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세대들과 나누는 5.18광주민주항쟁 : 오월 광주
시내 나가지 말라는 친구의 전화를 받았다. 고등학교시절 살았던 외삼촌 집을 졸업과 동시에 나와 혼자 자취하던 시절이었다. 5월 18일이었다. 주인집 TV에서는 프로복싱 세계타이틀전이 한창일 때였다.
대학생들은 집에까지 쳐들어와 잡아간다는 말에 주인집 아줌마는 대문을 잠그고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했다.
매일 들려오는 소식은 두려운 소식뿐이었다. 대학생처럼 보이는 젊은이는 무조건 때리고, 찌르고 군용트럭에 싣고 간다는 얘기였다. 숨죽이던 시민들은 일어났다. 시민들은 각목을 들었고, 택시기사들이 수백 대의 차량으로 도청으로 행진했다. 그 와중에도 MBC에서는 미스코리아 중계가 되고 있었다. 시민들은 방송국에 불을 질렀다.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진압을 보도하지 않는 것에 대한 항의였다.
이틀 후 쯤 나는 친구와 함께 전남대 앞으로 갔다. 학교 안에는 공수부대가 막고 있었고 우리는 학교 안에 학생들이 잡혀있다고 확인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하면서 투석으로 최루탄과 싸웠다.
그렇게 일진일퇴를 하다 어느 순간 방독면도 하지 않는 공수부대는 총을 들고 그대로 돌진했다. 우리는 실개천에 빠지며 퇴각했다. 그때 그곳에서 임신부 최미애 씨가 총에 맞아 사망했다고 한다.
곧바로 우리는 시내로 나갔다. 걸어가는 중에 시민들을 태운 트럭을 탔고 아세아 자동차 공장으로 갔다. 공장에는 출고를 앞둔 군용트럭 수십 대가 있었고 운전할 줄 아는 시민들이 너도나도 차를 하나씩 가지고 다시 시내로 나갔다.
시내로 나가자 각목을(하얀색 칠이 된 가로수 지지대였다) 하나씩 든 시민들이 타서 차량은 꽉 찼다. 주유소는 그냥 기름을 넣어 주었고 슈퍼에서는 음료와 빵을 실어 주었다.
우리는 31사단 앞으로 차를 몰았다. 정문에는 군인들이 2열 횡대로 완전무장을 하고 막고 있었다. 우리는 차로 돌진하자고 하여 전속력으로 정문으로 돌진했다. 그러나 군인들은 미동도 없었다. 급브레이크를 밟고 애국가를 부른 다음 도청을 행해 갔다.
그즈음 시민군은 방위산업체 예비군 무기고에서, 지서 무기고에서 꺼낸 총으로 무장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놀란 공수부대는 시내에서는 철수하고 도청에만 남아 헬기로 비밀문서를 나르고 있었다. 투석과 최루탄이 난무하였다.
그날 밤 공수부대는 몰래 도청에서 철수하고 우리는 도청을 접수하였다. 아니 시민군은 도청을 접수하였다. 그러나 나는 도청에 들어가 않았다.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도청을 접수함과 동시에 광주는 완전히 고립되었다.
도청 앞 상무관에는 총탄에, 대검에 의해 살해된 주검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통곡이 끊이질 않았다.
매일 도청 앞에서는 집회를 하였고 우리는 집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걸어서 시내로 나갔다. 걷다가 지나가는 시민군의 차가 있으면 그것을 타고 갔다. 그렇게 광주의 해방공간은 평화로웠다.
어느 날 도청 앞 게시판에 미 7함대가 한국으로 출동하였다는 외신 보도가 있었다는 내용이 있었고, 시민군 지도부는 흥분하여 시민들에게 알렸다. 미국이 드디어 광주를 구하기 위해 한국으로 출동하였단다. 우리는 환호했다. 그러나 미국은 우리 편이 아니었다. 그렇게 한국에서의 미국의 천사 이미지는 벗겨졌다.
도청 사수 마지막 새벽 계엄군이 쳐들어오니 시민여러분 도청으로 와주십시오 하는 여성의 방송을 어렴풋이 들었다. 동시에 라디오에서는 폭도들은 자수하라, 생명은 보장한다는 계엄군의 방송이 교차되고 있었다.
나와 친구는 집 앞 마당에서 숨죽이며 있었다. 새벽이 밝아올 무렵 “광주시민 여러분 우리를 잊지 말아주십시오“라는 방송을 마지막으로 도청은 점령당했다.
해방광주의 10일은 범죄 하나 없는 완벽한 공동체였다. 전 세계에 유례가 없는 전무후무한 역사였다. 그 공간 한 모퉁이에 있었음에 가슴 뿌듯하다. 그러나, 평생 용감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은 어쩔 수가 없다.
시민군의 마지막 방송이 가끔 생각난다. 광주시민 여러분! 우리를 잊지 말아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