 비전’을 획득하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종교와 과학 사이의 오랜 대립을 해소하고, 신의 은총을 바라는 마음이 세계에 대한 믿음과 충돌하지 않고, 신의 실재와 역사의 실재를 통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상적 토대를 만들고자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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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남동이 자신의 글 ‘민중의 신학’을 고쳐 완성한 후 ‘두 이야기의 합류’라는 제목을 새롭게 단 것에는 깊은 뜻이 있다. 그는 민중의 고난을 보면서 그리스도의 고통을 보았고, 민중의 희망을 통해서 신의 섭리를 봤다. 민중에 관한 이야기는 신의 이야기였고, 그 두 이야기는 역사에서 합류한다. 이런 합류를 증언할 수 있는 서남동의 종교적 세계관이 지난달에 말한 ‘범재신론’이다.

반면에 소위 ‘정통’ 신학은 두 이야기가 결코 합류할 수 없다고 보는 특정한 세계관을 지닌다. 그것은 이원론적 우주론에 의해서 지탱되는 초자연주의적 세계관이다. 그런 사유체계에서는 성(聖)과 속(俗)은 서로 다른 공간이요, 영원과 시간은 서로 분리된 시간이며, 역사와 하나님 나라는 분립하여 존재하며, 이 세계를 초월한 신은 이 세계에 좀처럼 내재하지 않는다. 두 이야기는 합류할 수 없는 서로 다른 이야기로 이해되는 것이다.

그러나 서남동의 범재신론적 세계관에서는 ‘신과 혁명의 통일’이 이루어지며, 민중들의 자력(自力)적 구원은 신의 타력(他力)적 섭리를 배제하지 않고, 역사 속에서 구현될 것으로 희망되는 천년왕국의 상징은 역사 너머에서 이뤄질 신국(神國)의 상징과 대립하지 않는다. 두 이야기는 반드시 합류한다. 이 세상에게 주는 신의 복음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다.

건전한 종교는 신비로운 신의 초월에만 탐닉하는 영원회귀의 신화를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 또한 신의 내재(內在)를 세계와 동일시하여 신의 초월에 담긴 종교적 희망을 해소시키지도 않는다. 신은 세계와 ‘합류’한다. 그곳이 어디인가? 겨울을 끝맺기 위해 터트리는 매화의 꽃망울에서 보는 눈도 있으며, 역사를 창조하기 위해 흘리는 민중의 땀에서 찾는 눈도 있다. 종교만이 아니라 살아있는 정신에는 항상 두 이야기, 아니 많은 이야기들이 합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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