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드니?’ 라고 물어봐주기
저는 원칙적이라는 소리를 많이 듣습니다. 좋은 말로 원칙적이지만 막히고 용통성이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기도 하지요. 한 때는 동료의 얼굴보다는 출근 시각을 먼저 확인하고 ‘또 늦었군!’하는 표정으로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기도 했었습니다. 왜 늦었는지는 별 관심이 없었고 잦은 지각이라는 그 사실에 불쾌감을 표했었죠. 상담공부를 하고 치유활동을 하면서 조금씩 바뀌었습니다. 출근 시간보다는 동료와 눈을 마주치면서 인사하기 시작했습니다. 혹 낯빛이 안 좋기라도 하면 무슨 일 있나 물어봐 줍니다.
물론 잘 안 되는 날도 있습니다. 존재 자체에 대해 관심을 갖고 귀 기울여 주기는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왜 그런지 몰라 혼란스럽기도 했습니다. ‘너’에게 관심을 가지고 물어봐 주는 것을 마치 감정노동처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얼마 안가 내가 힘들 때는 너한테 관심 쓸 여유조차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내가 힘들다고 하고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하다는 것을 말이죠.
며칠 전 아침 일찍 전화가 왔습니다. 후배 활동가 A입니다. “어떡해요. B가 한강 다리 난간에 올라갔었데요.”하며 꺽꺽대며 울먹입니다. 연락이 안돼서 걱정을 했는데 페이스 북에 죽으려고 한강대교에 올라갔었다는 글을 발견하고 너무 놀라 저한테 전화를 한 것입니다. 다행히 경찰이 발견을 했고 극단적 상황까지 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저 역시 심장이 쿵하고 얼어붙었습니다. 겨우 A를 진정 시키고 화장실로 달려갔습니다. 페이스 북 글을 찬찬히 읽어봅니다. 일에 대한 책임감과 버거움이 고스란히 묻어납니다. 스스로 의지가 강하다고 생각했지만 의지의 문제가 아니었던 그 무게감을요. 차라리 죽음으로 향했던 그 마음에 어떠했을지... 눈물이 났습니다.
살면서 ‘내가 힘들다, 죽을 만큼 힘들다’라는 말을 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신념으로 활동하는 활동가들 사이에선 더 더욱이요. 그런 얘기는 턱없이 나약한 태도로 비치기 때문이지요. 조직사업을 하기 위해서 퇴근 후 늦게까지 술자리에도 함께해야 하고, 주말 집회나 농성은 밥 먹듯이 하면서도 맡은 일은 깔끔하게 잘 해내야 합니다. 일머리가 조금만 엇나가면 “그럴 줄 알았어.”라며 비난의 화살들이 날아듭니다.
게다가 직책이나 나이, 성별에 따른 위계질서와 고정 관념, 편견도 많습니다. 어느새 “그때는 이랬어...”라며 “그러니까 지금 이래야지” 하는 무언의 압박을 주기도 합니다. 상처를 안겨주지만 정작 말하는 당사자는 잘 모릅니다.
스트레스가 쌓여갑니다. 나를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주변을 자꾸 의식하게 됩니다. 내가 없어지고 쪼그라들게 되지요.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생각해 보지만 잘 떠오르질 않습니다. 10여 년 전부터 마음이 아프고 힘든 활동가들을 챙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노조에 대책이 필요하다고 문제제기도 했습니다. 주변 동료들에게 힘들면 상담을 받아보라고 권하기도 하고 쉬라고도 했습니다. 쉽게 변하지 않는 현실과 맴맴 제자리 도는 느낌에 답답할 뿐입니다.
다음 날 A에게 문자를 보냅니다. B에게 안부 물어 주라고. 지금은 어떤지, 더 이상 스트레스 받지 말고 쉬고 싶으면 쉬어도 된다고 얘기해주라고요. 사람이 먼저니까요.